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길 – 서울 남산(4)
(인권길과 국치길, 2020년 11월 17일)
瓦也 정유순
일명 <삼순이 계단>에 올라서면 ‘서울 위안부 기림비’가 있다. 기림비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 김학순(1924~1997) 할머니가 처음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한 날(1991년 8월 14일)을 기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샌프란시스코 김진덕·정경식 재단 등 한국 교민이 중심이 되어 미국에 사는 중국·일본·필립핀 사람들이 뜻을 모아 서울시에 기증하여 2019년 8월 14일에 세워졌다. 8월 14일은 고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을 기리는 국가기념일로 공식 지정된 ‘기림일’이다.
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동상은 당당한 모습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손을 맞잡은 160cm 크기의 세 명의 소녀(한국·중국·필리핀)와 이들의 모습을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평화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실물 크기로 표현하였다. 세 소녀상 사이의 공간은 그 속으로 들어가 소녀들과 손을 맞잡아 우리의 이 아픈 역사를 잊지 말자는 의미다. 소탈하고 경쾌하고 솔직해야 했던 당시 20대 아가씨 삼순이의 모습은 언제쯤 돌아올까?
서울 남산은 오래도록 한양의 안산(案山)인데, 일제는 이 일대에 조선통감부(조선총독부), 한국주둔군사령부 등을 설치했고, 일제 국가종교시설인 조선신궁을 1925년에 세웠다. 그리고 지금의 팔각정에 있었던 국사당을 조선신궁의 위에 있다는 이유로 인왕산으로 강제 이전하게 된다. 국사당은 조선 태조를 비롯해 무학대사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국가 제사만 지내던 곳이었는데, 인왕산으로 이전하면서 국사당의 이름에서 ‘사’를 祀에서 師로 바꾸고 무학대사만을 위한 사당으로 바꾸었다.
일제가 세운 조선신궁(朝鮮神宮)은 면적 430,000㎡, 건물 15채에 이르렀다. 일본의 건국신(建國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조선을 병탄한 일왕 메이지(明治)를 신궁의 제신으로 삼았으며, 한국인들은 일제의 강요로 신궁과 신사를 참배해야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정하고 신사참배를 비롯하여 일장기 게양,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등을 월례 행사로 강요하였다. 신사참배의 강요는 매년 늘어나고,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는 논리로 타 종교인(宗敎人)에게 참배를 강요한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항복 선언을 한 다음 날 신궁에 모셨던 신령(神靈)을 스스로 하늘로 돌려보냄을 의미하는 승신식(昇神式)을 연 뒤 해체 작업을 벌였고, 10월 7일에 남은 시설을 소각하였다. 조선 8도 지방의 면 소재지까지 촘촘하게 박혔던 1,141곳의 신사들이 한국인들에 의하여 불태워진 것에 비하여, 조선신궁은 일본인 자신들이 스스로 폐쇄행사를 하였고, 각종 신물(神物)은 일본으로 보내졌다. 이후 조선신궁 자리에는 남산공원이 조성되고 안중근의사기념관 등이 건립되었다.
한양도성을 깔고 앉은 조선신궁 터 윗부분은 <한양도성유적전시관>으로 조성되었다. 연 면적 4만3,000여㎡ 규모로 들어서는 전시관은 남산 중앙광장 일대의 성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전시관 중앙에는 약 189m에 이르는 조선 시대 한양도성 성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성벽 중간 멸실(滅失)된 구간 왼쪽에는 일제가 식민통치 수단으로 건립한 조선신궁의 배전(拜甎) 터가 자리 잡고 있다. 성벽 끝쪽에는 조선 시대 축성과 관련된 글을 새긴 돌인 각자성석(刻字城石)도 확인할 수 있다.
기림비 옆에 있는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과 과학전시관은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으로 출발하였다. 남산은 오래전부터 정치 권력의 필요에 따른 장소로 이용되다가 196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는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1967)>를 창간하고, <육영재단(1969년 4월 24일 설립)>의 지원을 받아 회관이 1970년 7월 문을 열었다. 그리고 1974년 7월 서울 광진구로 육영재단이 이전하면서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양된다. 국립중앙도서관도 1988년 05월 서초구로 이전하면서 서울시 교육정보연구원과 과학전시관으로 되었다.
조선신궁 터의 마당에는 안중근 의사 동상과 유묵을 새긴 비석들이 서 있고,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다. 안중근(安重根, 1879. 9. 2∼1910. 3. 26) 의사는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했던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를 통해 국민의 독립 의지를 일깨우고, 밖으로는 민족혼이 살아 있음을 온 세계에 알린 영웅이다. 그리고 의거 이후 옥중투쟁에서 하얼빈 의거가 우리나라의 독립뿐만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했던 탁월한 정치 사상가이자 진정한 평화주의자였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이며 평화주의자, 민족의 백년대계를 준비했던 교육가, 국채보상운동을 펼쳤던 민족 계몽운동가, 문무를 겸비한 선비이자 의병장이고 신앙인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의사(義士)로 알고 있는 안중근은 재판과정에서 ‘나는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으로써 우리나라를 침략한 적장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으니 포로로 대접해 달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의사보다는 장군이 맞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남산공원에 있는 역사기념관이다. 사단법인 <안중근 의사숭모회>가 관리 운영하고 있으며 1970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 60주년을 기념하여 국민의 모금으로 설립되었다. 2010년 10월 26일에는 이전에 있었던 한옥 모습의 구관(舊館)을 철거하고 현재의 자리에 신관을 설립하여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1주년을 기념하여 개장하였다. 그러나 이 기념관을 운영하는 <안중근 의사숭모회>의 회원 중에는 일제에 부역한 친일인사가 다수 포함되었다는 지적이 많다. 염치(廉恥)가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안중근 장군의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라는 마지막 유언을 일백 년이 훌쩍 지나는 동안 이행하지 못한 후예(後裔)로서 장군을 대할 면목이 없다. 그러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피하지 말고 가슴에 깊이 새겨두자.
기념관을 나와 백범 김구(金九, 1876~1949) 선생과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제 이시영(省齋 李始榮, 1869~1953) 선생의 동상이 있는 백범광장으로 내려온다. 김구 선생의 백범(白凡)은 “백정(白丁)같이 천하고 범부(凡夫)같이 평범한 사람”이란 뜻으로 민초(民草)들이 “애국심과 지식을 갖게 해야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아호(雅號)를 정했다고 한다.
백범은 초년시절 동학과 불교에 귀의하였으나 오히려 평생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심지를 굳게 다짐했던 시기였다. 중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여 해방될 때까지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환국 후에는 남과 북의 완전한 통일된 조국을 그토록 염원했건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가버렸으니… “나에게 한 발의 총알이 남아 있다면, 왜놈보다 나라와 민주주의를 배신한 매국노 변절자를 백번 천번 먼저 처단할 것이다”라던 백범의 말씀이 우리를 향해 사자후(獅子吼)를 토한다.
이시영 선생은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후손이며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집안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 등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처하자 중형(仲兄)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선생 등 6형제가 전 재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이주하였다.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양성은 물론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시다가 해방 후 6형제 중 유일하게 생환하신 분이다.
신흥(新興)이라는 명칭은 1907년 결성된 항일비밀조직인 신민회(新民會)를 ‘구국 투쟁을 왕성하게 한다’는 뜻으로 만들었고, 이곳을 거쳐 간 졸업생들은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시영 선생은 해방 후에는 신흥무관학교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47년 2월 신흥대학(新興大學)을 설립·운영하였으나 경영난으로 1951년 5월 조영식(趙永植)에게 인수되었고, 1960년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로 명칭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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