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6-2)
(2021년 9월 3일∼9월 14일)
瓦也 정유순
<제6일-2> 함양 남계서원/청계서원(2021년 9월 8일)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에 위치한 남계서원(灆溪書院)은 1552년(명종 7)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고, 1566년(명종 21년)에 <남계(灆溪)>라는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서원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소실된 뒤 나촌(羅村)으로 터를 옮겼다가 1612년(광해군 4) 옛터인 현재의 위치에 다시 옮겨 중건되었다. 남계서원은 풍기 소수서원, 해주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이어 창건된 아주 오래된 서원이다. ‘남계’는 서원 곁에 흐르는 시내 이름이다.
<남계서원 홍살문>
정여창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로 본관은 경남 하동이나 그의 증조부가 처가인 함양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함양사람이 되었다. 자녀 균분상속제가 있던 당시에는 거주지를 처가나 외가로 옮겨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어릴 때 이름이 백욱(佰勖)이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중국의 사신과 만난 자리에서 그를 눈여겨본 사신이 “커서 집을 크게 번창(繁昌)하게 할 것이니 이름을 여창(汝昌)이라”고 하여 바꿨다고 한다. 과연 그의 학덕은 출중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에서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인정하고 있다.
<정여창 영정-네이버 캡쳐>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하다가 김굉필과 함께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생이 된다. 여러 차례 천거되어 벼슬을 내렸지만 매번 사양하다가 1490년(성종 21) 과거에 급제하여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으나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에 임명되어 일처리가 공정하여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나,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고,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 되었다. 호는 일두(一蠹)이고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남계서원 전경>
그의 호 ‘일두’는 정여창이 스스로를 ‘한 마리의 좀’이라는 뜻으로 낮추어서 부르기 위해 지었는데, 이는 중국 북송 때의 유학자인 정이천(程伊川, 1033∼1107)의 ‘천지간에 한 마리 좀에 불과하다.’는 말에서 인용했다고 한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고 나주(羅州)의 경현(景賢)서원, 상주(尙州)의 도남(道南)서원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사당에서 본 남계서원 전경>
또한, 한 때는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여 성리학의 대가로서 경서(經書)에 통달하고 실천을 위한 독서를 주로 하였다. 문집은 <용학주소(庸學註疏)>·<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진수잡저(進修雜著)>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부인이 기록을 태워 없애버려 그 유집(遺集) 일부가 정구(鄭逑)의 <정문헌공실기(鄭文獻公實記)> 속에서 전할 뿐이고, <일두유집(一蠹遺集)>이 있다. 1570년 유희춘이 지은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에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남계서원 묘정비(廟庭碑)각(좌)>
남계서원이 위치한 함양 땅은 예로부터 ‘좌안동 우함양’이라 하여, 한양에서 볼 때 낙동강 왼쪽인 안동과 오른쪽인 함양은 모두 훌륭한 인물을 배출해내어 학문과 문벌에서 손꼽히던 고을들이다. 안동이 퇴계 이황으로 유명하다면, 함양은 남계서원에 모신 정여창으로 유명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의 하나다.
<남계서원 정여창추모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건물 배치에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과 달리 남계서원은 서원의 제향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 영역 뒤쪽에 자리 잡았고, 강학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 영역 앞쪽에 자리 잡은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전통 배치 형식인 전학후묘(前學後廟)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초기 서원으로 2019년도에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문화유산 표지판>
남계서원 안으로 들어가려면 풍영루를 지나야 한다. 풍영루(風詠樓)는 문의 기능뿐만 아니라, 2층의 누각은 유생의 휴식이나 토론의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창건 당시는 <준도문(遵道門)>이라 한 것으로 보아 출입문의 기능만 하다가 이후에 출입문 위에 2층 누각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풍영루라는 이름은 『논어』의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의 대 아래서 바람[風]을 쏘이고, 노래[詠]하며 돌아오겠다.”는 증점(曾點)의 글에서 취한 것 같다. 증점은 공자의 제자다.
<남계서원 풍영루>
강학공간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인 명성당(明誠堂)은 1559년에 완성된 것으로 정면 4칸 규모의 건물에 중앙의 2칸은 마루이고 양쪽 각 1칸은 온돌방으로 된 협실이다. 강당 이름 ‘명성(明誠)’은 <중용(中庸)>의 “밝으면 성실하다[明則誠]”에서 취했다. 강당 건물과 협실의 이름은 성리학에서 수기(修己)를 강조하는 이념 세계를 건축에 반영하였으며, 정여창의 학덕과 정신적 풍도(風度)를 후대 사람들이 사모하고 우러러본 데서 나온 것이다.
