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수원화성과 화성행궁(4. 完)

와야 정유순 2021. 1. 3. 00:26

수원화성과 화성행궁(4. 完)

(2020년 11월 11일)

瓦也 정유순

   화령전(華寧殿)은 1801년(순조 원년)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건물로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영전(影殿)이다. 영전은 보통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구별되며,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추모하던 곳이다. 화성에서 <화(華)>자와『시경』의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라는 구절에서 <령(寧)>자를 따서 명명하였다.

<화령전 전도>
<화령전 은행나무>

   사적 제115호로 지정된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正殿)인 운한각을 중심으로 이안청, 재실, 전사청, 향대청, 제기고, 외삼문, 내삼문, 중협문이 있었는데, 이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는 없어졌다. 운한각 중앙에는 정조 어진을 모신 합자(閤子)를 두고, 좌우에 있는 익실(翼室)에는 정조가 편찬한 서책을 봉안하였고, 제사에 쓰는 물품을 보관했다.

<운한각>

   보통 어진을 모시는 공간은 화려하게 치장하지만 검소한 생활과 책을 좋아한 정조의 뜻을 받들어 소박하게 꾸몄다. 순조는 1804년에 처음 화령전에 와서 직접 헌례(獻禮)를 올리고 건물 이름을 운한각(雲漢閣)이라 이름을 짓고 편액을 만들어 달았다. 운한은 학문을 탐구하는 학자를 지칭하는 <운한소회(雲漢昭回)>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정조를 상징하기도 한다.

<운한각 소나무>

   정조의 어진은 1908년 서울로 옮겨졌다가 1954년 부산 피난처에서 소실되었고, 현재 운한각에 봉안된 어진은 2004년에 다시 만든 표준 영정이다. 화령전을 구성하는 주요 건물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운한각, 화재나 홍수 등 비상시에 정조의 어진을 옮겨 모시는 이안청, 그리고 국왕 및 제사를 모시기 위해 화령전에 온 관리들이 몸을 깨끗이 하고 대기하는 재실, 화령전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업무를 보는 전사청 등이 있다.

<정조어진>
<화령전 이안청(우)과 복도각(중)

   화령전은 화성행궁을 복원하기 전에는 어진을 모신 운한각과 풍화당만 남아있었다.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화성행궁이 멸실(滅失)되고 난 뒤 이 화령전에는 무형문화재 <발탈>의 기능보유자였던 고 이동안옹과 그의 딸인 정경파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만일 행궁의 복원이 되지 않았다면, 정조의 어진을 모셨던 화령전은 이들의 춤과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화령전 풍화당>
<향대청(좌)과 전사청(우)>

   화령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물을 길어 올리는 어정(御井)이 있었으나, 정조의 어진을 서울로 옮긴 후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사라진 것을 2000년부터 발굴조사를 통해 2005년에 복원했다. 우물의 깊이는 약 5.4m다. 일반적으로 왕실 사당에는 별도로 우물을 만들어서 정갈한 물을 사용했는데, 화령전 어정은 화강석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형태로 물이 흘러넘치는 통로까지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다.

<어정>

   봉수당과 복내당 뒤편 담장 외벽에는 1797년~1800년 사이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긴 과정을 담은 <현륭원원소도감의궤> 등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정리의궤(整理儀軌)>는 임시기구인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하여 준비하였기 때문에 정리의궤라고도 부른다. 8책 635장 1270쪽으로 제작되었다. 현재 발견된 가장 오래된 한글의궤로 <화성성역의궤>와 함께 화성 축성과 관련한 전반적 내용을 기록한 자료의 하나다.

<화성성역의궤 벽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는 정조 18년(1794) 1월부터 정조 20년(1796) 8월까지, 수원 화성 성곽을 축조한 내용을 정조의 어명으로 기록한 것이다. 화성 성곽은 원래 10년 예정의 계획을 세웠으나 정조가 팔달산(八達山)에 올라 지시한 축성의 방략에 따라 착공되어 32개월 만인 정조 20년(1796) 완성되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축성법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고, 축성에 사용한 각종 기계가 그려져 있다.

<화성성역의궤 벽화>

   이 중에서 거중기(擧重機)는 서양의 과학 기술에 정통한 다산 정약용이 서양의 역학기술서(力學技術書)인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고하여 제작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책에는 계획, 도제, 의식, 동원된 인력과 경비, 사용된 기계 등 축성 당시의 모든 상황을 소상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화성성역의궤』는 경제를 비롯한 당시의 사회 형편을 연구하고 성역을 보수(補修)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다.

<거중기전도-화성성역의궤>

   성곽에 벽돌을 사용한 것도 수원화성이 처음인데, 돌과 벽돌을 적절히 교차시켜 쌓았다. 팔달산에 둘러싸인 계곡과 지형의 고저·굴곡에 따라 두른 성벽은 지금 보아도 아름답다. 넓은 평지의 시가지를 포용했고, 산성의 방어기능까지 결합했다. 상공업을 장려해 정치·상업적 기능까지 갖추었으며, 실용성과 합리적인 구조·구조물을 과학적으로 치밀하게 배치하여 건축문화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게다가 우아하면서도 장엄한 면모가 일품이다.

<벽돌로 쌓은 북암문>

   사대문 밖에는 이중으로 적을 차단할 수 있는 아담한 옹성을 설치했는데, 이는 서울 흥인지문(동대문)에만 있는 구조물이다. 사대문 주변에는 5개 못을 두어 적이 불을 지를 때를 대비해 물을 담아 두었다. 사대문 사이에 암문(暗門) 4개, 수문(水門) 2개, 적대(敵臺) 4개, 공심돈(空心墩) 3개, 봉돈(烽墩) 1개, 포루(砲樓) 5개, 장대(將臺) 2개, 각루(角樓) 4개, 포루(飽樓) 5개 등 다양한 구조물을 치밀하고 규모 있게 배치하였고, 성내에는 행궁(行宮)을 마련해 임금이 머물러도 모자람 없이 갖추었다.

