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5-2)

와야 정유순 2021. 10. 2. 14:4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5-2)

(2021 9 39 14)

瓦也 정유순

<5-2> 대구 도동서원(2021 9 7)

 

  우리나라 유학사를 더듬다 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인물이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1454~1504)이다. 그는 고려 말의 정몽주를 비롯하여 길재·김숙자·김종직에게 차례로 전해진 유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조선조 사림파의 적자(嫡子)로 꼽힌다. 서울 중구 정동에서 태어났으나 증조부가 현풍곽씨에 장가들어 서흥김씨의 세거지가 된 현풍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18세 때의 박씨 부인과의 혼인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합천군 야로의 처가 근처에 한훤당이라는 서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하게 된다

<도동서원 안내판>

 

  김굉필은 무엇보다 김종직과의 만남은 일생을 결정지은 운명적이었다. 그가 20세 되던 1474년 봄, 김종직은 이웃 고을인 함양군수로 있었다. 이때 그는 김종직을 찾아 그의 문하에서 <소학>을 배우기 시작해서 마침내 김종직의 수제자로 성장함으로써 조선조 유학의 적통을 잇는 영광을 누리지만, 단지 그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끝내 죽임을 당하게 된다. 26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도 줄곧 학문에만 정진하던 그는 나이 마흔에야 경상감사 이극균의 추천으로 비로소 벼슬길에 나섰다

<도동서원 전사청과 관리실>

 

  그뒤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등을 지냈으나 연산군 4(1498)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빌미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 80대와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어 5년간의 짧은 관직생활은 끝장이 났고, 끝내는 연산군 10(1504) 일어난 갑자사화 때 무오당인(戊午黨人)이라는 명목으로 이배(移配)된 귀양지 순천에서 50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도동서원 사당 내삼문>

 

  김굉필은 반정으로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1507(중종 2)에 복권되어 죽은 지 3년 만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중종은 신진사림들을 중용하는데 그 중 조광조(趙光祖)는 김굉필의 직계 제자였다. 그 뒤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어 1575(선조 8)에는 영의정에 증직(贈職)되면서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렸으며, 다시 1610(광해군 2)에는 대간(臺諫)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하여 동방오현(東方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配享)되었다

<김굉필 오백주기 추모비와 유물전시관>

 

  그리고 김굉필은 조광조·김안국·성세창·이장곤 같은 준재(俊才)들을 제자로 배출하였고, 사후에는 동방오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두 번의 사화를 겪으면서 그의 유문(遺文)들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그의 학문과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만 그 당시에 아직 체계적지 못한 유학이 실천중심의 이학적(理學的)인 성리학의 단계로 확립하는 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도동서원의 중정당 앞 기둥의 상단 흰 띠는 김굉필이 동방오현 중 으뜸을 상징하는 표시라고 한다

<도동서원 중정당 앞기둥의 흰색표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동서원은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이다. 원래 1568년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세워져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 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려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604년 사당을 먼저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강당 등 서원을 완공하여 <보로동서원>이라 했다. 이때의 건립을 주도했던 인물이 한훤당의 외증손인 정구(鄭逑)와 이황(李滉)이었다. 1610(광해군 2) 도동서원(道東書院)으로 사액되었으며,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세계유산 도동서원>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병산서원·도산서원·옥산서원·소수서원과 더불어 5대 서원으로 꼽힌다. 도동서원은 서원의 건축이 가져야 할 모든 건축적 규범을 완벽히 갖추고 있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평가된다. 1678(숙종 4)에 제자인 정구를 추가 배향하였고, 1964년 전면 보수하였다. 2007 10 10일 사적 제488호로 지정되었다

<도동서원 배치도>

 

  도동서원 입구에는 노거수(老巨樹) 은행나무가 가지를 보조목에 지탱한 채 힘겹게 서있다. 보호수로(1982 10 29) 지정된 이 나무는 수령이 약400년 이상 되었는데, 1607(선조 40)에 안동부사로 재직 중인 외증손 정구가 도동서원 중건 기념으로 심은 것으로 전하고 있다. 정구는 이황의 고제(高弟)이며, 고재는 고족제자(高足弟子)의 준말로 학문이나 덕행이 뛰어난 제자를 말한다

<도동서원 은행나무>

 

  은행나무를 지나면 석축 위에 나래를 편 이층누각이 서원의 정문인 수월루다. 수월루(水月樓)는 애초 이곳에 서원이 들어설 때는 없었던 것을 1855년 창건되었다. “서원의 제도를 갖추려면 누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서원을 출입하기에 가파르고 답답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1888년 불타버려 오랫동안 터만 남았다가 1973년 복원되었다. 이 날도 보수 공사 중이라 전사청(典祀廳)의 협문을 통해 들어갔다