<남계서원 명성당>
강당 앞 좌우에는 동재인 양정재(養正齋)와 서재인 보인재(輔仁齋)가 서 있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2칸 규모의 건물인데, 각1칸은 온돌방이고, 문루인 풍영루 쪽의 나머지 1칸은 각각 애련헌(愛蓮軒), 영매헌(詠梅軒)이라는 누마루다. 동재와 서재는 대지의 경사를 이용하여 누문보다 한 단 높게 조성한 것으로, 지면이 낮은 쪽에는 누마루를 조성하여 조망이 좋도록 하여 공간이 외부 자연으로 연장되게 하였고, 누마루 아래에는 두 개의 연당(蓮塘)이 동시에 조성되어 있는데, 이런 연당이 서원에 있는 예는 드물다.
<남계서원 동문(양정재와 애련헌)>
<남계서원 서재(보인재와 영매헌)>
명성당 뒤편에는 1561년에 완성된 사당은 내삼문을 통해 들어간다. 강당 뒤 가파른 계단을 올라 경사지 위의 높은 곳에 위치하여 강당과 적극적으로 격리시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당 앞 서남쪽에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데우는 곳인 전사청이 북쪽을 향해 서 있다. 사당에는 정여창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鄭蘊, 1569∼1641)과 강익(姜翼, 1523∼1567)의 위패가 각각 모셔져 있는데, 강익은 정온의 외삼촌이다.
<남계서원 내삼문>
<남계서원 사당>
청계서원은 남계서원을 둘러본 후 몇 발짝 옮기면 찾을 수 있다. 이 서원은 연산군(燕山君) 때 학자인 김일손(1464∼1498)을 배향한 서원이다. 김일손은 지금의 경북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탁영(濯纓), 시호는 문민공(文愍公)이며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다. 1486년(성종 17)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때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이 되었다가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弔義帝文)사건에 연루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35세의 젊은 나이로 처형되었다.
<청계서원 홍살문>
김일손은 사관(史官)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지금의 경북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영남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의 문하로 들어가 23세인 1486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다. 그 후 1년 뒤 진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해 정여창, 남효온, 홍유손, 김굉필, 강혼 등과 교유하면서 사림파와의 교분을 굳건히 해 나갔다.
<청계서원 표지석>
특히 김일손은 홍문관, 예문관, 승정원, 사간원 등에서 정언, 감찰, 지평 등 언관과 사관의 핵심 요직을 맡으면서 강직함과 선비다움이 남달랐다. 새로운 사상과 정치이념으로 무장한 그는 스승인 김종직을 닮아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사림파의 젊은 기수로 훈구파에 맞서 현실 개혁에 대한 주장을 피력하였고, 고관들의 부패와 불의를 규탄하면서 부조리한 모습을 가만두고 보지 않았다.
<청계서원>
원래 청계서원은 김일손이 32세 때인 1495년 청계정사를 짓고 공부하던 곳이었으나 그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폐사되었다가, 그 후 그를 추모하던 유림(儒林)들이 1906년 재건을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해 1907년(순종 1) 남계서원으로부터 대지를 기증받아 묘우(廟宇)를 비롯한 강당과 부속건물과 유적비 등을 건립했으며, 1921년 2월 16일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청계서원이라 헌액(獻額)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청계서원 애락당>
서원의 건물은 중앙에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 형태의 강당이 있으며 그 뒤쪽 높은 지대위에는 사당인 청계사(淸溪祠)가 있다. 강당 앞으로는 학생들이 거처하던 동재인 <구경재(久敬齋)>와 서재인 <역가재(亦可齋)>가 있으며 경내에는 김일손을 기리는 유허비를 세웠고,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청계서원 내삼문>
<청계서원 청계사>
청계서원은 자연과 조화로운 남계서원처럼 웅장한 자태는 아니지만 소박한 크기의 아늑하고 포근함을 안겨준다. 세월을 간직한 아름드리나무들이 안 곳곳에 있어 그 조화로운 모습은 서원도 자연의 일부로 느껴지게 한다. 강당인 애락당(愛樂堂) 앞의 소나무는 이 서원의 많은 역사를 말없이 가슴에 품고 있다. 청계서원은 도문화재자료(제56호)로 지정되었으며,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를 지낸다고 한다.
<청계서원 애락당 앞 소나무>
※ <제1일>부터 <제12일>까지 후기가 계속 이어지며
다음은 <구례 천은사/화엄사>편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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