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5-3)
(2021년 9월 3일∼9월 14일)
瓦也 정유순
<제5일-3> 성주고분군/성밖숲→성주한개마을
(2021년 9월 7일)
대구 도동서원과 하목정을 둘러보고 오후에는 성주대교를 건너 성주읍 성산리 고분군으로 이동한다. 성주 성산동 고분군은 성산(星山, 389m)의 북쪽 경사면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성주지역 최대의 고분군으로 5∼6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는 것은 321기이나, 파괴되어 멸실 되었거나 봉분(封墳)이 깎여나간 고분을 포함하면 그 수는 수 백기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성주성산동고분군전시관>
<뚜껑 있는 굽다리 접시>
일제강점기인 1917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역사 강탈의 선두에 섰던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 성주군 일대 고분군 전체를 지표 조사하여 성주에 분포된 고분을 크게 성산동 46기, 명천동 5기, 수축·용각동 151기 등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3개의 군(群)으로 나누어졌으며, 그 분포와 위치가 처음 학계에 알려졌었다. 조선총독부가 고분의 유물을 발굴 조사하는 주된 관심은 임나일본부설 입증을 통한 식민통치 정당화를 위한 것이었으나 이곳에서 실체를 밝히지 못하였다.
<성주성산동고분군 전경>
<굽다리접시>
이후 고분군은 1918년에 일본인 하마다 고사쿠[浜田耕作]와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에 의해 제56호분(구1호분)·제57호분(구2호분)·제61호분(구6호분)이 발굴되었다. 이중 원형봉투분인 제56호분(구1호분)은 봉분의 높이가 3.6m, 지름은 13.6m로 당시 고적조사보고서에서는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橫口式石室墓)]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2006년 계명대학교의 <성주성산동고분군> 보고서에는 구덩식돌방무덤[수혈식석실묘(竪穴式石室墓)로 추정하였다.
<성주성산동고분군>
<뚜껑 있는 귀달린 접시>
1920년에는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노모리 겐[野守健], 야쓰이 세이치[谷井濟一]에 의해 제48호분(구 성산동대분)이 발굴 조사되었는데, 정식 발굴조사보고서는 발간되지 않았고, 도면과 사진 등이 제시되어 있어 개략적 구조와 내용만 알 수 있다. 그 외 제53호분(구 팔도분) 등 5기가 조사되었으나 간략한 내용과 함께 석실의 도면과 사진 몇 장만 남아 있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성주성산동고분군 유물>
광복 이후에는 1986년과 1987년에 남쪽 능선에 분포하는 대형봉토분 5기를 계명대학교에서 발굴하여 고분의 구조와 유물의 성격 등을 밝힐 수 있었다. 발굴조사 결과 고분군은 크게 막돌이나 깬 돌을 이용하여 석실의 네 벽을 축조한 할석(割石)식 석실분과 넓적하고 길쭉한 돌을 세워 만든 판석(板石)식 석실분의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며, 매장 주체가 묻히는 주곽(主槨)과 부장품을 묻는 부곽(副槨)을 갖춘 다곽묘(多槨墓)로 되어 있다. 주곽은 크기에 비해 유물이 빈약하고 부곽에는 넘칠 정도로 많은 부장하고 있다.
<성주성산동고분군 발굴모습>
<뚜껑 있는 긴목 항아리>
그리고 순장(殉葬)의 결정적인 증거를 찾을 수는 없지만 성산동 고분의 딸린덧널들은 순장과 유물부장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낙동강 동안지역의 주부곽식 고분들이 ‘일(日)’자형의 배치를 주로하고 있는데 반해, 성산동 고분은 딸린덧널을 으뜸덧널 측면에 설치한 독자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다양한 토기가 가득 채워져 있는 부곽의 한 귀퉁이가 빈자리로 남아 있어 순장자(殉葬者)가 매장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주성산동고분군 내부>
<긴목 항아리와 원통모양 그릇 받침>
성주 성산동고분군에서 약3㎞ 내외에 있는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성밖숲>으로 이동한다. 이 숲은 1999년에 천연기념물(제403호)로 지정되었고, 1380년대에 성주읍의 지세를 흥성하게 한다는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조성된 숲으로 300년~500년생 왕버들 59주가 자라고 있다. 왕버들은 버드나무과에 속하며, 높이 20m, 지름 1m이상으로 자라는 낙엽교목이다. 이 숲에는 가장 높은 나무는 14m에 이르고 밑둥은 166㎝로서 최대치를 보이고 가슴직경이 가장 큰 나무는 190㎝에 이른다고 한다.
