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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11-5)

와야 정유순 2021. 11. 4. 01:49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11-5)

(2021 9 39 14)

瓦也 정유순

<11-5> 정읍 무성서원서천 문헌서원

(2021 9 13)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 중 유일하게 마을 한가운데 있는 곳이 무성서원이다. 무성서원(武城書院)은 신라 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이 태산군(정읍 지역의 옛 지명) 태수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고 떠나자, 백성이 세운 생사당(生祠堂)인 태산사(泰山祠)가 그 뿌리다. 생사당은 감사나 수령의 선정을 찬양하기 위해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부터 제를 올리는 사당을 뜻한다

<무성서원 홍살문>

 

  1483(성종 14)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고, 중종(中宗) 때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부임한 영천 신잠(靈川 申潛) 1549(명종 4) 생사당에 배향하면서, 태산사와 합해져 태산서원(泰山書院)이 되었다. 1630(인조 8) 정극인·송세림(宋世琳정언충(鄭彦忠김약묵(金若默) 1675(숙종 원년) 김관(金灌)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696(숙종 22)에 무성서원으로 사액(賜額)을 받았다

<무성서원 유네스코 지정 표지석>

 

  원촌마을 앞을 흐르는 은석천 서원교를 건너면 서원의 홍살문이 나오고, 제일 먼저 마주하는 건물이 현가루다. 현가루(絃歌樓) 1891년에 건립된 정면 3, 측면 2칸의 2층 누각이다. 1층은 서원의 외삼문(外三門)을 대신하고, 2층은 문루(門樓)이자 휴식공간으로 이용한다. <현가루>라는 이름은 논어의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 것으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상황이 되어도 학문을 계속한다.’는 의미와 ()와 악()으로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다

<무성서원 현가루>

 

  현가루를 지나 마당을 건너면 1828(순조 28)에 중건된 강당(명륜당)이다. 강당은 서원의 교육공간으로 1475(성종 6)에 불우헌 정극인(不憂軒 丁克仁)이 향약을 창설하면서 세운 향학당에서 출발한다. 1615(광해군 7) 태산서원을 창건할 당시에는 현재와는 규모와 형태가 다른 건물이었으나 1825년에 큰 불이 일어나 사라져 버렸고, 1828년 다시 세워 현재에 이른다. 건물의 중앙에 걸려 있는 武城書院(무산서원) 편액 왼쪽의 작은 글씨 <丙子(병자)>년 표시는 1696년에 사액된 것을 표시하는 것 같다

<무성서원 강당(명륜당)>

 

  강당 뒤로 몇 계단 오르는 약간 높은 지대에 내삼문이 있고, 제향공간으로 사우(祠宇)인 태산사(泰山祠)가 있다. 사우 안에는 중앙에 고운 최치원을 주벽으로 정극인 등 여섯 분의 위패를 좌우에 각 세 분씩 배치하여 칠현(七賢)을 봉안하였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지낸다. 정면 3, 측면 3칸의 규모로 세워졌으며,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이나 다른 서원과는 달리 재실(齋室)이 담 밖에 세워졌다

<무성서원 내삼문>

 

<무성서원 태산사>

 

  또 다른 특징은 원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를 담장 밖에 두었다. 동재인 강수재(講修齋)는 동쪽 담장 밖에 있으며, 서쪽 담장 밖의 서재인 흥학재(興學齋)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현감 서호순(徐灝淳) 등의 불망비가 들어섰다. 무성서원 내외부로는 모두 15기의 비석이 있는데, 역대 현감들과 무성서원을 지켜낸 인물들의 공적비다. 강수재 왼쪽 앞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고직사(庫直舍)가 있는데, 이는 서원의 관리인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서원의 향사(享祀) 때 필요한 제수(祭需)품을 준비하고 살림을 맡아 보는 곳이다

<무성서원 강수재>

 

  강수재 앞에는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가 있다. 이 비는 1905년 을사늑약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되자 1906 6 13일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과 그의 제자 둔헌 임병찬(遯軒 林秉瓚)의 주도로 무성서원에서 호남 의병을 창의(倡義)한 역사적 현장을 기념하기 위해 1992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임병찬은 동학농민군의 김개남 장군과 친한 사이였으나 동학혁명을 반역으로 보고 김개남을 밀고한 사람이기도 하다

<병오창의기적비>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전국서원이 철폐될 때도 제외된 47개 서원 중 하나였고, 사적(166)으로 지정된 무성서원의 지금 모습은 나만 느끼는 것인지는 몰라도 소수서원이나 도산서원 같은 다른 서원에 비해 조금 오종종한 것 같다. 우리가 바람을 손으로 잡거나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느낌으로 좋은 바람인지 나쁜 바람인지 금방 알 수 있는 것처럼 서원을 대충 둘러본 느낌은 오랜 세월의 무게가 무성서원에게는 너무 무거운 것 같다.