<팔달문 옹성>
<화성 남지(南池)도>

   그리하여 인가라곤 겨우 5∼6호에 지나지 않았던, 200년 전의 광막한 벌판이었던 수원은 어느 날 갑자기 화려한 도시로 탈바꿈했고,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팔달문 앞으로는 시장 등 상권이 형성되어 전국의 물산이 소통되는 공간으로 형성되었다. 특히 해남의 고산 윤선도의 후손들을 불러들여 시장 활성화에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 팔달문시장과 영동시장은 ‘왕이 만든 시장’이라고 알려져 있다.

<팔달문시장>
<수원영동시장>

   정조는 성곽이 완성되자 화성 축성공사의 전말을 소상히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케 했다. 그렇게 작성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따르면 축성 역사에 동원된 공장(工匠)은 1,280명, 연 동원 일수는 37만 6,342일, 축성에 사용된 벽돌은 모두 69만 5,000장이었다. 당시 동원된 공장(工匠)들에게 생활 보장이 넉넉히 될 만큼의 임금이 지불(支拂)하였다.

<화성성역의궤-네이버캡쳐>

   정조는 화성 축성 당시 기술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회식 자리를 만들고 참석자에게 <불취무귀(不醉無歸)>라고 하였다고 한다. 즉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이나, 실제 술에 취하라는 뜻이 아니고 백성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술에 흠뻑 취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정조대왕 불취무귀(不醉無歸)-유상박물관 앞)

   당시만 해도 백성들은 강제로 끌려 나와 갖은 핍박 속에 중노동을 강요당하며, 겨울에는 얼어 죽고 여름에는 지쳐서 죽는 불쌍한 백성들의 강제 노역과 옛 조선 시대 백성들의 의무인 군역과 부역에 많은 백성이 지쳐 있었다. 하지만, 수원화성을 건설한 정조는 달랐다. 축성으로 이주해야 하는 백성들에게 모든 이주비용과 새 집터를 마련해주었다.

<수원지동시장>

   또한, 부역에 동원된 모든 백성에게도 정확한 임금을 지급했다. 건설 현장에는 다산 정약용의 <거중기>라는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데 사용하던 장비를 도입하고, 안전사고 예방에 여념이 없었다. 복리후생도 뛰어나 치료시설도 완비하고, 혹시 공사 중 상처를 입어 일을 못 하는 백성에게는 지금의 산재보험과 비슷한 제도로 치료 중에는 임금의 절반을 지급해 주었다.

<정조대왕 능행반차도>

   그리고 놀라운 것은 겨울에 인부들을 위해 모두에게 털모자를 하사했다는 것이다. 당시 털모자는 정3품 이상의 관료들만 착용할 수 있는 신분 계급의 상징이었다. 신분제도를 넘어서는 이 정성에 완성까지 예상보다 훨씬 빠른 2년 9개월 만에 완성했다. 그리고 이 수원화성은 부실공사는커녕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팔폭병풍도 중 환어행렬도>

   화성이 쉽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 아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장안문 등이 크게 파괴되었는데, 이를 현대에 복원했기 때문에 유적지로서 가치가 떨어진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1997년 당시 고 심재덕 수원시장이 유네스코 이사회에 공개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분위기를 역전시켰다. <화성성역의궤>는 화성 축성 당시의 기록을 세밀히 담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화성>

   이 자료 덕분에 화성은 언제고 옛 모습 그대로 복원 가능했다. 의궤는 조선 왕실이 후세가 참고하도록 국가의 주요 행사 전반을 기록한 문서다. 1975년 화성 복원 결정과 함께 행궁 복원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96년 화성축성 200주년을 맞아 수원시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복원공사를 시작하였다.

<장안문 내도-화성성역의궤>

   이처럼 많이 파손된 성곽을 복원할 수 있었던 것도 『화성성역의궤』를 참고하여 쉽게 했다고 한다. 수원화성 축성은 정조의 효성에서 비롯된 결단이긴 했지만, 정조는 개혁정치의 이상을 새로운 도시 수원에서 펼치고 실현하며 마무리 짓고자 했었는지 모른다. 오랫동안 정치 권력을 장악했던 노론 세력을 탕평책과 규장각 설치만으로는 약화시킬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서장대와 서노대-화성성역의궤>

   그러나 정조는 수원화성이 완성된 이듬해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 땅에 다시는 정조와 같은 현명한 임금이 출현하지 않았고, 조선은 다시 혼미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수원화성 역시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오랫동안 방치되었으나 그 아름다운 자태만은 변함이 없었다. 누구나 한나절 정도만 시간을 낸다면 유서 깊은 수원화성을 둘러보며 정조의 이상과 꿈의 일면을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

<정리의궤>

    그리고 역사를 찾기 위한 노력은 눈물겹다. 1896년 2월 10일 화성행궁의 객사였던 우화관(于華館) 자리에 공립 소학교로 개교한 신풍초등학교가 2016년 2월 수원시 광교지구로 완전 이전하면서 텅 빈 교정은 옛 모습을 찾기 위해 준비 중이다. 그런데 굳게 닫힌 교문은 일본 신사(神社)의 정문인 도리이[鳥居]처럼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언제쯤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식민잔재는 지워질까?

<옛 신풍초교 교문>
<옛 신풍초교(우화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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