명성산-개혁 군주 궁예를 위한 변명
(2021년 10월 14일)
瓦也 정유순
시월의 멋진 어느 날. 억새꽃이 아름답다는 경기도 포천의 명성산이 나를 오라 손짓한다. 명성산(鳴聲山, 922m)은 울음산이라고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왕건(王建)에게 쫓기어 피신하던 궁예(弓裔)가 이 산에서 피살되었다고 하며, 궁예가 망국의 슬픔을 통곡하자 산도 따라 울었다고 하는 설과, 주인을 잃은 신하와 말이 산이 울릴 정도로 울었다고 하여 울음산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는데, 울음산을 한자[울 명(鳴)자와 소리 성(聲), 뫼 산(山)]로 표기한 것이다.
<명성산 계곡>
포천 일대의 산은 궁예의 전설을 빼고 이야기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리고 곳곳에 전설이 지명으로 남아 있다. 새하얀 억새 물결과 산속의 호수가 우물처럼 맑은 곳에서 슬픈 궁예의 이야기를 찾아보자. 산정호수 주차장에서 도로를 건너 식당골목을 지나 계곡으로 들어가 등룡폭포를 지나는 계곡 코스를 이용한다. 두 시간 정도 들어가면 억새밭을 만나게 된다. 억새밭에서 팔각정까지 억새는 장관을 이룬다. 팔각정 옆에 설치되어 있는 1년 후에 받는 우체통도 매우 이색적이다.
<명성산 등룡폭포>
아름다운 산행지에서 만나는 궁예의 탄생설화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운명이 불길하다 하여 버려질 때 이를 받은 유모(궁녀)의 손가락이 눈을 찔러 한쪽을 실명하여 애꾸가 된다. 그런데 ‘활 잘 쏘는 이의 후손’이라는 뜻으로 활 궁(弓) 후손 예(裔)자를 썼는데, 이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 설화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10살 무렵 유모에게서 자신의 출생비화를 듣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세달사(뒷날의 흥교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명성산의 가을>
그 당시 신라는 천년 동안 개개인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골품(骨品)제와 육두품 등 신분과 혈통에 따라 왕위와 벼슬자리를 나누어 맡아왔다. 그 때문에 진성여왕 때는 무능한 벼슬아치들의 누적된 실정으로 나라가 쇠퇴일로였다. 전정(田政) 군정(軍政) 세정(稅政) 등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도탄에 빠져 허덕이던 백성들이 등을 돌리자 그때를 틈타 힘 있는 지방의 호족들과 장수들이 백성들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각처에서 군사를 일으키게 되었다.
<명성산억새바람길 입구>
상주에서 맨 처음 일어난 원종과 애노를 비롯하여, 송악의 왕륭, 포천의 성달, 원주의 양길, 강릉의 순식, 안성의 기훤, 충주의 청길, 괴산의 신훤, 청송의 홍술, 안동의 원봉, 영천의 능문, 상주의 아자개, 성주의 양문, 전주의 견훤, 진주의 왕봉규 등이 그들이다. 철원에 기반을 두고 군사를 일으킨 궁예도 겉모양은 비슷했으나, 신분이 승려였기에 지방의 호족이나 장수들과는 근본부터 다를 수밖에 없었다.
<명성산 억새밭>
당시의 궁예는 신선한 개혁가였다. 궁예가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모두가 우리의 적이다’라고 외치며 군사를 일으키자 명주 관내의 여러 사찰의 향도대원들이 그 휘하로 들어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는 양길의 부하 5백 명을 이끌고 명주(강릉)로 들어갔는데 철원으로 갈 때는 군사가 3천5백 명이 되었다.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에 불어난 군사의 숫자가 3천 명에 이르는 셈이다. 사찰의 향도대가 합류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명성산 억새밭>
당시 각처에 있는 사찰의 규모는 승려 숫자가 수천 명에 이르는가 하면, 수많은 농토와 농노를 거느렸다. 자연히 사찰의 재산을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자위대가 생겨났다. 그것이 향도(香徒)로 불교 신앙 결사체(結社體)였으며 차차 조직적으로 발전해 사찰의 향도대가 되었다. 향도대는 젊은 승려들이 주축이 되었고, 그들은 바깥세상의 움직임에 민감했다. 승려이면서도 재산과 처첩을 소유하는 등 바깥세상의 귀족들 못지않게 부패해 있는 원로 승려들을 몰아내고 사찰을 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게 되었다.
<명성산>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 궁예는 장수로서 빼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신라에 등을 돌린 백성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하고 미륵불로 자처하게 된다. 그 후 지배자가 되어 운명적으로 왕건의 아버지 왕륭을 만난다. 왕륭(王隆)은 도량이 넓고 뜻이 높은 큰 인물이었다. 개성 송악산(宋岳山) 남쪽 기슭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하루는 중 도선(道詵)이 문밖 나무 그늘에서 쉬다가 “이 땅에서 성인(聖人)이 나오리라” 하였다.