<도동서원 수월루 - 네이버캡쳐> 

<도동서원 환주문과 보수 중인 수월루>

 

  수월루에서 강학공간으로 들어서는 문은 환주문이다. 환주문(喚主門)주인을 부르는 문이라는 뜻 같은데, 그 주인은 내 마음의 주인일 수도 있고 문 안에 있는 주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환주문은 도동서원에서 귀엽고 매력적인 건물이 아닌 가 싶다. 지붕은 절병통(節甁桶)이 얹힌 사모지붕을 이고 있는 모습이고, 갓 쓴 유생이 이 문을 통과할 때는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설 수 있는 작은 크기다. 그리고 문턱 자리엔 꽃봉오리를 새긴 돌을 박아 놓아 고개를 숙이며 눈과 마주칠 때 미소를 머금게 한다

<도동서원 환주문>

<환주문 꽃모양 문턱>

 

  환주문 안쪽은 서원의 중심영역인 강학(講學)공간이다. 강학공간은 중앙에 강당인 중정당과 기숙사인 동재인 거인재(居仁齋)와 서재인 거의재(居義齋)로 이루어진다. 환주문에서 중정당에 이르는 마당 가운데로는 납작하게 다듬은 돌을 깔아 사람 하나 지날 만한 돌길을 내었다. 그 끝에는 낮은 축대를 횡으로 쌓아 중정당이 들어선 곳과 동서 양재가 앉은 곳을 구별하였다. 중정당의 동쪽에는 판목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있고 서쪽으로는 담장너머로 전사청(典祀廳)이 자리 잡았다

<도동서원 중정당>

 

  일곱 계단으로 쌓을 만큼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중정당(中正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가운데 세 칸은 대청이며 그 좌우로 한 칸 반짜리 온돌방을 들이고 나머지 반 칸에 마루를 깔아 대청과 연결시켰다. 지붕 끝은 겹처마로 정리하고 양 측면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 주심포식 건물로 기단이 높은 탓인지 크기보다 웅건해 보인다. 1605년 완공되었으며 서원을 감싸는 담장과 더불어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동서원 담장>

 

  중정당의 기단은 정면은 길이가 17m 정도, 높이가 140 남짓 되며 측면은 대지의 상승과 비례하여 점차 낮아진다. 다듬은 돌을 쌓아 올라가다가 앞으로 약간 내민 판석을 가지런히 깔아 갑석을 삼고, 갑석 바로 아래에는 네 마리 용이 물고기와 여의주를 문채 머리만을 내밀고 있으며, 다람쥐를 닮은 작은 짐승이 오르고 내리는 모습이 조각된 돌이 박혀 있다. 용머리는 물의 신으로 낙동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한 비보(秘寶)책이라고 한다

<도동서원 중정당 기단의 용머리>

<도동서원 기단의 다람쥐 문양>

 

  기단을 쌓아올린 솜씨는 기교라기 보다는 정성 그 자체다. 주변에서 나는 서로 다른 돌을 마치 헝겊을 한 땀 한 땀 기워 조각보를 만들 듯이 짜 맞추었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평범하게 네모진 돌보다 여섯 모 이상 각이 진 돌들이 더 많아 보일 정도다. 그래서 전체의 모습은 커다란 조각보를 길게 펼쳐놓은 듯도 하다. 가장 순수한 색의 조화는 어떤 화려한 빛깔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고, 우리나라 건축물 가운데 이만큼 아름다운 기단을 가진 것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

<도동서원 중정당 기단>

 

  중정당의 뒤로 돌아가 내삼문을 통과하면 제향(祭享)공간으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라고 한다. 19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추정하지만 기단은 서원이 지어지던 때의 것으로 추정한다. 정면에는 칸마다 밖여닫이 널문을 달았으며 내부는 통 칸으로 틔웠다고 한다. 사당이 되다보니 제향을 받드는 날이 아니면 공개되지 않아 찾는 이의 출입이 어려워 오늘도 겉모습만 보고 간다

<도동서원 사당 올라가는 계단>

 

  마침 대구시내 중·고등학생들이 와서 서원의 유생이 되어 공부에 열심이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훈장의 열정이나 한 가지라도 귓전으로 흘리지 않으려는 유생들의 눈빛은 진지하다. 수월루 앞의 <한훤당 오백주기추모비>는 서원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젊은 사람들이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으로 아름다운 역사를 계승 발전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서있는 것만 같다

<도동서원에서 학생들의 수업장면>

 

 

 <1>부터 <12>까지 후기가 계속 이어지며

다음은 <성주고분군성주 성밖 숲성주 한개마을>편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