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삼릉에 있는 태실을 다녀와서
(2021년 10월 24일)
瓦也 정유순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201-99에는 서삼릉이 있다. 서삼릉(西三陵)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릉으로 중종(中宗)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의 희릉(禧陵), 인종(仁宗)과 정비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 朴氏)의 효릉(孝陵), 그리고 1864년 철종(哲宗)과 철인왕후 김씨(哲仁王后 金氏)의 예릉(睿陵)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능역이었다. 그러나 136만여 평에 달하던 광활한 능역은 나라 잃은 설움을 상징하듯 온갖 풍파를 겪으며 현재 6만여 평의 초라한 능역으로 남아있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서삼릉>
현재 서삼릉의 능역 안에는 1968년 낙농국가를 꿈꾸며 농림축산식품부의 젖소개량사업소, 한국마사회 종마목장 등의 50만여 평의 금강소나무군락을 갈아엎은 정책적 적패가 현재진행 중이다. 그리고 한양골프장, 뉴코리아골프장, 군부대, 보이스카우트 중앙수련원 등이 80만여 평을 잠식하고 있다. 더욱이 한양골프장은 원래 서울 능동에 있었는데, 1973년 어린이대공원을 개장하면서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인종의 효릉은 아직도 출입을 할 수 없는 지역으로 묶여있다.
<서삼릉입구와 종마장입구>
<젖소개량사업소 초지>
서삼릉의 능역(陵域)에는 3위의 왕릉 외에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1665년(인조 23)에 죽자 소현묘(昭顯廟)를 조성하였다가, 1870년(고종 7)에 소경원(昭慶園)으로 승격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는 왕자묘, 후궁묘,공주·옹주묘가 이곳으로 집결되었다. 1944년에는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묘인 효창원(孝昌園)이 서울 용산에서 천장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명종(明宗)의 후궁 경빈 이씨의 묘 등 7위가 옮겨왔으며, 1949년에는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장남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묘 의령원(懿寧園)이 옮겨왔다.
<소경원 전경>
1969년에는 성종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懷墓)를 서삼릉으로 옮겨왔으며, 의친왕 이강(議親王 李堈, 1877∼1955)과 모친 귀인(貴人) 덕수장씨의 묘가 있었으나 1996년 의친왕의 묘가, 2009년에는 귀인 장씨의 묘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경역으로 천장하여 현재는 3릉 3원 1묘 및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7위와 태실 54위가 남아 있다. 한 때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이 이곳에 있었으나 1562년(명종 17)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해 지금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으로 천장(遷葬)하였다.
<회묘(폐비윤씨묘)>
서삼릉의 태실은 제한적 공개지역으로 사전 예약에 의해 갈 수 있는 곳 이다. 실(胎室)은 조선 왕실에서 출산한 아이의 태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운 곳으로, 사적(제200호)으로 지정된 서삼릉(西三陵) 경내의 효릉(孝陵) 서쪽에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왕의 태 22위와 세자, 대군, 공주의 태 32위 등 총 54위의 태를 지금의 장소로 이전하여 모아놓았는데, 이는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태실>
이러한 태실을 <제2회 조선왕릉문화제>의 일환으로 2021년 10월 16, 17, 23, 24일, 토·일요일에만 서삼릉에서 태실문화제가 진행되고 있어 인터넷으로 미리 신청하여 10월 24일 관람하였다. 아울러 태실 주변에 있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를 비롯하여 한 곳으로 모아 놓은 빈(嬪)과 귀인(貴人) 묘, 숙의(淑儀) 묘, 왕자와 공주·옹주(翁主) 묘 등 그동안 닫혀 있던 공간을 둘러 볼 수 있어 좋았다.
