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3-3)
(2021년 9월 3일∼9월 14일)
瓦也 정유순
<제3일-3> 감은사지와 대왕릉 → 울주 석남사
(2021년 9월 5일)
오후에는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龍堂里)에 있는 감은사지(感恩寺址)를 찾아간다. 감은사는 동해에서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길에 세워진 절이다. 문무왕(文武王)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왜구의 침략이 잦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절을 짓기 시작했는데, 끝을 보지 못하고 아들인 신문왕(神文王) 2년(682년)에 완성하였다.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내 달라.”는 문무왕의 유언을 받들어 대왕암에 장사지내고, 그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감은사라 하였다.
<감은사지>
감은사는 금당, 강당, 중문이 한 줄로 배치되어 있다. 금당 앞에는 쌍탑(雙塔)이 있고, 건물들을 회랑으로 두른 신라 중기의 전형적인 가람 배치를 보여 준다. 이곳은 문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願刹)이자, 호국사찰(護國寺刹)로 성전(成典)이 설치되었던 사찰이었지만, 창건 이후 절의 역사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특이한 것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대로 금당 아래 석축사이로 큰 공간이 비어있는데, 이는 동해의 물이 드나드는 길로 용왕이 된 문무왕이 오던 길이 아닌 가 생각해 본다.
<감은사지 가람 배치도>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나타나는 신라 쌍탑 가라배치의 첫 사례로, 두 탑은 이후 조성되는 양식적 토대를 제공하는 한국 석탑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탑의 상륜부 중앙에는 찰주(刹柱)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다른 오래된 탑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다. 찰주는 탑 꼭대기의 장식물을 지탱하는 쇠기둥인 버팀대다.
<감은사지 동탑과 서탑>
<탑신 기저부의 태극문양 - 네이버캡쳐>
두 탑의 조립방식이나 사용된 석재의 수는 같지만, 동탑이 서탑에 비해 부재들이 조금씩 크다. 두 탑 모두 3층만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여러 돌을 짜 맞춘 방식이다. 돌과 돌을 고정하기 위해 쇠로 만든 은장을 곳곳에 사용하였다. 1959년과 1996년에 서탑과 동탑을 각각 해체하여 수리할 때 두 탑 모두 3층 몸돌 윗부분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 되었다. 이 중 외함과 내함으로 이루어진 사리장치는 신라의 정교한 금속 공예술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감은사지 서탑 사리장엄구 -네이버캡쳐>
대왕암(大王岩, 사적 158호)은 문무왕의 산골처(散骨處) 또는 수중릉으로 알려져 있다. 멀리서 보면 갈매기가 넘나드는 평범한 바위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바위 한가운데에 못처럼 패어 있고 둘레에 자연암석이 기둥모양으로 세워진 모습이다. 못 안의 물은 바위를 약간 덮을 정도이며 거센 파도에 아랑곳없이 항상 맑고 잔잔히 흐르도록 되어 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트인 십자형 수로를 통하여 동쪽에서 들어온 물이 서쪽으로 난 수로의 턱을 천천히 넘어 다시 바다로 흘러 나간다.
<대왕암>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은 무열왕과 문명왕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이 문희이다. 이름은 법민(法敏)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시키고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어 실질적인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이룬 왕으로 신라의 국격(國格)을 다시 바로 세워 새로운 나라의 틀을 다졌다. 그러나 사후에 매장(埋葬)이 되어 수중릉이 되었는지, 화장(火葬)을 한 후 유골이 뿌려진 산골처(散骨處)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주민들은 문무대왕의 영험(靈驗)을 기다리며 해마다 용왕제(龍王祭)를 지낸다.
<대왕암 해변>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은 681년 7월 1일에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있다. 실은 이에 앞서 동해 대왕암 근처 바닷가를 떠나 일본으로 망명하여, 그가 일본 제42대 몬무천황[文武天皇]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대 동북 아시아사를 전공한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의 주장이나, 일본서기, 속일본기를 통틀어 몬무천황의 생년에 관한 서술은 어디에도 없다. 역사는 풀리지 않는 퍼즐 게임인가? 대왕암을 문무왕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럼 대왕암을 재 발굴해야 되는 것은 아닌 가?
<해수관음보살>
대왕암에서 밀려오는 파도에 밀려 울산의 가지산석남사(石南寺)로 발길을 돌린다. 석남사는 대한불교조계종 통도사의 말사로 비구니(여승) 수련도량이다. 824년(헌덕왕 16) 도의국사(道義國師)가 호국기도를 위해 창건한 절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인 1674년(현종 13) 언양현감(彦陽縣監) 시주로, 탁령(卓靈)·자운(慈雲) 등의 선사들이 중건하였고, 1803년(순조 3) 침허(枕虛)·수일(守一) 선사가 중수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959년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때부터 비구니들의 수련도량으로 그 면모를 갖추었다.
<석남사 일주문>
도의국사는 당나라에서 선법을 배워 가지고 와서 교종만을 숭상하던 신라 사람들에게 설파하려 하였으나 먹히지 아니하여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로 들어가서 40년간 수도하다 제자 염거(廉居)선사에게 남종선법을 전수하고 입적 하였다. 즉 교종은 신라 왕실 강화를 위한 불교로 일반 백성들이 접근이 어려웠고, 선종은 누구든 스스로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스님은 기존의 교종불교가 의례화 되고 형식화되는 가운데 중국의 선불교가 수용되는 전환기에 사상적 선구자로서 인고의 세월을 살다가 가셨다.
