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1)

와야 정유순 2021. 9. 18. 00:25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1)

(2021 9 39 14)

瓦也 정유순

  당초 계획은 8월 중에 배롱나무 붉은 꽃이 만발하는 길을 따라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산사, 산지승원 7> 2019년도에 등재된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성리학을 보급하고 구현한 <한국의 서원 9>을 주로 답사하고, 동선을 따라 배롱나무 꽃이 유명한 명옥헌, 경상북도 도화(道花)공원을 비롯하여 보성 녹차 밭, 불교에서 부처[] 가르침[] 승가[]의 삼보 사찰인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와 아름다운 절집 이천의 영원사와 원주의 영원사, 구룡사, 석남사, 감은사지, 화엄사, 선운사, 개심사 등을 둘러본다

<방문지 개요도>

 

  그리고 외침을 막기 위해 축성한 성곽이라기보다는 아름다운 건축물 같은 낙안읍성, 고창읍성(모양성), 해미읍성을 거쳐 우리나라 전통이 잘 보존된 안동 하회마을과 성주군의 한개[대포(大浦)]마을을 찾아가 보고, 유려한 곡선에 마음마저 푹 빠져드는 치악산의 영원산성을 비롯한 창녕 교동 고분군과 성주 성산동 고분군, 해질 무렵이면 섬 전체가 붉게 물든다는 홍도와 흑산도를 다녀온다

  여행 도중에 영남 알프스를 맛보기로 통도사 뒷산인 영축산 자락과 무풍한송로를 트레킹하고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조계산 굴목재를 넘어본다. 하회마을에서는 양반 댁에서 민박을 함으로써 양반이 되어 보고, 경주의 옥산서원에서는 유생이 되어 선비가 되는 체험을, 송광사에서는 템플스테이를 하며 승려들과 같이 절간의 체험을 짧게 맛본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사찰 지도>

 

11 12일의 일정은 다음과 같다.

<1> 이천 영원사  치악산 영원사와 영원산성  치악산 구룡사  강릉 허난설헌 생가와 공원  (삼척시 임원에서 숙박)

<2> 울진 경상북도 도화(道花)공원  영주 부석사  소수서원  안동 도산서원  봉정사  (안동 하회마을에서 숙박)

<3> 안동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독락당  정혜사지 13층 석탑(국보)  감은사지와 대왕릉  울주 석남사  (울주에서 숙박)

<4> 양산 통도사  (통도사 암자 순례)  창녕 교동 고분군  (창녕에서 숙박)

<5> 우포늪  대구 하목정  성주 성산동 고분군  성주 성밖숲  성주 한개마을  (성주에서 숙박)

<6> 합천 해인사  함양 남계서원과 청계서원  (성삼재)  구례 화엄사와 천은사  (순천 선암사 부근에서 숙박)

<7> 순천 선암사  (조계산 굴목재 트레킹)  송광사(템플스테이)

<8> 순천 낙안읍성  보성 녹차 밭  해남 대흥사와 일지암  (목포에서 숙박)

<9> 목포  홍도  (홍도 해상유람)  깃대봉  (홍도에서 숙박)

<10일> 홍도  흑산도  목포  (나주에서 숙박)

<11> 화순 만연사  담양 명옥헌 원림  장성 필암서원  고창읍성(모양성)  선운사  정읍 무성서원  서천 문헌서원  (논산에서 숙박)

<12> 논산 돈암서원과 사계 김장생 종가  공주 마곡사  보령 충청수영성  서산 해미읍성  서산 개심사  (귀경)

*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속리산 법주사는 내륙의 중앙에 위치하여 이번 일정에서 제외 되었으나 전에 다녀온 것으로 대체한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서원 지도>

 

<1> 이천 영원사  원주 영원사/영원산성

 룡사  허난설헌 생가

(2021 9 3)

 

  어릴 적 학교에 다닐 때 소풍을 가거나 수학여행을 떠날 때 전날 저녁은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설친 적이 많았었다. 그런데 11 12일 국내여행을 떠나기 전인 어제 저녁에 그 어릴 때 설레던 마음이 그대로 남아서인지 밤새 잠자리를 뒤척인다. 더욱이 코로나19 상황으로 모든 행동이 제약 받는 시점에서 세상에 태어나 처음 나가는 사람처럼 짐 꾸리는 손도 덩달아 떨린다

<이천 영원사 산딸나무>

 

