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7-1)
(2021년 9월 3일∼9월 14일)
瓦也 정유순
<제7일-1> 순천 선암사(2021년 9월 9일)
어제 오후 늦게 해질 무렵에 화엄사를 출발하여 순천시 승주읍에 있는 선암사계곡으로 들어와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인 한옥에 도착했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모습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 분간할 수 있는 것은 어둠 뿐이다. 동창이 밝아 밖을 살펴보니 조계산을 병풍 삼아 선암사계곡은 포근한 고향의 품이로다. 숙소 주변의 과수밭에는 영글어 가는 배, 사과, 석류 등 과일들이 가을 냄새를 확 풍긴다.
<선암사계곡>
<석류>
선암사 매표소를 거쳐 들어가는 길은 조계산 자락의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이 어우러진 천상의 목소리다. 햇살을 받은 나무들이 눈 비빌 때 선암사 승선교(昇仙橋)는 기지개를 편다. 승선교는 마치 땅과 하늘을 잇는 무지개다리처럼 조선 때 화강암으로 만든 아름다운 홍교(虹橋)다. 계곡의 폭이 넓어 홍예(虹霓) 또한 유달리 큰 편이고, 아랫부분에서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의 모양이 완전한 반원(半圓)형을 이루고 있어 물에 비춰질 때는 완벽한 원을 이룬다.
<선암사 가는 길>
승선교 가운데 아래로는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이 돌다리도 임진왜란 이후 사찰을 중창할 때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1698년(숙종 24)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을 보려고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뜻을 이룰 수 없어 자살을 하려 하자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했다. 대사는 이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圓通殿)을 세우고 절 입구에 승선교를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승선교는 보물(제4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암사 승선교>
예전 선암사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승선교를 건넜는데, 이는 오욕과 번뇌를 씻고 선계로 들어간다는 성스러움의 상징이다. 이 다리를 지나면 나타나는 강선루(降仙樓)는 팔작지붕으로 아래는 네 기둥사이를 지나가는 통로였고, 위는(2층) 청마루로 된 중층 문루이다. 일반적으로 절의 문루(門樓)는 일주문 안에 세우는 것이 보통이나 일주문 밖에 문루를 세운 것은 강선루가 승선교와 빼어난 어울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강선루는 1929년 일제 강점기에 창건되었다.
<선암사 강선루>
강선루를 지나 일주문 부근의 길가에는 부도비의 파편 같은 조각돌이 상형문자인지 그림인지를 새긴 채 홀로 서있다. 볼수록 정감이 간다. 조금 더 올라오면 <曹溪山仙岩寺(조계산선암사)>라 편액(扁額)된 일주문을 지난다. 일주문은 절에서 속계와 법계를 구분하는 경계에 세운 첫 번째 정문으로 문(경계)을 들어서는 순간 부처를 향해 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선암사 일주문>
조계산 너머에 있는 송광사가 우리 불교계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근본 사찰이라면 선암사는 조계종 다음으로 큰 교세를 가진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일제강점기 때 한국불교 말살정책의 결과로 대처승이 급증하였다. 해방 후 1954년 이승만 정부는 대처승을 절에서 몰아내는 불교 정화정책을 내놓자 비구와 대처간의 다툼이 격해졌으며, 1962년 군사정부는 비구와 대처를 통합한다는 형식으로 조계종단을 새롭게 출범시켰다.
<선암사 범종루>
이때 대부분의 전통 사찰에 있던 대처승들이 밀려나게 되어 이들이 반발하면서 불교계는 비구승의 조계종과 대처승의 태고종(太古宗)으로 나뉘게 된다. 결국 대처승들은 1970년 고려시대 태고 보우국사(1301~1382)를 종조(宗祖)로 하여 태고종으로 등록하고, 선암사를 태고종의 총림(叢林)으로 발족시켰다. 태고종은 사찰의 개인소유 인정과 승려의 결혼문제를 자율에 맡기고 있으며 출가를 하지 않더라도 사찰을 유지 운영할 수 있는 재가교역자제도인 교임제도를 두고 있다.