<성밖 왕버들 관리소>
<성밖 왕버들>
구전에 의하면 조선 중엽에 서문 밖 마을의 소년들이 아무 까닭 없이 죽는 등 흉사가 이어지는 이유가 마을의 족두리바위와 탕건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있기 때문이라 하여 중간 지점에 숲을 조성하면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지관(地官)의 말에 따라 토성으로 된 성주읍성의 서문 밖 이천(伊川) 변에 밤나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 마을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밤나무를 베어내고 왕버들로 다시 조성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경산지(京山誌)> 및 <성산지(星山誌)>에 기록되어 있다.
<성밖 왕버들공원>
<성밖 왕버들>
성밖숲은 거대한 왕버들로 이루어진 단순림으로 마을의 역사, 문화, 신앙 및 풍수지리에 따라 조성되어 마을 사람들의 사회적 활동과 토착적인 정신문화의 생활 터다. 이와 같은 마을 숲은 외부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게 차폐(遮蔽)를 함은 물론 마을의 풍치와 보호를 위한 선조의 자연관을 보여주고 있는 전통적 마을 비보림(裨補林)으로 소중한 학술자료다. 현재 이 숲은 성주군에서 공원으로 조성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으며, 매년 열리는 성주생명문화축제의 개최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성밖 왕버들 숲>
<성밖 왕버들>
성밖숲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이천(伊川)을 따라 약8㎞쯤 떨어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는 영남유림의 대표마을 네 곳 중 하나인 한개마을이 있다. 그 네 곳은 안동의 하회마을, 경주의 양동마을, 영주의 무섬마을을 포함한다. ‘한개’라는 이름은 순 우리말로 한자로 표시한다면 ‘크다(한)’는 뜻의 큰 대(大)자와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뜻하는 개 포(浦)자를 써서 <대포(大浦)마을>이 된다. 예전 마을 앞에 있던 나루가 한개나루로 마을이름은 여기서 유래했으며, 성산이씨(星山李氏) 집성촌이다.
<성주 한개마을 입구>
<마을 앞 논의 오리가족>
당시의 한개는 지금의 성주 내륙지방과 김천·칠곡 지방을 잇는 물목이었으며, 대구와 칠곡을 거쳐 김천·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이어서 역촌(驛村)이 들어서고 각지에서 사람이 몰려들어 늘 북적거렸다고 한다. 그 한개는 이제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이름을 물려받은 한개마을만 남아 옛 모습을 전한다. 마을 앞을 흐르는 흰내[白川]를 바라보며 영취산(靈鷲山, 322m)에 포근히 안겨 있는 한개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산이씨의 조상은 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李友)다.
<성주 한개마을 전경>
아름답고 정감이 넘치는 한개마을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진사댁이다. 너른 앞마당과 철따라 고운 꽃이 피고 지는 화단, 우물과 장독대 등 보이는 곳마다 정감이 넘친다. 진사댁에는 팔순의 노부부가 딸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는데 오늘은 인기척이 없다. 우리의 고택들은 무위자연(無爲自然) 속에 지어진 집들이라 자연과 함께 사람의 손길과 온기가 어우러져야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진사댁은 더 아름답고 더 정감이 가는 것 같다.
<성주 한개마을 진사댁 입구>
<성주 한개마을 진사댁 안채>
진사댁의 역사는 조선 정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채의 상량문으로 보아 정조 혹은 철종 때 건립한 가옥으로 추정하며, 건립 당시 안주인이 안동 예안 출신의 진성이씨여서 예안댁으로 불렸다. 진사댁으로 불린 것은 그 후이국희(李國熙, 1868∼1939)가 집을 매입해 들어와 살면서 1894년 조선 왕조의 마지막 소과에 합격해 진사가 되자 진사댁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사랑마당으로 들어서면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뒤로 안채가 새사랑채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다.
