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과 화성행궁(2)
(2020년 11월 11일)
瓦也 정유순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정문이며 북문(北門)으로 건립된 중층누문(重層樓門)이다. 하나의 홍예문(虹霓門)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바깥쪽으로 원형 옹성(甕城)을 갖추었다. 홍예 위로 4개의 누조(漏槽)를 설치하고, 성벽 위에는 안팎에 총구(銃口)를 갖춘 여장(女墻)을 쌓았다. 홍예 위에는 오성지(五星池)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5개의 구멍을 갖춘 큰 물통으로, 적이 성문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문 좌우로 성벽이 이어지고 북쪽을 상징하는 흑기(黑旗)가 꽂혀있다.
이 문은 조선 시대의 일반적인 성문 형태를 취하였고, 규모나 구조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서울 숭례문(崇禮門)과 매우 비슷하며 당당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숭례문보다 좀 더 새로운 것은 옹성, 적대와 같은 방어 시설을 갖춘 것이다. 1920년대 수원시 시가지계획사업으로 문 좌우의 성벽이 헐리고, 1950년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누각이 소실되었다가 1978년 문루는 원래대로 복원되었다.
북동적대와 북동치, 그리고 동북포루를 지나면 ‘화성의 무지개’라는 뜻의 화홍문이 있다. 화성에는 수원천이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데 성의 연결 부분에는 수문을 설치하여 북쪽에는 북수문, 남쪽에는 남수문을 두었다. 그중 화성의 북수문이 화홍문(華虹門)으로 7개의 무지개 모양의 수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7개의 수문의 크기가 서로 다르다. 가운데 수문이 좌우의 수문보다 넓고 크게 설치되어 우량(雨量)을 효과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화홍문 동쪽 언덕에 있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화려한 건축미를 자랑한다. ‘버드나무 사이로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간다’는 뜻을 가진 이 문에 오르면 수원 시내가 한눈에 내려 보인다. 바라보는 위치와 시간, 계절에 따라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모습이 아주 절경이다. 수원화성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방화수류정 또한 총구와 포구, 그리고 병사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군사시설로 동북각루(東北角樓)라고도 한다.
보물 제 1709호로 지정된 방화수류정에 올라 화홍문 밖으로 눈길을 돌리면 용머리 바위 아래에 있는 연못은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살리고 가운데에 작은 섬을 만들어 놓은 용연(龍淵)이 있어 그 아름다움을 더 한다. ‘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놓은 것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우주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나타내는 것으로“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는 뜻이다. 가뭄이 들었을 때는 기우제를 지냈다. 용연은 남쪽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방화수류정과 환상의 조화를 이룬다.
방화수류정에서 동쪽으로 70m쯤 이동하면 북암문을 만난다. 북암문(北暗門)은 안팎으로 홍예 역시 벽돌로 쌓았다. 문 위에는 둥근 여장을 설치했는데 서암문과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 홍예 사이에는 돌계단을 설치하여 들어가는 곳은 높고 나오는 곳은 낮게 만들었는데, 이는 지세를 자연 그대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북암문 동쪽으로는 각건대(角巾臺)라고도 부르는 동북포루(東北鋪樓)가 있다. 이곳은 지세가 별안간 높아져서 용두(龍頭)를 눌러 굽어보고 있는데, 이는 치성에 있는 군사들을 가려 보호하려는 것이다. 치성이 성 밖으로 툭 튀어 나왔는데, 외면에 구멍 하나를 뚫었다. 5량(梁)으로 집을 지었는데, 판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다. 치성 위에 지은 집을 포(鋪)라 한다.
동북포루를 지나면 동암문(東暗門)이 나온다. 동쪽에 자리잡고 북쪽을 향하여 있으며 벽돌로 안과 밖의 홍예를 만들어 말 한 필이 지나갈 수 있다. 문 위는 벽돌을 깔았고 누는 세우지 않았다. 다만 오성지와 한 개의 큰 둥근 여장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유사시 경계에 유리하도록 마치 나무로 문과 벽이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만든 누각(樓閣) 같은 전붕(戰棚)이다.