<일주문 입구에 홀로 있는 조각 돌>
선암사는 다른 사찰과 달리 천왕문이 없고 범종루 밑으로 통과하면 바로 대웅전 마당이다. 선암사는 신라 말기 도선이 호남을 비보하는 3대 사찰인 3암의 하나로 창건했다는 설과, 529년(백제 성왕 7)에 아도화상이 세운 비로암(毘盧庵)을 742년(신라 경덕왕 1)에 도선이 재건하였다는 창건설화가 전해지나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 비춰볼 때 신라 말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도선이 세운 세 암자는 광양 백계산 운암사, 순천 조계산 선암사, 영암 월출산 용암사를 말한다.
<선암사 대웅전과 동서 삼층석탑>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서 선암사는 1092년(선종 9)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크게 중창된다. 의천(義天)은 문종의 넷째 왕자로, 출가한 뒤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선암사를 중창할 때 의천은 대각암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선종이 의천에게 하사한 금란가사, 대각국사 영정, 의천의 부도로 전하는 대각암 부도가 선암사에 전해오고 있다. 한 때는 화재가 자주 발생하는 것을 산강수약(山强水弱)한 지세 때문으로 화재 예방을 위해 1761년(영조 37)에 산 이름을 청량산(淸凉山)으로, 절 이름을 해천사(海泉寺)로 바꾸기도 했었다.
<선암사 대웅전 석가모니불>
선암사의 주축을 이루는 대웅전 영역 뒤쪽으로 원통전 영역, 응진각 영역, 각황전 영역이 있으며, 이들 영역을 이루는 여러 전각들은 조금씩 비껴나 있으면서도 이가 물린 듯 줄짓고 있다. 전각과 전각 사이에는 작은 화단이 마련되어 갖가지 꽃나무가 사시사철 피고 지며 경내를 치장한다. 뿐만 아니라 전각들 대부분이 전면 증축되거나 개축되지 않고 보수가 필요한 부분들만 조금씩 손을 보며 가꾸어진 덕택에 선암사에서는 남다른 격조와 고풍스러움이 풍겨난다.
<선암사 가람배치도-네이버캡쳐>
선암사 경내에서 가장 개성적인 건물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전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정방형을 이루는 몸체에 중앙 한 칸만 합각지붕을 내밀어 전체적으로 ‘丁’자형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후사가 없던 정조는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순조(純祖)다. 순조는 자신이 태어나게 된 데 보답한다는 뜻으로 선암사에 대복전(大福田)이라는 현판을 써주었으며, 이 현판은 지금도 원통전에 걸려 있고, 후에 다시 천(天)과 인(人)자를 한 자씩 더 써주었다고 하는데, 두 글자의 편액은 선암사에서 따로 보관하고 있다.
<선암사 원통전 - 네이버캡쳐>
원통전 담장 뒤편의 백매화와 각황전 담길과 후문 길의 무우전 담 밖으로 홍매화 여러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원통전 앞의 선암매는 천연기념물(제488호)로 지정되었으나, 정확히 기록된 문헌이 없어 수령은 알 수 없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 년 전에 천불전 앞의 와송(臥松)과 함께 심어졌다는 설만 있어 선암사의 역사와 함께 한 것으로 짐작한다. 선암사 매화를 보기 위해 매년 초봄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선암사 선암매(홍매)>
<선암사 무우전 담밖 매화길>
불교강원(佛敎講院)에는 ‘无量壽閣(무량수각)’이라는 추사체(秋史體) 글씨의 편액이 걸려 있어서 혹시 추사가 다녀갔나 했는데, 이는 해남 대흥사에 있는 추사의 글씨를 집자(集子)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설선당 뒤뜰에는 은목서 세 그루가 자태를 뽐낸다. 은목서는 상록활엽소교목으로 중국이 원산지이고 남부지방에서 정원수로 심는다. 생장이 빠르며 꽃은 9월에 황백색으로 엽액(葉腋)으로 뭉쳐 달리고 향기가 진하다.
<선암사 무량수각(추사체)>
<은목서>
선암사에서 독특하게 눈길을 끄는 것은 해천당 옆에 자리 잡은 뒷간이다. 입구에 ‘뒤깐’이라고 쓰인 간판이 걸려 있다. 규모가 크고 깊은데다 깔끔하고 냄새도 없으면서 고풍스러운 아름다움까지 겸비한 ‘丁’자형 뒷간이 선암사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대변한다. 바닥의 짜임새도 우수하고 내부를 남녀 구분한 것도, 많은 사람을 수용하도록 2열로 배치한 것도 특이하다. 벽의 아랫부분에는 살창을 내어 환기구 역할도 한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100년 이상 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절집 뒷간 같다.
