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남고산성과 건지산
(2021년 11월 21일)
瓦也 정유순
전주(全州)! 옛날에는 전주천을 중심으로 동·서·남쪽으로 산지가 둘러싸여 분지를 이루었고, 만경강이 흐르는 북으로 평야와 만나 숨통이 트이는 형세였다. 그래서 후백제를 창건한 견훤(甄萱)은 900년에 전주를 도읍으로 정하면서 남쪽의 남고산(南固山, 248m)에 산성을 쌓아 방어하였다. 북쪽으로는 금바위[금암(金巖)]가 있던 아래 지역은 기가 세다고 하여 그 기를 누르고자 지역 이름을 <진북(鎭北)> 으로 하여 지금도 진북동과 금암동의 지명이 있으며, 북으로는 진산(鎭山)인 건지산(乾止山, 99m) 버티고 있다.
<전주시청사 - 전북도민일보 캡쳐>
남고산성을 가는 길목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정란의 공적을 기려 세운 충경사(忠景祠)란 사당이 있다. 이정란(李廷鸞)은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호남으로 밀어닥치자 64세의 나이로 의병을 모아, 소양을 거쳐 진안 쪽으로 공격해오는 왜군을 무찌르는 등 혁혁한 공훈으로 전주부성을 지켰다. 이러한 이정란의 용기와 충정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순조(純祖) 때 충경공의 시호를 나라에서 내렸다. 전주시를 동서로 가로지른 도로를 충경로로 명명한 것도 공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충경사 외삼문>
충경사를 나와 남고산성 천경대(千景臺) 입구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제236호)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소장하고 있는 삼경사라는 절이 있다. 이 목조여래좌상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조성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711년에 법종(法宗)이 조성한 신흥사 목조여래좌상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조성연대는 1710년을 전후한 시기로 판단되며, 김제 금산사에서 이안된 것으로 추정한다.
<삼경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남고산성은 남고산의 주봉인 고덕산(高德山) 서북쪽 골짜기를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901년에 후백제 견훤(甄萱)이 도성인 전주의 방어를 위하여 쌓았다고 전하여 견훤산성 또는 고덕산성으로도 불린다. 천경대로 올라가는 산성은 상당히 가파르다. 성벽은 천경대(千景臺)·만경대(萬景臺)·억경대(億景臺) 등의 절벽이 있는 자연적 요새를 둘러 약 5.3㎞정도로 축조되었으며, 성벽은 최근까지 보수한 흔적이 남아있다. 아울러 견훤은 동쪽의 승암산에 신라 때 쌓은 동고산성 아래를 보수하여 궁궐로 삼았다고 한다.
<남고산성-천경대 가는 길>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전주부윤 이정란(李廷鸞)이 왜군을 막을 때 고쳐 쌓았다고 한다. 숙종 때에는 주변에 위치한 위봉산성(威鳳山城)에 이어서 진(鎭)이 설치되었고, 성 안에는 진장(鎭將)이 머무르는 관아와 창고, 화약고 등을 두었다. 그 뒤 1811년(순조 11)에 전라도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증축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전라도관찰사 박윤수(朴崙壽)가 완공하였다.
<남고산성>
남쪽과 북쪽에는 장대(將臺)를 세웠고, 동쪽과 서쪽에는 성문을 두었다. 서쪽에는 암문(暗門)도 하나 있었고, 사방에 각각 하나의 포루(砲樓)를 두었다. 영조 때 기록에 의하면, 성벽의 둘레는 2,693보(步)이고, 성벽 위에 올린 여장(女墻)이 1,946척이며, 성 안에 민가 100여 채가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 북문(北門)터는 석축만 남았으며, 그 외에 성 안에는 연못 4곳이 있었고, 우물이 25곳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현재 성 안에는 남고사(南固寺)·관성묘(關聖廟)를 비롯하여 남고진사적비(南固鎭事蹟碑)만 남아 있다.
<천경대에서 본 완산칠봉>
<남고산성 길>
남고산성 동문지(東門址)에서 관성묘로 내려온다. 관성묘(關聖廟)는 「삼국지」로 우리에게 낯익은 관우(關羽)를 무신(武神)으로 받들어 제사 지내는 곳으로, 「주왕묘(周王廟)」 또는 「관제묘(關帝廟)」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관우를 신봉하는 신당이 널리 전파된 것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진인(陳寅)이 서울의 남묘에 관우를 조각한 신상을 안치한 데서 비롯된다.
<전주 관성묘 외삼문>
전주의 관성묘는 1895년(고종 32)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金聲根)과 남고산성을 책임지던 무관 이신문(李信文)이 제안하여 각 지역 유지의 도움을 받아 건립하였다. 마당에서 30m 높이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중앙에 본전이 있고 좌측에 서루, 우측에 통무가 있는 특이한 구조다. 본전 네 기둥에는 관우를 봉안한 목적 등이 기록되었고, 조선 말기의 화가 소정산이 그린 <삼국연의도> 10폭 그림과 관우의 소상(塑像)이 안치되었다. 관우의 신성(神性)을 믿는 사람들은 매년 초 이곳에서 한 해의 행운을 점치기도 한다.