<무성서원 전경>

 

 

  등 뒤로 찬바람을 느끼며 발길은 다시 충청남도 서천에 있는 문헌서원으로 옮긴다. 이런 것을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고 하는 걸까? 해는 지는데 갈 길은 너무 멀다. 이른 아침부터 전라남도 나주를 출발하여 화순 만연사와 담양 명옥헌, 장성의 필암서원, 고창의 읍성과 선운사 그리고 정읍의 무성서원을 간만 보고 호남평야의 지평선을 차창으로 바라보며 금강을 넘어 조금 늦은 오후 무렵에 서천의 문헌서원에 도착하니 들어가는 문은 닫혀 있다

<문헌서원 목은 이색 좌상>

 

  문헌서원(文獻書院)은 고려 말의 학자인 가정 이곡(李穀, 12981351)과 목은 이색(李穡, 13281396) 부자를 배향하기 위해 만든 조선시대의 서원으로 충청남도문화재자료(125)로 지정되었다. 1594(선조 27)에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0(광해군 3)에 한산 고촌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이듬해인 1611년 문헌서원으로 사액되었고, 이종덕(李種德이종학(李種學이종선(李種善이맹균(李孟畇이개(李塏이자(李耔) 등 한산이씨(韓山李氏) 팔현(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헌서원 홍살문>

 

  1871(고종 8) 서원철폐령에 따라 문을 닫았으나 그 후 처음 문헌서원이 있던 곳에 설단(設壇)하고 분향하여 오다가 1968년 현 위치에 재건하였다. 서원 왼쪽 기린산자락에는 셋째 아들(종선)이 여주에서 이곳으로 영구(靈柩)를 모셔온 이색의 묘소가 있는데, 묘 자리는 당시 무학대사가 잡아 주었다고 한다. 그 아래로는 감로수(甘露水)가 넘치는 우물이 있다. 장판각에는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의 문집 55, 목판각 975매가 보관되어 있다

<문헌서원 목은 이색 묘>

 

  시간이 늦어 문이 닫힌 관계로 서원 안으로는 들어 갈 수 없으나 안내도에 있는 배치도를 살펴보니 문헌서원도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홍살문을 지나면 서원의 입구인 외삼문인 진수문(進修門)과 강학공간인 진수당(進修堂), 제향공간으로 내삼문인 경현문(景賢門)과 효정사(孝靖祠)가 일직선상으로 배치된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다. 그리고 강당인 진수당 앞에는 원생들의 생활공간인 동재[존양재(存養齋)]와 서재[석척재(夕惕齋)]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문헌서원 진수당>

 

<문헌서원 효정사>

 

  서원 밖 왼쪽으로 돌아가면 목은 이색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33(세종 15)에 세운 대리석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그 뒤에는 영정을 모신 영당(影堂)이 자리한다. 이색 초상의 유래에 관하여는 허목(許穆) <목은화상기(牧隱畵像記)>에 자세히 전하는데 허목 당시에는 원본인 정장 관복본이 전하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되찾아 왔으나 훼손이 심하여 여러 번 이모(移模)하는 등 여러 곡절을 거쳤는데, 이곳의 영당은 1755년에 새로 옮겨 그린 것이라고 한다

<목은 이색 신도비>

 

<문헌서원 목은 이색 영당>

 

  가정(稼亭) 이곡은 한산이씨 시조인 이윤경(李允卿) 6대손으로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며, 이색의 아버지다. 고려 말기의 학자로 1333(충숙왕 복위 2)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한 후, 원제(元帝)에게 건의하여 고려에서의 처녀 징발을 중지시켰다. 충렬충선충숙왕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죽부인을 의인화한 가전체(假傳體) 작품 <죽부인전(竹夫人傳)>이 있고, 저서에 <가정집(稼亭集)>이 있다

<문헌서원>

 

  목은(牧隱) 이색은 1328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서 태어나 13세의 어린 나이로 성균관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영민하였다. 그 후 아버지가 계시는 연경으로 가서 원나라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해 주역(周易)을 배웠다. 23세에 귀국하여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어 대학자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어수선한 시기에 고려 왕조의 절개를 위해 태조 이성계의 영입을 거절하다 1396 5 7일 여주 신륵사(神勒寺) 부근 제비여울에서 선상유람 중 갑자기 별세했다

<목은 이색 영정 - 네이버캡쳐>

 

  문헌서원에는 <문헌전통한옥호텔>이 있어 체험을 통해 목은 이색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이곳에 머무는 동안 선비 체험을 하면서 일상의 잡념을 비울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숙박을 하면서 문헌서원의 전통 한식 밥상을 맛 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서원 주변으로 천년솔바람길이 조성되어 있어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자연을 사색하며 호연지기(浩然之氣)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문헌전통한옥호텔>

 

 

 

 <1>부터 <12>까지 후기가 계속 이어지며

다음은 제12-1일차 <논산 돈암서원/사계 종택>편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