  새벽 공기를 가르고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송말리에 있는 영원사다. 너른 주차장을 지나 대웅전 마당으로 올라가는 언덕 중간에는 범어(산스크리트어)로 음각된 <옴마니반메훔(唵麽抳鉢銘吽)> 바위가 아침 햇살에 반짝인다. 천수경(千壽慶)에 나오는 짧은 진언으로 한국 불교에서는 옴마니반메훔(oṃ maṇi padme hūṃ) 6자를 <육자대명왕진언>이라고 한다. 이 주문을 계속 외우면 지혜와 공덕을 갖추게 하고, 관세음보살의 자비에 의해 번뇌와 죄악이 소멸된다고 하여 많은 불자들이 널리 외운다고 한다

<옴마니반메훔>

 

  영원사(靈源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로 원적산(圓寂山) 동쪽 기슭에 있다. 638(신라 선덕여왕 7) 해호(海浩)가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에는 영원암(靈源庵)이라 하였으며, 1068(고려 문종 22) 혜거(慧炬)가 중창하였다. 1577(조선 선조 10)에 사명당 유정(四溟堂 惟政)이 중창하였고, 1693(숙종 19)에는 설명(卨明)이 중건하였다. 1774(영조 50) 낭규(朗圭)가 다시 중건하였으나 이후 한때 폐허가 되었다

<이천 영원사 정심당>

 

  1825(순조 25)에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시주를 받아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현재의 영원사로 바꿨다고 한다. 1854(철종 5)에 천통(天通)이 중건하였고, 1911년 보은(普恩), 1931년 언우(彦佑)가 각각 중수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1968년 비구니 선혜(善慧)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 대웅전과·약사전·종각·보적원과 요사채 등이 있다

<이천 영원사 대웅전>

 

  이천시 향토유적(12)로 지정된 이곳의 석조약사여래좌상(石造藥師如來坐像)은 해호선사가 절을 창건하고, 수마노석(水瑪瑙石)으로 약사여래좌상을 조성하여 봉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른발이 두툼한 왼쪽 무릎에 얹어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모습이나, 오른손 손바닥을 하향(下向)하게 하여 무릎 위에 얹고, 왼손은 오른쪽 발바닥 위에 약단지를 받쳐 들고 있는 표현수법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불상으로 보기는 어렵고,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 이상으로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은 작품으로 추정된다.<영원사 사적기(寺蹟記)> 

<이천 영원사 석조약사여래좌상>

 

  대웅전 마당 좌측에는 고려 전기 문종 때 해거국사가 심었다는 수령 800년 이상 된 은행나무가 오랜 역사를 지켜보고 있고, 그 단 아래에는 <갈산리석불입상>이 호리호리한 몸매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원래 이 석불은 이천시 갈산동의 폐사된 미륵사에 있었으며, 오래 전에 쓰러져 두상과 동체와 하체부분이 흩어져 있던 것을 1980년경 시멘트 보강으로 복원했으나, 2019 3월 문화재 안전과 항구 관리를 위해 시멘트제거와 보존처리를 한 후 이곳 영원사로 이전 복원하였다

<이천 영원사 은행나무>

 

<이천 영원사 갈산리석불입상>

 

  이천 영원사를 뒤로하고 다시 원주 <치악산영원사>를 향해 영동고속도로를 달린다. 이 영원사를 가기 위해서는 치악산국립공원금대분소를 경유하여야 한다. 원주 치악산 영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다. 676(문무왕 16) 의상(義湘)이 영원산성의 수호 사찰로 창건하여 영원사(永遠寺)라고 하였다가 조선시대 1664(현종 5)에 인환(仁煥)이 중건하면서 영원사(鴒原+鳥寺)로 바꾸었다. 그 뒤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39년과 1960, 1990년에 여러 번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치악산국립공원 금대분소>
 

  그런데 영원사의 한자표기가 어렵다. ()자는 자주 쓰이는 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옥편에 수록되어 있는데, (+)자는 우리나라 옥편에 없는 글자다. 마침 스님이 지나가셔서 여쭤보았더니 가슴 아픈 일화를 알려 주신다. 영원사(永遠寺)를 영원사(鴒原+鳥寺)로 바꾼 이유는 영원(鴒原+)’이란 글 뜻 속에 형제간에 두 손을 꼭 잡고 우애를 단단히 하라는 뜻이 있다며, 광해군 때 영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 15621613)의 슬픈 가족 이야기가 나온다. 할미새는 꼭 짝을 이뤄 다녀서 할미새 영()를 썼고, 고향과 부모를 그리워 한다는 뜻으로 흠모 원(+)를 썼다는 것이다.

