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12-3, 完)
(2021년 9월 3일∼9월 14일)
瓦也 정유순
<제12일-3> 충청수영성→해미읍성→개심사
(2021년 9월 14일)
길을 오래 걸으면 집이 가까워 오는 것인가? 11박 12일 여정 중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다. 마곡사에서 보령시 오천면에 있는 <충청수영성>으로 가는 도중에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대천에서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점심을 한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날 어쩌란 말이냐”(유치환 ‘그리움’ 전문) 유치환은 짝사랑하는 임을 그리며 파도에게 하소연 했는데… 쫓기는 시간에 더 꼼꼼하지 못한 나는 어쩌란 말이냐.
<대천 해변>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는 충청수영성(水營城)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한 지역으로 <보령오천성>으로도 불린다. 성벽 아래에 있는 주차장에서 서문으로 들어간다. 서문의 이름은 망화문(望華門)이라고도 하는데, 화강암으로 만든 홍예문이었으나 누각은 간데없고 가운데 머릿돌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다. 서문 밖 갈매성지에는 충청수영의 군율(軍律) 집행터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으로 2014년 프란치스코 로마교황이 방문한 곳이다.
<충남 보령시 오천항과 충청수영성>
이 성은 조선 초기인 1510년에 수군절도사 이장생(李長生)이 돌로 쌓은 성으로 충청도 해안을 방어하는 최고 사령부 역할을 하였으며,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의 보호와 안내 그리고 외적(外敵) 방어역할을 하다가 1896년(고종 33)에 폐영(廢營)되었다.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城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나, 성곽 가운데로 도로가 나는 바람에 수영성이 둘로 나누어져 있어서 무척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는 서문을 비롯하여 1.650m가 남아있다.
<충청수영성 서문>
북벽과 남벽은 산등성이를 따라 쌓았고, 서벽을 바다와 면한 지점에 쌓았으며, 서벽 앞은 U자 모양의 포구를 이루어 전형적인 조선 시대 수군진(水軍鎭)의 모습을 하고 있다. 축성 당시에는 사방에 4대 성문이 있었고, 동헌을 포함해 영보정(永保亭) 대섭루(待燮樓) 관덕정(觀德亭) 능허각(凌虛閣) 등의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 중 최근에 복원된 영보정은 천하 명승(名勝)으로 알려져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많은 시문(詩文)을 남기기도 했다.
<충청수영성 영보정>
특히 하백원(河百源, 1781∼1844)을 비롯한 보령(寶寧)의 다섯 선비들이 함께 보령 앞바다를 유람하고, 그 기행을 그림과 시로 표현하여 묶어 만든 <해유시화첩(海遊詩畵帖)>에는 영보정을 비롯하여 송호(현 보령화력)와 충청수영성 맞은편에 있는 황학루를 풍경에 관한 여섯 사람의 시와 그림이 차례로 실려 있다. 이 중 영보정도 충청수영성에 정박 중인 거북선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19세기 중반까지 거북선을 운항했다는 소중한 증거다. 화첩은 총6권으로 전남 화순의 규남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해유시화첩>
이곳의 충청수군은 임진왜란 때 남해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과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1597년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는 수사 최호(崔湖)가 원균(元均)과 연합하여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수사 강진흔(姜晉昕)이 강화도 갑곶에서 청군을 방어하는 등 국가 위기 시에 큰 역할을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水軍)의 규모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청수영성 진휼청>
충남 서산시 해미읍에는 조선시대 읍성 가운데 전북 고창읍성,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과 함께 보존이 잘 되어 사적(제116호)으로 지정된 해미읍성(海美邑城)이 있다. ‘해미(海美)’라는 이름은 1406년(태종 7)에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 두 현을 병합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1413년(태종 14)에 병마절도사의 병영을 덕산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 1491년(성종 22)에 성벽이 완성되었으니, 병영이 1652년(효종 3)에 청주로 옮겨가기까지 서해안 방어의 군사요충지였다.
<해미읍성 지도>
1578년에는 이순신이 이곳에서 병사영의 군관으로 열 달 동안 근무했다. 해미읍지(海美邑誌)에는 그 모습을 둘레가 6,630척이며 높이가 13척, 옹성(甕城)이 둘, 우물이 여섯 개 있으며 성 둘레에 탱자나무 울이 둘려 있다고 하여 해미읍성을 <탱자나무성>이라고도 하였으나 지금은 성 밖에서는 탱자나무를 볼 수 없고 안쪽에만 길게 심어져 있다. 남북으로 긴 타원형 모양을 한 해미읍성은 둘레 길이가 1.8㎞, 넓이는 대략 2만여 평쯤 된다. 5m 높이의 성벽이 2m 남짓한 두께로 둘려 있어 쭉 따라 걸으면 한 시간쯤 걸린다.
<해미읍성 진남문>
해미읍성의 정문인 진남루(남문)는 잘 보전되어 있다. 홍예를 올려 문을 삼고 그 위에 3칸 2층 누각을 세웠다. 해미읍성이 평야 지역에 있어서 진남루에만 올라도 주위의 모습이 다 들어온다. 옹성이 딸린 진남루 앞쪽으로 돌아 나와 살펴보면 석수장이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문루의 대석에<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명나라 연호로 1491년(성종 22)년에 해당하며 해미읍성이 그 해에 완공됐음을 말해준다. 동문과 서문은 1974년에 복원한 것이고 본래 북문은 없었다.