<태, 생명을 잇다 현수막>
태(胎)는 생명의 원천이며, 세상을 연결해 주는 생명 줄이다. 엄마와 아기를 이어주었던 생명의 끈으로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끊어지게 되면서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태(胎)와 태반(胎盤)을 정성스럽게 다뤄온 민족이다. 길지를 찾아 땅에 묻거나[매태(埋胎)], 불에 태워 뿌리거나[소태(燒胎)], 말려서 보관하는 건태(乾胎), 강가나 해안지역에서 물에 띄워 보내는 수중기태(水中棄胎) 등 민간풍습으로 이어져 왔다. 그래서 일반인들도 태를 묻은 곳을 고향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태항아리재현품>
우리나라에서 태를 묻은 역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新羅) 김유신(金庾信, 595∼673)의 장태(葬胎)기록이 처음으로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진평왕 때 만노군 태수 김서현의 처 만명부인이 회임한지 20개월 만에 아들을 낳아 이름을 유신이라 하고 태를 현의 남쪽 15리에 묻었다. 신으로 화하였으므로 이를 태령산이라 하였다. 이 태령산에 김유신의 태를 묻고 고려 때까지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삼릉 비공개지역 지도>
이처럼 우리가 태를 소중히 보관하는 풍습은 고조선 이전의 선사시대로까지 올라가며 훨씬 그 이전부터 전래(傳來)되어 온 것이 확실하다. 가락국왕의 응달리 태봉, 울주의 보은리 태봉 등도 오래된 태실의 흔적들이다. 안태(安胎)의 풍습은 삼국시대에도 보인다. 877년(신라 헌강왕 3)에 태어난 고려 태조 왕건(王建)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 태를 봉안했고, 왕위 즉위한 다음에 태실을 조성했음이 분명하다.
<전시 중인 태항아리>
서기 904년 후고구려(태봉국)를 건국한 궁예(弓裔)의 태실은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태봉산에 있어 철원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다. 전북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태봉산 정상에는 마치 커다란 고분과도 같은 규모의 백제 무왕(武王)의 3왕자 태실지가 있다. 태실은 지표에 노출되어 있었으나 흙으로 메워졌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왕실의 안태문화(安胎文化)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이어진다.
<태조고황제태실>
조선 왕실에서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태장경(胎裝經)의 장태법(藏胎法)에 따라 좋은 땅을 가려 자녀들의 태를 묻었다. 태를 좋은 땅에 묻으면 태의 주인이 오래 살고 지혜롭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왕이나 원자, 원손과 같이 왕위에 계승할 경우 나라의 흥망성쇠가 그 태에 달렸다고 여겼다. 선사시대부터 태를 따로 묻는 풍습이 이어져 왔지만, 조선조로 접어들면서 태를 묻는 것은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이런 연유로 조정에서는 일반인이 태를 묻지 못하도록 장태법을 제정하기도 한다.
<태종대왕태항아리>
조선 왕실의 태실은 전국 길지에 조성하였다.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지방에 명당을 찾아 올리라는 장계가 보내지고, 천문 지리 등 사무를 보던 관상감(觀象監)에서는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을 각 지역에 보내 실사를 하여 태실이나 묘 터를 결정한다. 이렇게 명당 중에 명당을 찾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태를 좋은 땅에 묻어 좋은 기를 받으면 그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하여 왕업의 무궁무진한 계승 발전에 기여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는 돌아가신 조상의 유골과 살아있는 후손이 기가 서로 감응한다는 것이다.
<세종대왕태항아리>
경향(京鄕) 각지의 길지를 찾아 태를 묻는 또 다른 의도는 왕실과 일반 백성 간의 유대강화다. 태실을 조성함으로써 도성과 먼 지방의 백성들에게도 왕실이 가깝게 인식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왕이 묻히는 왕릉(王陵)은 도성 100리 안팎에 조성되었지만, 태실은 명당이라면 전국 방방곡곡 어디에든 조성하였다. 이는 왕실과 백성 간의 유대감을 강화시키는 통치의 일환이었다. 태실이 조성되는 지방은 군(郡)으로 승격이 되고, 세금과 노역을 감해 주는 혜택이 있어 왕족의 태실을 모시려는 경쟁심도 유발시킨다.