<치악산영원사 표지석>

 

  김제남(金悌男)은 자는 공언(恭彦), 시호는 의민(懿愍),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딸이 선조의 계비가 된 후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1613(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이이첨(李爾瞻) 등의 무고로 세 아들과 함께 사사(賜死)되었다. 이때 큰 아들 김래는 천석과 군석의 두 아들이 있었는데 부인 초계정씨는 아들들이 급사했다며 관속에 숨겨 급히 친정인 원주로 보내어 영원사에서 10년간 머리를 깎고 동자승으로 살았다고 한다

<치악산영원사 대웅전>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증살(蒸殺)되었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 1618년 폐비가 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었고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었던 친정어머니도 제자리로 돌아왔으며, 친정 조카도 살아 돌아왔다. 김제남 묘역에는 세 아들 김래, 김규, 김선이 함께 잠들어 있다. 그 후 천석은 인조반정으로 대왕대비가 된 인목대비의 부름으로 돈영부(敦寧府) 참봉(參奉)을 거쳐 홍천, 금성 등의 수령까지도 역임하였다. 그러나 동생인 군석의 행방은 알 수 없으며, 천석은 사후에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묻혔다

<치악산영원사 요사채>

 

  현존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三聖閣), 요사채가 있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신 불단과 신중탱화를 모신 신중단(神衆壇), 영가(靈駕)의 천도를 위한 영단(靈壇)이 갖추어져 있으며, 삼성각 안에는 칠성·산신·독성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옛 석물(石物)이나 특별한 문화재가 없고 전통 사찰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다고 한다

<치악산영원사 범종각>

 

  절 뒤쪽 산 위에는 4에 걸쳐 영원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석성(石城)은 문무왕 때 축성하였으며, 892(진성여왕 5) 후고구려의 궁예(弓裔)가 이 성을 근거로 하여 부근의 여러 고을을 공략하였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1291(충렬왕 17)에 원나라의 합단적(哈丹賊)이 침입하였을 때는 원충갑(元沖甲)이 항전하여 적을 무찔렀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는 원주목사 김제갑(金悌甲)이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곳이기도 하다

<치악산영원산성>

 

<치악산영원산성 남문>

 

  치악산의 가파른 경사 길을 기어올라 영원산성을 겉만 보고 급히 내려와 점심을 하고 구룡사로 이동한다. 올라가고 내려오는 동안 금대계곡의 물소리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소리가 하나 되어 마음속의 찌든 때까지 벗겨 낸다. 자연은 꾸밈이 없고 거짓이 없다. 자연을 사랑하면 사랑한 만큼 그 배로 베풀어 주고 사랑하지 않거나 해를 가하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하게 한다. 자연은 크고 작음을 떠나 항상 우리의 경외(敬畏)의 대상이며 스승이다

<치악산금대리계곡>

 

  치악산 정상을 중심으로 영원사가 남쪽에 있다면, 구룡사는 북쪽에 위치한다. 대한조계종 오대산 월정사의 말사(末寺) 구룡사(龜龍寺)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대웅전 자리에는 연못이 있었고 그 곳에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고 하는데, 의상은 연못자리가 좋아 절을 지으려고 용들과 도술시합을 하여 용들을 물리치고 절을 지었고,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 하여 구룡사(九龍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치악산구룡사 원통문>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찰이 퇴락하게 되는데, 어느 날 한 노인이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약해진다 하여 혈을 끊었는데 이후 절이 더욱 쇠약해져 더 이상 운영이 어려워질 때 한 도승이 나타나 혈맥을 끊어 생긴 일이라 하여 거북바위를 살리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룡사(龜龍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 개축된 대웅전은 동향(東向)으로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예스런 모습이 다소 감했지만 배흘림기둥 팔작지붕으로 못 하나 쓰지 않고 지은 건물이기 때문에 지금은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치악산구룡사 대웅전>

 

<치악산구룡사 대웅전 삼존불>

 