<성주 한개마을 진사댁 새사랑채>
<진사댁 건물배치도>
교리댁으로 가는 길목에는 광대바위가 우뚝하다. 전통문화유산이 잘 보존된 한 개마을의 지명 중에서 민속과 관련된 것은 <광대걸>과 <광대바위>를 들 수 있다. 한개마을에서는 삼일유가라는 광대들이 놀았던 마당을 광대걸이라 하였고, 광대놀이 중 줄 놀이를 할 때 한쪽은 나무에 다른 한쪽은 바위에 줄을 매고 줄을 타다가 줄이 끊어져 떨어져 죽은 바위를 <광대바위>라 하였다. 마을 어르신들이 어릴 적 야밤에 광대바위를 지나면 광대귀신이 나온다고 하여 무서워했다고 한다.
<성주 한개마을 광대바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제43호)로 지정된 교리댁(校理宅)은 1760년(영조 36)에 사간원 사간 등을 지낸 이석구(李碩九)가 지은 집이다. <교리댁>이 된 이유는 그의 후손인 이귀상(李龜相)이 홍문관 교리를 지냈기 때문이다, 안채와 사랑채, 사당 등 6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문이 굳게 닫혀 들어가지 못했다. 닫힌 대문에는 ‘신도(神荼)와 울루(鬱壘)’라는 문신(門神)을 붙여 놓았다. 옛날부터 민간에서는 섣달그믐이면 이 두 신상(神像)을 대문에 그려 두어 귀신을 막는다고 하였다.
<교리댁 대문 문신(門神)>
<교리댁 건물배치도>
교리댁에서 발길을 돌리자 바로 <돈재이공신도비(遯齋李公神道碑)>가 보인다. 이 비석의 주인공은 이석문(李碩文, 1713~1773)으로 호가 돈재(遯齋)이며 영조(英祖)가 장헌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일 때 왕명을 어기고 왕의 부당함을 간하였다. 이에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사도세자에 대한 사모의 정과 사직의 안녕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사후에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신도비는 이석문이 머물렀던 가옥인 북비고택(응와종택) 앞의 길 건너에 세워져 있으며 신도비각 안에 있다. 받침은 거북이 모양이다.
<돈재 이석문신도비>
응와종택(凝窩宗宅)은 사도세자를 호위하던 무관 이석문이 살던 곳으로, 이석문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여 1774년(영조 50)에 평생을 이곳에서 은거하며 살았고, 북쪽으로 사립문을 냈다하여 북비고택(北扉故宅)이라 한다. 1821년(순조 21)에 손자 이규진이 안채와 사랑채를 새로 지었으며, 사랑채는 1866년(고종 3)에 다시 지었다. 사랑채와 안채가 口자형을 보이고 있으며, 솟을대문이 남아 있어 당시 고관가옥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말 공조판서를 지낸 응와 이원조(凝窩 李源祚)도 여기서 나고 자랐다.
<응와종댁 솟을대문>
<응와댁 건물배치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제45호)로 지정된 한주종택(寒洲宗宅)은 마을의 맨 위에 위치한다. 1767년(영조 4) 이민검(李敏儉)이 창건하였고, 1866년(고종 3) 이진상(李震相)이 중건하였다. 1910년 이진상의 아들 이승희가 아버지의 호인 한주(寒洲)를 딴 한주정사(寒洲精舍)를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이름도 한주종택이라고 불렀다. 이진상은 성주군 출생의 성리학자이며,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반대하였고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한 인물이다.
<한주종택 한수헌>
<한주종댁 건물배치도>
시간에 쫓겨 한주정사의 안채와 마을의 하회댁 등 다른 것들을 더 보지 못하고 아쉽게 돌아서는 발걸음은 무겁다. 한개마을은 하회마을이나 양동마을처럼 특별히 보여줄 것이 없는 것 같았으나, 그저 그 분위기가 한가롭고 여느 마을보다 옛 맛이 더 남아 있는 것 같다. 정겨운 흙돌담을 끼고 이어지는 고샅길을 따라 거닐며 잃어버린 ‘고향’을 그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논에서 노니는 오리도 더 정겹다.
<한주정사에서 본 한개마을>
<한주정사 소나무>
※ <제1일>부터 <제12일>까지 후기가 계속 이어지며
다음은 <합천해인사>편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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