<선암사 뒷간>
<뒷간 내부>
들어갈 때는 일주문이었지만 나올 때는 뒷간 옆으로 하여 <천년불심길>로 접어들어 조계산 큰굴목재로 향한다. 산 너머에 있는 송광사로 가기 위해서다. 조계산(曹溪山, 887m)은 백두대간 호남정맥으로 이어져 솟아 있는 산으로, 고온다습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예로부터 소강남(小江南)이라 불렸으며, 송광산(松廣山)이라고도 한다. 깊은 계곡과 울창한 숲·폭포·약수 등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1979년 12월 전라남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조계산 천년불심 길>
조계산은 동쪽에 선암사(仙巖寺), 서쪽에 송광사(松廣寺)를 거느리고 있다. 송광사는 국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절로서 삼보사찰 중의 하나인 승보사찰(僧寶寺刹)이다. 조계산이라는 이름도 조계종(曹溪宗)의 중흥도량 산으로 되면서 송광산에서 이름이 바뀐 것이다. 또한 순천시 전역은 제30차 유네스코 인간과 생물권계획 국제조정이사회에서 <유네스코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는데, 조계산도립공원구역은 순천만·동천하구습지보호지역과 함께 핵심구역이다.
<조계산의 편백나무 숲>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 숲 가마터가 나온다. 이 숲 가마는 송광사와 선암사 양 사찰에서 주관하여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소득을 만들어 주던 옛 산업현장인 동시에 역사의 흔적이다. 양 사찰에서는 산 전체를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일 년에 한 골짜기에서만 숯을 구워 나무를 보호했다. 조계산에는 이러한 숯 가마터가 백여 곳이 넘는다. 숯가마는 참나무가 많은 곳이면 전국 어느 산이던 있었으나, 특히 조계산에는 사찰림으로 보존이 잘된 참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계산 숯 가마터>
또 <호랑이 턱걸이 바위>도 있다. 옛날 이 바위 위에는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턱을 걸치고 엎드려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심성을 꿰뚫어 보는 영물이어서 악한 사람인가 선한 사람인가를 구분할 줄 알았다. 착한 사람이 올라오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었고, 악한 사람이 지나가면 안 피하고 해치려고 하여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인근 주민들은 이 호랑이를 산신령으로 불렀으며, 호랑이가 턱을 걸치고 있는 바위라 하여 부르게 된 것이다.
<호랑이 턱걸이 바위>
숯가마 터를 지나면서부터 가파른 돌계단이 시작된다. 힘들어 심장이 터질 듯이 숨이 차면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며 숨을 다시 고르고 또 오르면 큰 굴목재에 도착한다. 이곳은 조계산에 있는 3개의 굴목재 중 한 곳으로, ‘굴목재’라는 지명의 어원은 우리말 ‘골막이’에서 유래한다. 골막이는 양쪽의 골짜기를 가로막고 있는 줄기에 나있는 문과 같은 통로(길)를 의미한다. 골막이는 굴막이 굴맥이를 거쳐 굴목재로 변한 것 같다.
<조계산 큰 굴목재>
큰 굴목재에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보리밥집이 있다. 30년 전부터 자리를 지켜온 이 집의 보리밥은 굴목재를 넘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목표가 아닌 가 생각할 정도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계곡 골바람으로 땀을 식히며 보리밥으로 시장기를 때우는 기분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상추와 돌나물, 참나물, 버섯 등의 산채는 이 집에서 직접 기르거나 조계산에서 딴 것들이다. 점심 후 발걸음은 송광굴목재로 옮긴다. 송광굴목재로 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하다.
<조계산 보리밥집 - 네이버캡쳐>
송광굴목이재부터 송광사까지는 줄곧 내리막으로 계단도 있고 너덜길도 있어 조금 지루하다. 중간에 대피소도 두 개나 있다.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에게 놀란 두꺼비의 느린 발걸음도 빨라진다. 쉬엄쉬엄 한 시간쯤 내려가면 시원한 계곡물소리가 마중을 나온다. 바위와 공존하며 살아가는 생명들은 질긴 목숨을 운명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다. 계곡에 걸린 몇 개의 다리를 건너면 송광사다.
<배도사대피소>
<조계산 두꺼비>
※ <제1일>부터 <제12일>까지 후기가 계속 이어지며
다음은 <순천 송광사>편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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