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과 화성행궁(3)
(2020년 11월 11일)
瓦也 정유순
팔달문에서 정조로(正祖路)를 따라 장안문 쪽으로 걸어가면 화성행궁이 있다. 화성행궁은 임금님의 행차 시 거처하던 임시 궁궐로 모두 576칸이나 되는 국내 최대의 규모로서,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깃들어 있다.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륭원으로 옮긴 이후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쳐 수원 행차를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팔달산(八達山) 동쪽 기슭에 건립된 화성행궁은 수원 화성의 부속 건물는 화성 유수(留守)가 집무(執務)하는 관청으로도 활용되었다. 당시에는 봉수당(奉壽堂)과 경룡관(景龍館)·복내당(福內堂)·유여택(維與宅)·노래당(老來堂)·신풍루(新豊樓)·남북군영·강무당(講武堂)·무고(武庫)·수성고(修城庫)·집사청(執事廳)·서사청(書史廳)·비장청(婢將廳)·우화관(于華館)·득중정(得中亭)·행각(行閣)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화성행궁은 낙남헌(洛南軒)만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훼철된다.
행궁광장을 지나 처음 만나는 곳이 신풍루(新豊樓)다.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 (鎭南樓)라고 하였으나,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편액을 다시 썼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신풍루 다음에는 중삼문(中三門)인 좌익문(左翊門)을 지나면 중양문(中陽門)을 만난다.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하였다. 좌익문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外整理所)와 연결되어 있다.
봉수당(奉壽堂)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경의왕후)의 회갑을 기념하는 진찬연(進饌宴)을 이 건물에서 거행하였다. 이때 정조는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현판을 다시 쓰게 하였다. 봉수당은 1789년(정조 13) 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기념 진찬례 때는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급 신하들이 반열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봉수당으로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들어서면서부터 행궁은 낙남헌을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훼손된 것을 1997년부터 복원하였다.
봉수당을 둘러보고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는 유여택으로 간다. 유여택(維與宅)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 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다.
경룡관(景龍館)은 장락당의 바깥문으로도 사용한 부속 건물이다.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당 태종이 거처한 궁궐 이름에서 따왔다. 정조는 당 태종의 궁궐 이름을 차용한 이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선의 태평성세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1794년(정조 18)에 세워진 경룡관을 2층 구조로 건물의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아 누마루를 만들고, 아래층은 3칸의 널문을 만들어 ‘지락문(至樂門)’으로 명명하였다.
장락당(長樂堂)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년(정조 18) 화성 성역 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왔다. 어머니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 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한다. 상량문은 1796년(정조 20) 11월 민종현이 지었으며,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뜻이다. 원래 복내당은 1790년(정조 14)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하였고, 1794년(정조 18)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낙남헌(洛南轩)은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건축물 중 하나다. 낙남헌이란 이름은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으로 1794년(정조 18)에 완공되었다. 1795년(정조 19) 을묘원행 시에는 각종 행사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곳에서 열었다.
노래당(老來堂)은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 생활을 꿈꾸며 지었다는 건물로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여러 행사 도중 휴식을 취하는 데 사용하였다. 화성행궁의 정당인 봉수당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나오는데, 곱은 ㄱ자형으로 배치한 초익공(初翼公) 양식의 팔작지붕 집이다. 1794년(정조 18) 행궁을 증축할 때 5량 7칸의 규모로 새로 지었으며, 편액(扁額)은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나 전하지 않는다. 북쪽으로 낙남헌과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득중정과 통한다.
득중정(得中亭)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썼다. 정조는 행차 시마다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정조 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고 한 것이다. 득중정은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없다 (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는 구절에서 <득(得)>자와 <중(中)>자를 따왔다.
화성행궁의 집사청(執事廳)은 집사(執事)가 주인을 모시고 그 살림을 맡아 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궁궐의 액정서(掖庭署, 국왕이 쓰는 지필묵을 보관하며 대궐 안의 열쇠와 여러 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곳이다. 죄익문 밖 동북 담 안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세웠으며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남·북군영(南北軍營)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우열은 파하고 1, 2, 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서리청(書吏廳)은 서리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하며 남향이다. 예전의 금도청(禁盜廳) 건물을 이청(吏廳)으로 쓰게 하고, 그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으며 1795년 을묘원행 시에는 수라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비장청(婢將廳)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도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원래는 1789년(정조 13)에 세웠는데 1796년(정조 20)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였다.
미로한정(未老閒亭)은 행궁 후원에 만든 정자다. 후원 서쪽 담 안에 있었는데 미로한정이라는 말은 ‘장래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이다. 노래당과 함께 갑자년(1804)에 세자에게 양위(讓位)하고 화성으로 가리라던 정조의 뜻이 담긴 이름이었으나 정조는 절후(癤候)라는 피부병으로 고생하시다가 1800년 49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1790년(정조 14)에 세워 졌는데 1칸 6각정으로 <육면정(六面亭)>이라고도 한다.
내포사(內鋪舍)는 행궁의 뒷담 안 왼쪽 기슭의 미로한정의 북쪽 약 60m쯤 거리에 위치한다. 1796년(정조20) 9월 9일에 준공된 이 건물의 높이는 7척 5촌(2.32m)이다. 다만 온돌 1칸만을 놓았으며, 앞으로 반 칸을 물려서 벽돌을 깔았다.
정리소(整理所)는 장차 1795년 을묘년 원행에서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는데,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外整理所)라 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에 정리소는 장용내영에 설치하였는데, 1796년(정조 20) 화성 행궁이 완성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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