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3-1)

와야 정유순 2021. 9. 24. 03:15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3-1)

(2021 9 39 14)

瓦也 정유순

<3-1> 안동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2021 9 5)

 

  어제 저녁 늦게 하회마을에서 민박을 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조반 전에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다. 하회마을은 안동시 풍천 (豊川面) 하회리(河回里)에 있는 민속마을로 민속적 전통과 건축물을 잘 보존한 풍산류씨(豊山柳氏)의 집성촌이다. 하회마을의 지형은 태극형(太極形)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낙동강이 마을을 싸고돌면서 ‘S’자형을 이룬 형국이다. 2010 8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국가민속문화재 (122, 1984110)로 지정되었다

<하회마을 지도>

<부용대에서 본 하회마을>

 

  하회마을의 중앙에는 삼신당(三神堂)이 있다. 하당(下堂)으로도 불리며 입향조(入鄕祖)인 류종혜(柳從惠)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높이 15m 둘레 5.4m 수령 600년이 넘는 느티나무로 마을 사람들이 성스럽게 여기고 소망을 비는 곳이다. 정월 대보름 밤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洞祭)를 상당과 중당에서 지내고 그 다음 아침에 여기서 제를 올린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시작된다. 상당(上堂)은 화산 중턱의 서낭당이고, 중당(中堂)은 국사당이다. 나무를 잘못 건드리면 동티가 난다는 속설도 있다

<하회마을 삼신당 느티나무>

 

  류성룡(柳成龍) 등 많은 고관들을 배출한 양반고을로, 낙동강의 흐름에 따라 남북 방향의 큰 길이 나 있는데, 이를 경계로 하여 위쪽이 북촌, 아래쪽이 남촌이다. 북촌의 양진당(養眞堂)과 남촌의 충효당(忠孝堂)이 대표적인 건물로 역사와 규모에서 서로 쌍벽을 이루는 전형적 양반가옥이다. 이 큰 길을 중심으로 마을의 중심부에는 류씨들이, 변두리에는 각성(各姓)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의 생활방식에 따라 2개의 문화가 병존한다고 한다

<하회마을 큰길>

 

  양진당은 풍산류씨 대종택으로 풍산에 살던 류종혜가 하회마을로 들어와 처음 지은 집으로 유서가 깊다. 여러 번의 중수(重修)를 거쳐 내려왔고 대종택답게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문중의 모임을 이곳 사랑채에서 갖는다. 양진당(養眞堂)이라는 이름은 풍산류씨 족보를 최초로 완성한 류영(柳泳, 16871761)의 호에서 따온 것이며, 사랑채의 현판 입암고택(立巖古宅)은 류운룡의 아버지인 류중영(柳仲郢, 15151573)의 호 입암(立巖)에서 따왔다

<양진당 대문>

<양진당 사랑채 - 입암고택>

 

  충효당은 서애(西厓) 류성룡의 종택으로 17세기에 지어졌다. 류성룡은 벼슬을 마치고 귀향한 후에 풍산현에 있던 작은 초가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의 손자와 제자들이 생전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충효당은 류성룡이 평소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을 강조한데서 유래한다. 12칸의 긴 행랑채는 류성룡의 8세손인 류상조(柳相祚)가 병조판서를 제수 받고 지은 것이며, 충효당(忠孝堂) 현판은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의 글씨다

<충효당>

<충효당 편액 -미수 허목 글씨>

 

  넓은 마을의 곳곳을 둘러본다는 것은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대충 중요한 것만 보고 부용대가 보이는 곳으로 서둘러 강변 만송정 솔숲으로 나온다. 천연기념물 제473(20061127)로 지정된 솔숲은 서애(西厓)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용(柳雲龍, 15391601)이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해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어서 만든 솔숲을 만송정(萬松亭)이라 하며, 현재의 숲은 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다

<낙동강과 부용대>

<하회마을 만송정>

 

  참고로 하회마을에는 하회탈이 유명하다. 국보 제121호인 하회탈은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주재료는 오리나무가 많이 쓰였고, 옻칠을 하여 정교한 색을 내어 해학적 조형미가 잘 나타나 미적 가치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일반 평민들 사이에서 많이 성행했으며, 당시의 지배층인 양반 계층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전통역할극인 별신굿놀이에서 하회탈이 많이 사용되었다

<하회탈>

 