동암문에서 성곽을 따라 동쪽 창룡문 쪽으로 이동하면 동장대가 나온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는데, 동장대(東將臺)는 1795년(정조 19) 7월 15일 공사를 시작하여 8월 25일 완공되었다. 무예를 수련하는 공간이었기에 연무대(鍊武臺)라고 하였다. 이곳의 지형은 높지 않지만, 사방이 트인 등성이가 솟아 있어서 화성의 동쪽에서 성안을 살펴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머물던 장용외영(壯勇外營)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다.
동장대에서 다시 동쪽으로 조금만 움직이면 동북공심돈이 있다. 성탁(城托)의 위 성가퀴 안에, 요동(遼東)에 있는 계평돈(桂平墩)을 본떠서, 벽돌로 쌓아서 둥그렇게 돈(墩)을 만들었는데, 겹으로 둘렀다. 이곳도 서북공심돈과 마찬가지로 가장 높은 지역에서 먼 곳을 관찰하고 적의 동태를 살피기 쉬운 지역에 세워져 있다. 내부 구조는 이곳에 근무하는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동북공심돈에서 창룡문사거리를 지나면 동북노대가 있다. 동북노대(東北弩臺)는 서노대와 마찬가지로 치(雉) 위에 벽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었는데, 성 가운데서 활인 소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시설이다. 동북노대에는 2개의 현안을 뚫었고, 위에 둥근 여장을 만들었다.
동북노대 다음으로 만나는 것은 화성의 4대문 중 동쪽 문인 창룡문이다. 창룡문(蒼龍門)은 1795년(정조19) 5월 8일 공사를 시작하여 10월 17일 마쳤다. 창룡은 곧 청룡으로 풍수지리상 좌청룡이며 동쪽을 의미하기 때문에 청기(靑旗)가 창룡문 주변으로 꽃혀 있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반달 모양으로 쌓았다.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창룡문 남쪽으로는 동일포루가 있다. 동일포루(東一舖樓)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에 위치하며 1796년(정조20) 7월 10일 완공되었다. 평탄하고 넓은 지형에 위치하며 서북쪽의 포루와 다르게 성벽에서 많이 돌출되었으며 판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포루(舖樓)는 성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지은 목조건물이며 초소나 군사대기소와 같은 곳이다. 창룡문에서 남수문 사이에는 동일치(東一雉)·동이치·동삼치 등 세 개의 치(雉)가 있다.
동일치와 동이치 사이에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포루가 위치한다. 동포루(東砲樓)는 1796년(정조20) 7월 16일에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로 치성의 발전된 형태다. 화성의 포루는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공심돈과 같이 안을 비워 적을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 있게 하였다.
동이치 다음에는 봉돈이 있다. 1796년 6월 17일 완성된 수원 화성 봉돈(烽墩)은 봉수대(烽燧臺)가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에 별도의 시설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화성 성벽에 맞물려 벽돌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성곽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으로 마치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든 수원화성의 대표시설이다. 평상시 남쪽 첫 번째 화두(火竇 : 횃불구멍)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올려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 봉화로 신호를 보냈다.
포루는 성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지음 목조건물이며 초소나 군사대기소와 같은 곳이다. 동이포루(東二舖樓)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 (정조 20)7월 3일에 완공되었다. 평탄하고 넓은 지형에 위치하며 봉돈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서북쪽의 포루와 다르게 성벽에서 많이 돌출되었으며 판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동삼치에서 남수문으로 방향을 틀면 동남각루가 나온다. 동남각루(東南角樓)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성 안팎의 시야가 가장 넓은 곳이다. 남수문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남공심돈과 마주 보며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나, 남공심돈은 복원하지 못했다.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건물로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도 하였다.
남수문(南水門)은 수원천이 화홍문에서 남쪽으로 흘러 내려와 성곽과 다시 만나는 지점에 만든 수문이다. 수원천 하류 수량증가에 대비하여 9개의 홍예수문으로 되어 있으며 수문 위에는 성밖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포사가 세워져 있어 비상시에는 군사들이 대기하거나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남수문 복원을 위해 지난 2004년 남수문 터에 대한 발굴조사에 나섰고, 2012년 6월 복원을 완료하였다.
팔달문(八達門)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있으며,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던 곳이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하였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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