<관성묘 현성전>
오후에는 전주의 북쪽 덕진동에 위치하며 건지산을 산책한다. 건지산(乾止山, 99m)은 전주의 진산(鎭山)으로 주변에는 전북대학교, 세계 소리문화의 전당, 전주 동물원 등이 있다.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 생몰미상)의 묘소인 조경단(肇慶壇)이 있어서 능산(陵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시대 지리지와 지도에도 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조경단이 있어서 진산을 가장 높은 산인 기린봉(麒麟峰, 307m)에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건지산둘레길 안내>
한편 건지산 산자락에는 전북대학교의 후원(後園)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어 캠퍼스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그 둘레길에는 혼불기념사업회와 전주시·전북대학교가 함께 2000년 가을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묘역과 함께 작고 아름다운 혼불문학공원을 조성하였다. 최명희의 묘 옆에는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던 시절의 모습의 부조상(채우승 작)이 있고, 묘 아래에는 반원형으로 10개의 안내석에 안도현, 김병용, 최기우 등 후배 작가들이 <혼불>과 작가의 어록 중에서 가려 뽑아 새긴 글들이 새겨져 있다.
<건지산둘레길 초입>
소설가 최명희(崔明姬)는 1947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1972년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72∼81년 전주 기전여자고등학교와 서울 보성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였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쓰러지는 빛〉이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이듬해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전에서 <혼불(제1부)>이 당선되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88∼1995년 월간 <신동아>에 <혼불> 제2∼5부를 연재했으며, 1996년 12월 제1∼5부를 전10권으로 묶어 완간하였다.
<최명희의 어록 비>
<혼불>은 일제강점기인 1930~40년대 전라북도 남원의 한 유서 깊은 가문 ‘매안이씨’문중에서 무너져가는 종가(宗家)를 지키는 종부(宗婦) 3대와, 이씨 문중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상민마을 ‘거멍굴’ 사람들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근대사의 격랑 속에서도 전통적 삶의 방식을 지켜나간 양반사회의 기품, 평민과 천민의 고난과 애환을 생생하게 묘사하였으며, 소설의 무대를 만주로 넓혀 그곳 조선 사람들의 비극적 삶과 강탈당한 민족혼의 회복을 염원하는 모습 등을 담았다.
<최명희 부조상>
또한 호남지방의 혼례와 상례의식, 정월대보름 등의 전래풍속을 세밀하게 그리고, 남원지역의 방언을 풍부하게 구사하여 민속학·국어학·역사학·판소리 분야 학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1997년 전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사회 각계의 인사들이 모여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건지산 단풍>
제11회 단재문학상(1997), 제15회 여성동아대상(1998), 호암상 예술상(1998) 등을 수상하였다. 대하소설 <혼불>을 통해 한국인의 역사와 정신을 생생하게 표현함으로써 한국문학의 수준을 한 차원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몌별(袂別)>·<만종(晩鐘)>·<정옥이>·<주소> 등 단편도 썼지만, 혼불 이후로는 다른 작품은 쓰지 않았다.
<건지산 단풍>
어려서부터 가난과 싸워가며 글을 썼던 소설가 최명희는 1998년 난소암으로 사망하였다. 52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그의 소설처럼 혼불이 되어 이산에 누워 있다.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둘래석으로 치장한 묘소가 그나마 지긋지긋 했던 가난을 지워주는 것 같다. 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숲길을 걸으니 나도 혼불의 주인공이 된다.
<최명희 묘소>
혼불은 이미 건지산의 애기단풍이 되어 붉게 훨훨 타오른다. 수북이 쌓인 낙엽은 푹신한 솜이불 같지만 낙엽 밟는 소리는 잠시 잠들었던 마음 속 끝까지 흔들어 놓는다. 봄에 화사하게 피었다 떨어지는 꽃잎은 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가을바람에 휘날려 떨어진 낙엽들은 한 해의 아름다운 모든 것들의 혼불이 되어 내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건지산 낙엽길>
단풍나무 숲길을 따라 서편의 정상에 올랐다가 오송제를 거쳐 편백나무 아래에서 두 다리를 쭉 편다. 건지산이 옛날에는 도심의 “북쪽 10리에 있다.”고 수록되었으나 지금은 전주의 중심으로 시민들이 호흡하는 산소공장이다. 그리고 건지산 안에 있는 오송제(五松堤)는 자연의 생태가 살아 숨 쉬는 도심의 생태공간으로 수생 생물들이 다양하게 공존한다. 봄이면 생명이 고동치고, 여름이면 무성한 녹음이 자락을 덮으며, 가을이면 오색단풍이 마음을 물들이고, 겨울이 되면 멋스럽게 소복단장하는 자태가 고운 곳이다.
<건지산 오송제 - 2015년 11월 15일>
오송제를 지나 편백나무 숲에서는 <길 문화 축제>가 한창이다. 시인들이 나와 아름다운 시를 낭송하는가 하면 노래하는 가수는 가을을 노래하고, 명창들은 춘향가 중에서 사랑가와 쑥대머리를 길게 뽑는다. 어느 향토 가수는 미국 가수 밥 딜런(Bob Dylan)이 불러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g in the wind)>을 불러 세상의 많은 질문들에 대답하며 오늘 하루를 정리한다.
<길문화축제 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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