<명성산 억새밭>
이 소리를 들은 왕융은 나가 맞아서 함께 송악산에 올라갔다. 도선(道詵)은 아래위로 훑어보고 나서 글을 한 통 쓰더니 이를 봉투에 넣어 그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내년에 반드시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아기가 장성하거든 이것을 주라”하였다. 이 글은 감춰 두어서 세상 사람은 아무도 몰랐다. 이듬해인 877년(신라 헌강왕 3) 정월에 과연 아들을 낳으니 곧 왕건(王建)이다. 궁예(弓裔)가 스스로 임금이라 칭하고 일어섰을 때 왕융은 송악군(宋岳郡)의 사찬(沙粲)이었다.
<명성산 억새밭>
왕륭은 군(郡)을 들어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니 궁예는 매우 기뻐서 그를 금성태수(金星太守)로 임명하였다. 그는 궁예에게 건의하기를 “대왕께서 조선(朝鮮)ㆍ숙신(肅愼)ㆍ변한(弁韓)의 땅을 모두 차지하고 군림하시려면 송악(松岳)에 성을 쌓는 것이 상책입니다. 저의 아들 건(建)에게 책임을 맡겨 주십시오.” 하였다. 궁예는 그 말대로 성을 쌓고 왕건을 수비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후일 왕건이 임금이 되자 아버지 왕융을 추존(追尊)하여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이라 하였다.
<명성산 억새밭>
901년 궁예는 나라를 세우고 고려라 했다가 3년 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고쳤다. 911년에는 다시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고 도읍지를 개성에서 철원으로 천도한다. 이를 두고 궁예가 변덕이 심하여 국호와 연호를 자주 변경했다고 한다. 처음에 정한 고려라는 국호에는 고구려를 수복하려는 꿈이, 마진이라는 국호에는 고구려뿐 아니라 삼한과 발해를 모두 통일하여 동방의 큰 나라를 세우자는 뜻이, 태봉이라는 국호에는 귀족과 평민과 노비의 차별이 없는 미륵용화세상을 이루어야 한다는 바람이 담겨있는 것이다.
<명성산 억새밭>
또한 연호를 무태(武泰)→성책(聖冊)→수덕만세(水德萬歲)→정개(政開)로 바꿨다. 연호의 변경 또한 같은 맥락이다. 모든 백성이 차별 없이 살아가는 미륵용화세상을 이루자는 깃발을 내걸고 나라를 세웠건만, 휘하의 여러 장수들과 벼슬아치들은 여전히 몸에 밴 인간의 욕망과 습성을 버리지 못하여 백성 위에 군림하려하고, 신라의 진골 귀족들처럼 관직과 명예와 부를 자식들에게 세습하여 물려주고자 했다. 이들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심기일전하기 위하여 잦은 연호의 변경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명성산 억새밭>
궁예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백성들의 나라를 원했다. 신라 땅에서 골품제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세력들이 출세 길을 찾아 귀순해 온다. 새 나라 고려에서는 능력에 따라 관직을 맡아 나라의 기초를 닦는 데 나름대로 기여한다. 나라의 기틀이 잡히는 사이에 어느덧 기득권 세력으로 변모한 그들은, 이번에는 자신들이 고려의 진골이 되어 자손 대대로 영화를 누리기 위해 송악의 호족인 왕건을 앞세워 모반을 일으키고 사민평등을 고집하는 궁예를 몰아낸다.
<명성산에서 본 산정호수>
그렇다면 궁예는 누구인가. 궁예는 귀족 신분사회에서 모든 백성은 똑같다는 사민평등을 주창한 위대한 선지자였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기득권 세력인 호족과 귀족들에게 밀려난 실패한 혁명가였다. 승승장구하던 궁예는 918년 호족세력을 견제하려다 왕건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철원을 탈출한다. 궁예의 전성기가 철원이었다면 몰락기는 포천이라는 특징이 있다. 궁예가 왕건에게 저항했던 곳이 대부분 포천지역이라는 것이다.
<명성산 억새밭>
왕건은 누구인가? 왕건(王建, 877∼943, 재위 918~943)은 개성의 호족 왕륭의 아들로 태어난다.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왕륭은 송악 일대와 예성강 일대에서 강화도까지 이르는 지역에 세력 기반을 구축했다. 이런 강력한 해군력과 재력을 갖춘 왕륭은 임진강 일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세력을 떨치던 궁예와 896년에 손을 잡음으로써, 후고구려는 후삼국 중 가장 강력한 기반을 갖춘다. 궁예는 개성에 도읍한 다음, 갓 스물이던 왕건에게는 송악의 발어참성(拔禦塹城) 성주가 되어 궁예의 휘하 장군이 된다.
<명성산 억새밭>
<고려사>에 명성산으로 도망친 궁예는 이틀 밤을 산속에서 숨어 지내다 배가 고파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마을로 내려와 보리이삭을 잘라 먹던 중 농부에게 발각되어 최후를 맞았다. 이때가 918년 봄이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및 고려사가 궁예를 몰아낸 세력에 의해 편찬된 것임을 감안하면 궁예가 왕건을 상대로 항전을 벌이다가 죽었다고 하는 민간의 구전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궁예는 죽었고 곳곳에 전설을 남겼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이며 패자는 유구무언이다.
<명성산 억새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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