  화산 자락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 제260)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냈고, 7년의 전란을 눈물과 회한으로 징비록(懲毖錄) 쓴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과 그의 셋 째 아들 류진(柳袗, 15821635)을 배향한 서원이다. 모태는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고려 때부터 안동부 풍산현에 있었는데, 조선조인 1572년에 류성룡이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그리고 서애 문집을 비롯한 각종 문헌 3,000여 점이 보관되어 있으며 해마다 봄·가을에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병산서원 전경>

<병산서원 장판각>

 

  임진왜란 때 병화로 불에 탔으나 광해군 2(1610)에 류성룡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를 중심으로 한 사림(士林)에서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여 사묘인 존덕사(尊德祠)를 짓고 향사(享祀)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屛山書院(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은 것은 철종 14(1863)의 일이며 1868년에 대원군이 대대적으로 서원을 정리할 때에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곳 가운데 하나다. 산서원도 전학후묘(前學後廟)로 구성되어 있다

<병산서원 존덕사 내삼문>

 

  자연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뤄 한국서원 건물의 으뜸으로 알려진 병산서원 정문은 복례문(復禮門)이다. 솟을대문인 복례문의 이름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따온 것으로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갈 것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복례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으로 길게 선 만대루 아래로 강당인 입교당이 보인다. 만대루 아래는 급경사로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니 누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게 하는 것은마음과 몸을 다시 한 번 겸손하게 하라는 의미 같다

<병산서원 복례문>

 

  복례문으로 들어가면 광영(光影池)라는 아주 작은 연못이 하나 나온다. 이곳은 선비들이 마음을 닦고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서원 속의 정원이다. 광영은 주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 중에서 하늘빛과 구름이 함께 노닌다[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라는 구절에서 인용하였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뜻으로 우리 조상들의 우주관이자 세계관을 나타낸다

<병산서원 광영지>

 

  만대루 아래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이 있다. 입교(立敎)는 곧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뜻으로 입교당은 서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이다. 가운데는 마루이고 양쪽에 온돌을 들인 정면 5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동쪽 방은 원장이 기거하던 명성재(明誠齋)이고, 서쪽의 조금 더 큰 2칸짜리 방은 유사들이 기거하던 경의재(敬義齋)이며, 마루는 원생들에게 강학을 하던 공간이다. 입교당 양쪽으로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 건물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병산서원>

<병산서원 입교당>

 

  병산서원의 백미는 복례문과 입교당 사이에 있는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만대루 같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만대루(晩對樓)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한 구절인 翠屛宜晩對(취병의만대)”에서 따왔다고 하며 푸르른 절벽은 오후 늦게까지 오래도록 대할 만하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출입이 막아 놓아 만대루에 올라갈 수 없지만 앞의 병산(屛山)과 낙동강을 바라보며 음풍농월(吟風弄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병산서원 만대루(정면)>

<병산서원 만대루(측면)>

 

  서원을 돌아보고 측문으로 나오는데 달팽이 모양의 뒷간이 나온다. 이곳은 유생(儒生)들을 돕는 일꾼들이 사용했던 화장실이다. 문도 없고 지붕도 없이 돌담으로 둥글게 감아서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달팽이와 같을 정도다. 담장의 한쪽 끝이 다른 쪽 끝에 가리기 때문에 문이 없어도 바깥에서 안이 보이지 않는 독특한 구조다. 이 뒷간은 사원이 처음 세워진 17세기 초에 지어졌고, 2003년에 보수하였다. 병산서원의 부속 건물에 포함되어 1977년 사적(260)으로 지정되었다

<달팽이 모양의 뒷간>

 

  병산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은 공부하던 유생들이 호연지기(浩然之氣)하며 거닐던 곳이었으리라. 시인 안도현(安度眩)은 그의 시 낙동강에서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그것은 어느 날의 선열처럼 뜨겁게라고 읊었는데, 나는 이 대목에서 그냥 뜨겁게 우러나오는 선열이 아니라 내 몸에 흐르는 뜨거운 피라고 하고 싶다. 낙동강을 흐르는 물은 차가운 육신을 덥히는 뜨거운 피다

<낙동강 풍산 들>

 

  그 낙동강을 끼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내 마음 띄워 보낸다. 짙게 채색되는 자연 속을 해치며 나무들과 눈 맞추고, 오래보면 더 예쁜 배롱나무 꽃과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 병산서원을 오고갔던 선비의 걸음걸이는 어떤 걸음걸이였을까? 숲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강바람에 휘파람을 날리며 화산자락을 벗어나면 가을자락으로 막 접어들어 배롱나무 꽃잎 마지막 떨어질 때 벼들은 잘 영글어 고개를 숙인다.

<병산서원 앞 배롱나무>

 

 <1>부터 <12>까지 후기가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