<나무 혹>
일주문을 지나 석남사로 올라가는 길은 숲 터널을 이룬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는 가지산(迦智山) 심산유곡에서 울려 퍼지는 천상의 소리 같다. 그러나 숲속의 나무들도 저마다 살아가는 삶의 무게가 버거운지 등에 혹을 부치고 있으며, 바위틈에서 질곡의 세월을 보낸다. 이는 도의국사의 인고의 세월이 나타난 것인가? 곧게 자란 소나무는 일제강점기 때 항공기 대체연료로 공출되어 송진을 채취 당했던 상흔(傷痕)을 한 세기가 다 되도록 아물지 않은 채 머물러 있다.
<바위 틈의 생명>
<일제의 소나무 상흔>
반야교(般若橋)를 건너 석남사 침계루 밑 계단을 오르면 바로 대웅전 앞이다. 대웅전 앞에는 석가탑을 닮은 삼층대석탑이 우뚝 서 있다. 이 탑은 도의선사가 석남사를 창건할 때 호국의 염원을 빌기 위하여 15층 대탑으로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손실된 것을 1973년에 삼층탑으로 복원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스리랑카에서 모셔다가 봉안하여 석남사 <삼층 석가 사리탑>이 되었다. 삼층의 높이가 11m에 이르는데, 15층의 높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석남사 석가 사리탑>
석가삼존불좌상이 모셔진 대웅전에서는 영조 1년(1725)임을 말해주는 ‘雍正三年己巳’(옹정삼년기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암막새가 나왔다고 한다. 이는 영조(英祖) 연간에 대웅전이 중건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석가삼존불좌상 뒤쪽에 걸린 후불탱화는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는 않지만, 영조 12년(1736) 진경시대 절정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석남사 대웅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석가모니 좌상 좌우에 가섭, 아난 제자가 서 있고 주위로 문수, 보현, 관음, 세지 등 8대 보살이 둘러 있으며, 8대 보살 아래 좌우에 사천왕이 둘씩, 그리고 나머지 8대 제자가 8대 보살 뒤쪽으로 배열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있다. 대웅전 측면 벽에 걸려 있는 철종(哲宗) 14년(1863) 작품 신중(神衆)탱화도 눈길을 끌며, 석가삼존불좌상을 모신 수미단의 꽃 장식도 화려하다.
<석남사 대웅전 삼존불과 영산회상도>
대웅전을 우측으로 끼고 계단을 오르면 일명 부도(浮屠)라고 하는 석남사 승탑(僧塔)이 나온다. 이 승탑은 팔각원당(八角圓堂) 형태로 도의국사의 사리탑으로 전하고 있지만, 양양의 진전사에도 도의국사 것으로 추정되는 사리탑이 있다. 1962년에 해체 보수할 때 기단 중대석 윗면 중앙에서 직사각형의 사리공이 확인되었으나 사리는 없었다. 하대석(下臺石)의 사자와 구름무늬와 중대석(中臺石)의 안상(眼象) 속에 꽃무늬는 신라 말기 승탑 양식으로 뛰어난 작품이다. 전체 높이 3.53m이며 보물(제369호)로 지정돼 있다.
<석남사 승탑>
다시 되돌아 승탑 언덕에서 석남사의 가람을 바라보니 좁은 공간에 전각들이 오밀조밀 들어차 있다. 대웅전을 비롯한 동쪽 전각들은 지붕이 청기와로 되어 있다. 대웅전 서쪽의 청화당(淸和堂)은 스님들의 수양공간인지 출입이 금지되어 있고, 대웅전 뒤편의 산신각에는 산신(山神)이 소나무를 배경으로 옆으로 앉아 인자한 모습으로 산하를 바라보고, 호랑이는 꼬리를 세워 기세를 보여주고 있지만 온순한 모습으로 산신의 다리에 대고 있다. 흰 머리와 긴 눈썹이 인자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나반존자(那般尊者)의 독성도(獨聖圖)는 초월자의 모습이다.
<석남사 청기와 전각>
<석남사 산신도>
<석남사 독성도>
경내를 돌아본 후 들어 왔던 침계루(枕溪樓) 밑을 통해 밖으로 나올 때 계곡의 물소리는 산사의 적막감에 취해 있던 중생들의 의식을 일깨워준다. 흐르는 물은 정이 되어 바닥의 바위들을 쪼아 자연의 진리를 새긴다. ‘만고 광명은 소멸되지 않는다(萬古光明不滅長, 만고광면불멸장)’는 침계루 앞면의 주련(柱聯) 글씨들이 왜 나를 자꾸 뒤돌아보게 할까?
사자굴 속에는 다른 짐승이 없고
獅子屈中無異獸 (사자굴중무이수)
코끼리 가는 곳에 여우는 사라졌다.
象王去處絶狐種 (상왕거처절호종)
누가 알랴 왕사성 둥근 달이
誰知王舍一輪月 (수지왕사일륜월)
만고 광명은 소멸하지 않는 것을
萬古光明不滅長 (만고광명불멸장)
<석남사 침계루>
※ <제1일>부터 <제12일>까지 후기가 계속 이어지며
다음은 <양산 통도사>편이 연재됩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4-2) (0) | 2021.09.30 |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4-1) (0) | 2021.09.28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3-2) (0) | 2021.09.25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3-1) (0) | 2021.09.24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2-3) (0) | 2021.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