<진남문 문루 글씨(황명홍치4년신해조)>
<해미읍성 중앙통로>
진남루 아래 문을 통해 들어가면 길 우측으로는 신기전기화차와 검차, 각종 포들이 진열되어 있다. 신기전기화차(神機箭機火車)는 1451년(문종 1)에 만들어졌으며, 신기전 100발을 장전한 후 이를 동시 또는 연발(連發)할 수 있는 일종의 다연장(多連裝) 로켓으로 여러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곳에 있는 신기전기화차는 제작당시의 설계도가 남아있는 병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해미읍성 무기전시>
<신기전기화차>
검차(劍車)는 수레의 전면에 설치된 방패에 검을 꽂아 만든 무기로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다. 검차는 평지에서 4명의 병력이 운용하였으며, 수레 맨 앞에는 날카로운 칼날을 꽂아 공격하였고, 검차의 전면에는 짐승 얼굴모양의 방패를 세 겹으로 설치하여 적의 공격을 막도록 하였으며, 외면에는 귀면(鬼面)상을 그려 넣어 적의 말을 놀라게 하였다.
<검차>
그리고 바로 옆에는 수령 약 300년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로, 충청남도 기념물(제172호)로 지정되었다. 이 나무 뒤에는 천주교 신자를 가두어두었던 감옥이 있었는데, 1790~1880년 사이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에 철사 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다고 한다. 동쪽 가지는 1940년대에, 가운데 줄기는 1969년 6월에 폭풍으로 부러졌으나 여러 차례 외과 수술을 시행하고 토양을 개량하여 보호 관리되고 있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도 방문하였다.
<해미읍성 회화나무>
진남문에서 가운데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동헌(東軒)이 나오는데, 정문인 누각은 <호서좌영(湖西左營)> 편액이 걸려있다. 해미에 있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청주로 이설한 후 해미읍성에는 충청도의 5개 병영 중 하나였던 호서좌영을 설치하고, 호서좌영장을 겸직한 해미현감이 정사를 보던 동헌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원래 읍해루(揖海樓)라 하였으나 1970년대에 복원한 후 호서좌영(湖西左營)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아래층 3칸에 문이 달려 있고 위층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이다.
<해미읍성 호서좌영>
해미읍성 안의 관아 자리에는 동헌과 내아와 객사를 복원해 놓았다. 동헌(東軒)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겸영장(縣監兼營將)의 집무실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곳이다. 해미 현감겸영장은 인근 12개 군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한 지위였다. 동헌 좌측에 있는 내아(內衙)는 관리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官舍)건물로 동헌이 고을의 공무를 수행하는 곳이라면, 내아는 살림집이다. 해미읍성 내아는 고증과 발굴조사를 통해 2000년 11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해미읍성 동헌>
<동헌 회의 모습>
<해미읍성 내아>
해미읍성의 북쪽 언덕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서산의 개심사로 이동한다. 개심사를 찾아가는 길은 초원이 넓게 펼쳐지는 서산시 운산면의 목장지대와 잔잔한 물살이 살랑거리는 저수지를 지나는 기분은 낯선 곳으로 나들이 가는 약간의 들뜨는 기분이다. 그러다 이곳을 지나면 숲이 우거진 상왕산(象王山, 310m) 깊숙이 잠겨버린다.
<상왕상개심사 일주문 - 2021년 4월>
주차장 밑 개심사 입구 표지석과 함께 서있는 세심동(洗心洞) 표지석은 마음을 닦고, 개심사에 들어서서는 마음을 열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 같다. 울창한 숲을 지나 먼저 만나는 연못 가운데로 난 나무다리를 건너 층층계단을 오르면 툭 튀어나온 이마처럼 범종각(梵鐘閣)이 제일 먼저 반긴다. 그리고 자연석을 깐 돌계단을 오르면 안양루에 근대의 명필 해강 김규진(海崗 金奎鎭)이 예서체로 담백하게 쓴 <象王山開心寺>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안양루(安養樓)는 강당으로 개심사에서 가장 좋은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개심사 입구>
<개심사 범종각>
<개심사 안양루>
안양루를 끼고 돌아 오른쪽에 있는 해탈문으로 들어서면 마당에는 오층석탑이 서있고 그 뒤로 보물(제143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이다. 개심사는 654년(의자왕 14)에 혜감(慧鑑)에 의해 창건되었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지만 이곳 대웅전은 아미타불과 그 양옆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함께 모셨다. 1475년(성종 6)에 전소(全燒)된 것을 1484년(성종 15)에 새로 지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보수와 개축을 하여 지금에 이른다.
<개심사 대웅전>
대웅보전 왼쪽에 있는 심검당(尋劍堂)은 승려들이 생활하며 수행하는 공간으로 ‘참선을 통해 문수보살이 들고 있는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 심검당은 화재로 전소된 사찰을 개심사를 중창할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731년(영조 7)에 고쳐지었고, 1974년에 전면 보수하였다. 심검당의 원래 건물은 오른쪽으로 3칸 규모였으나, 왼쪽으로 지붕이 살짝 낮은 ‘ᄀ’자형 건물을 덧붙여서 규모를 늘렸다. 상량문에는 시주자의 이름과 목수 박시동(朴時同)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한다.
<개심사 심검당>
개심사는 다른 곳 보다 벚꽃이 좀 늦게 피는데, 4월 중순 쯤 와야 독특한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청벚꽃이 피는 곳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청벚꽃은 꽃송이도 유난히 커서 탐스럽기 그지없다. 여기에 아울러 주먹만 한 분홍색 겹벚꽃까지 어우러져 주렁주렁 활짝 피어난 모습을 보면 스스로 마음을 열리게 하는 개심사다운 사찰이다. (完)
<개심사 겹벚꽃 - 2021년 4월>
<개심사 청벚꽃 - 2021년 4월>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7곳의 산사 중 이번 여정에서 빠진
<속리산 법주사>는 차후에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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