  구룡사 쪽에는 금강소나무 숲길이 있다. 금강소나무는 금강산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상북도 지역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사면과 능선에 자라는 소나무로 수피(樹皮)가 붉은 색을 띠는 나무다. 금강소나무 중에서도 가장 질이 우수한 나무를 황장목(黃腸木)’이라 하여 궁궐의 신축이나 보수를 할 때 사용하는 나무로 이를 보호하기 위해 금표(禁標)를 정하여 엄격하게 관리했었다. 황장목은 나무의 중심부분이 황색을 띠며 나무질이 단단한 좋은 소나무를 가리키며, 치악산에도 두 개의 황장금표가 있었다고 한다

<가지가 하향된 소나무>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금강소나무라는 예쁜 우리 고유의 이름을 놔두고 수피가 붉은 색을 띤다는 이유로 적송(赤松)으로 통칭하는 것은 삼가해야할 일이다. 일설에는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식물 분포를 조사하면서 금강소나무를 일본식 적송(赤松)’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강한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작은 것에서부터 숨어 있는 우리 것을 찾으며 극일(克日)하는 것도 굴욕의 역사를 지우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치악산구룡사 관음전>

 

  다시 발길은 허난설헌이 태어난 강릉 초당고택으로 이동한다. 강릉의 초당동 고택의 현재 모습은 1912년 초계정씨의 후손인 정호경이 가옥을 늘리고 고쳐 지으면서 갖추었다. 안채와 사랑채, 곳간 채가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바깥과 구분하는 담이 있다. 대문간 채와 직접 연결된 넓은 마당이 있는 사랑채는 안채의 건너편에 자형으로 배치되어 안채와 연결된다. 사랑채는 전면 5칸에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강릉 초당동 고택 솟을대문>
 

  사랑채 옆에는 사랑마당과 구분하는 담을 안팎으로 쌓아서 안채에서의 시선을 차단하고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집으로 넓은 부엌과 방, 대청마루로 구성되었으며, 우물 칸과 방앗간 옆으로 협문을 두어 여자들이 출입할 수 있게 하여 남녀의 구분을 엄격히 했다. 안채 뒤쪽의 후원과 사랑채 앞쪽의 마당에 있는 정원은 한국 전통의 정원 형태가 잘 나타나 있다. 허난설헌의 동생 허균(許筠)이 태어난 곳은 강릉 사천진리 애일당(愛日堂)이며, 그의 호 교산(蛟山)은 애일당의 뒷산 이름이다

<강릉 초당동 고택 사랑채>

 

  1563(명종 18)에 태어난 허난설헌의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호는 난설헌(蘭雪軒)이며 본명은 초희(楚姬).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워 8세 때 이미 시를 지었으며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였다. 1577(선조 10) 15세 때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하였으나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연이어 딸과 아들을 모두 잃고 오빠 허봉이 귀양을 가는 등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세계를 이룩하였다

 

<허균 영정>

 

  허난설헌은 1589(22) 27세로 요절하였으며 유언에 따라 글들은 모두 소각되었다. 동생 허균은 평소에 보았던 글들을 기억해 내어 작품 일부를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되고 애송되었다.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유선시(遊仙詩)>, <빈녀음(貧女吟), <곡자(哭子)> 등 총 142수의 시가 있고, 가사(歌辭) <원부사(怨婦辭)>, <봉선화가> 등이 있다

<허난설헌 영정>

 

  초당동 고택 주변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조성된 <허난설헌 숲>이 조성되어 있다. 허난설헌이 동생 허균과 뛰어놀았던 앞마당이 너른 소나무 숲에 바로 맞닿았다. 사시사철 시원하고 향긋한 솔바람이 불어 가족단위 여행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허난설헌 솔숲은 2010년 민간환경단체인 생명의 숲과 유한킴벌리, 산림청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어울림상 아름다운 누리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허난설헌 솔숲>

 

  시문학에 소질이 뛰어났던 허균이나 누이 허난설헌은 시절을 잘못 만나 불우한 생을 살았던 것 같다. 허균은 자신의 소설 홍길동전에 나오는 이상국을 꿈꾸다가 역적으로 몰려 사지가 잘리는 거열형을 당했고, 누이 허난설헌은 8세부터 시문을 쓰기 시작했으며, 15세에 결혼하였으나 고된 시집살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능력을 채 피우기 전에 요절하였다. 허난설헌은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서 태어난 것,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등 세 가지의 한을 입버릇처럼 말했었다고 한다.

<허난설헌 좌상>

 

※ <제1일>부터 <제12일>까지 후기가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