<정조선황제태실비>
이렇게 태실을 정하여 태를 봉안한 후 나중에 태의 주인공이 왕위에 오르면 이 태실은 태봉(胎峰)으로 봉해지며, 태실 내부와 외부의 장식도 달라져 여러 가지 석물들을 추가로 시설하고, 일이 마무리되면 토지신에게 태를 안장했음을 고하고 보호를 기원하는 고후토제(告后土祭) 등의 제례를 올린다. 금표(禁標)를 세워 태실 주위의 채석·벌목·개간·방목 등의 행위를 금지시켰다. 금표의 범위는 왕 300보(540m), 대군 200보(360m), 그 밖의 왕자와 공주 100보(180m)로 정하였다.
<서삼릉 태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태실은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강제 병탄(倂呑)된 후 망국의 왕실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11월에 일본 궁내성 소속의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1926년 순종(純宗) 서거하고 2년 후인 1928년 조선총독부는 이왕직의 이름으로 전국에 산재해 있는 조선 왕실의 태실정리계획을 수립하고, 1929년부터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왕자, 공주·옹주들의 태를 옮겨와서 공동묘지처럼 집단으로 모아 놓아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잃어 가기 시작한다.
<강원도 영월의 정조대왕 태실 원형 - 2019년 5월>
일제는 묘비석(墓碑石)을 세우고 태실 주변을 경복궁 안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건물(구 중앙청)처럼 ‘日(일)’자 모양으로 블록담장(가로 28×세로 24×높이 1.5m, 총 둘레 104m)을 둘러 일본 왕에게 참배하는 신사의 모습을 띠게 하여 일제의 통치하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당시 전국의 태실지에서 태항아리와 태지석만 옮겨와 설치하였다고 하지만, 국보급 태항아리는 뒤로 빼돌리고 수준이 낮아 왕실의 것으로 보기 힘든 것들만 모아왔다.
<‘日(일)’자형 태실군(群)>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이들 태실 군(群)을 재정비하였다. 태실은 오석(烏石) 비군(碑群) 과 화강석(花崗石) 비군으로 나누어지는데 오석 비군은 왕과 황제, 황태자의 태실 22기고, 화강석 비군은 왕실과 황실 가족들의 태실 32기다. 그런데 문제는 미려(美麗)했던 석조물(石彫物)은 모두 사라지고 공동묘지 같은 비석들만 무리지어 도열해 있으며, 비석의 앞면에는 태실의 명칭이, 뒷면에는 옮겨 오기 전의 원래 지명과 옮긴 날자가 일본 연호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연호부분만 삭제되었다.
<태실비의 앞면(좌)과 뒷면(우)>
일제는 이에 앞서 민족혼 말살정책으로 1907년 7월에는 조선 통감부(統監府)에 의해 ‘주세령(酒稅令)’이 공포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주세령 세칙(시행규칙)’의 공포가 있었으며, 9월에는 주세령을 근거로 한 강제집행이 시작되었다. 주세령의 강제집행은 곧 전통주(傳統酒)의 말살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때부터 수백 종에 달했던 전통주가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각 지방과 집안의 가양주는 밀주형태로도 그 명맥을 이어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왕자-왕녀 묘>
우리에게 술이란 각종 제사(祭祀)에서는 향(香)불과 함께 가장 으뜸으로 있어야 하는 필수품이었다. 향을 사르는 것은 하늘에 계신 혼(魂)을 불러오는 의식이고, 술을 따르는 것은 땅에 계신 백(魄)을 모셔오는 의식으로 우리 민족 전통인 효(孝)의 근본이었다. 그래서 집안마다 제사를 앞두고 정성들여 술을 담그는 모습에는 조상을 섬기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따라서 일제의 조선 민족정기(民族精氣) 말살 정책은 술로부터 시작하여 이후 한글과 우리말 사용금지, 창씨개명, 한국역사 지우기 등 학정이 계속되었다.
<숙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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