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깝고도 먼 길 – 서울 남산(2)

와야 정유순 2020. 12. 4. 05:49

가깝고도 먼 길 – 서울 남산(2)

(인권길과 국치길, 2020년 11월 17일)

瓦也 정유순

   3년 전 낙엽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질 때도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장충단으로 나와 남산으로 향했던 길을 따라 오늘처럼 계단을 올랐다. 장충공원으로 더 잘 알려진 장충단(奬忠壇)은 대한제국(大韓帝國) 때 명성황후 민비가 시해된 을미사변과 구식군인들의 처우 불만으로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 및 갑신정변으로 순직한 충신과 열사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고종황제의 명으로 세워진 최초의 현충원(顯忠院)이었다.

<장충동 석등>

   지금은 일제의 만행으로 장충단은 철저하게 훼철(毁撤)되고 순종황제가 황태자 시절에 쓴 글씨 ‘장충단비’(서울지방유형문화재 제1호)만 외롭게 남아 있다. 이 비는 원래 영빈관(현 호텔신라) 내에 있었던 것을 1969년 지금의 수표교(水標橋) 서편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장충단공원과 국립극장은 물론 그 주변의 호텔과 대학교 등 많은 건물과 시설들이 장충단구역으로 추측된다.

<장충단비>

동국대학교 정문 앞을 건너 계단으로 접어들면 우측에는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 파견되었다가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殉國)하신 이준(李寯) 열사 동상이 굽어보고, 주영공사관(駐英公使館) 서리공사를 지내다가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이한응(李漢應, 1874~1905) 열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기념비가 보인다. 나라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망국의 한을 겪어야 했던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끈 떨어진 연()의 신세였으리라.

<이준 열사 동상>

 

남산 올라가는 계단 좌측에는 교육자이자 국어학자로서 조선어학회를 창립하고, ‘한글문법’의 근간을 만들고 한글을 일제로부터 지키려다 소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셨으며, 한글연구와 한글사랑 운동에 힘쓴 외솔 최현배(崔鉉培, 1894~1970)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보인다. 이렇게 장충단에서 시작하는 오늘의 남산 길은 일본의 침략과 민족말살정책으로 슬픈 과거를 지녔던 치욕(恥辱)의 길이 이어진다.

<외솔 최현배 선생 기냠비>

   남산공원길에 접어들어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낙엽 진 앙상한 가지 사이로 동국대학교 법당인 정각원이 빼꼼히 보인다. 정각원(淨覺院)은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崇政殿)이었다. 경희궁은 원래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사저가 있던 곳을 광해군이 궁궐을 건립하여 경덕궁이라 불렀던 곳이다. 숭정전은 1910년 일제가 경희궁을 철폐하고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설립할 때도 남아 있었다.

<정각원(동국대학교)-네이버캡쳐>

     그 후 1926년에 남산 기슭, 지금의 동국대학교 자리인 조계사의 본전으로 사용되기 위해 이건(移建)되었다. 광복 후 그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세워지면서 1976년 9월 현재 위치로 옮겨져 학교의 법당인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숭정전 천정에는 광해군 때 만들어진 일곱 발가락을 가진 암수 흑쌍룡(黑雙龍)이 있는데, 이는 숭정전뿐만 아니라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내부에도 7개의 발톱을 가진 용이 있다고 한다. 숭정전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흑쌍룡(정각원 천정)-네이버캡쳐>

   남산 중턱에 개설된 남산공원길을 약 1㎞쯤 걷다가 필동으로 빠지는 샛길로 들어서면 ‘노인정(老人亭) 터(1840년 건립)’라는 표지석이 나온다. “풍양조씨 정자 터로 갑오개혁을 논의했던 곳”이란 설명이 있다. 지금은 언덕에 빗대어 지은 볼품 없는 건물이지만,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閔升鎬)의 양자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별장이었다. 민영익은 당시 개화파의 선두에서 섰던 사람으로 ‘민씨척족세력’의 거물이었다.

<노인정 터>

   청일전쟁 발발 직전인 1894년 7월 1일(양력) 이곳에서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3차례 노인정 회의에서 내정 개혁안 5개조를 제시하면서 이를 시행할 것을 요구 협박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이미 개혁을 요구한 동학농민운동 때문에 경황이 없었기에, 이를 주권 침탈로 받아들이고 교정청을 두어 스스로 개혁을 하겠다고 발표하여 사실상 거부했다. 일본의 이러한 개혁의 협박은 조선을 병탄하기 위한 수순(手順)의 일환이었다.

<노인정 터 건물>

   예장동 골목을 휘돌아 도착한 곳은 서울특별시청 남산청사다. 한때는 중앙정보부 남산분실로 불리었던 구 중앙정보부 제5국 청사로 “남산 다녀왔다”하면 어떤 이상한 문제에 연루되어 강제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던 암울한 시기의 대표적인 장소다. 즉 정권의 주구(走狗)가 되어 권력을 위해서는 일반 시민의 인권은 찾아볼 수 없고 ‘남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서울시 남산청사-옛 중정 제5국>

   남산 제1호 터널 입구 앞을 통과하여 이곳 청사로 가는 전용 터널이 ‘소릿길’이다. 길이 84m의 이 굴길은 철문소리, 타자기소리, 물소리, 발자국소리, 노랫소리 등 다섯 가지 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리들은 따로 고립되어있는 듯 하지만 팔도에서 가져온 바닥 돌을 밟을 때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드러내면서 하나의 서사를 향해 움직이는 곳이다.

<소릿길>

   소릿길로 되돌아 나와 조금만 내려오면 남산창작센터 건물이다. 처음에는 구 중앙정보부(안기부) 직원 체육관으로 들어선 건물이었으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체육시설은 서울시에서 인수하여 운영해 왔다. 그런데 이곳은 일명 ‘황제테니스 사건’으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서울특별시장 출신인 이명박(李明博) 전 대통령이 2006년 ‘공짜’ 테니스를 즐겼다가 협회 측과 테니스장 운영자 사이에 이용료를 둘러싼 마찰이 빚어지자 자신이 친 이용료 600만 원을 뒤늦게 지불(支拂)한 것으로 밝혀졌다.

<남산창작센터-옛 중정체육관>

   북쪽 코너를 살짝 돌면 서울중앙방제센터와 서울유스호스텔이 나온다. 서울종합방재센터(서울綜合防災센터)는 서울특별시의 119 신고를 수보(受報)하고, 재해, 재난, 민방위경보를 총괄 지령하는 곳이다. 이곳도 과거에는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상황실과 취조실로 쓰였던 곳이다. 군사독재와 유신에 반대하던 수많은 사람이 고문과 날조로 애먼 피를 흘려야 했던 인권의 사각지대였다.

<서울중앙방제센터-옛 중정상황실>

   맞은편의 서울유스호스텔도 한때 중앙정보부(안기부) 제6국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나 이 건물도 권력의 그늘이 짙게 깔렸있다. 1973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서울대 법대 최종길(崔鍾吉, 1931~1973) 교수가 의문의 추락사를 한 곳이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1962년에 귀국한 후 1965년에 모교인 서울대 법학과 교수로 임명된 최 교수는 1973년 10월 16일, 유럽 간첩단 사건의 참고인으로 수사에 협조하고자 동생인 중앙정보부 요원 최종선과 함께 웃으며 중앙정보부에 자진 출두하였다.

<서울유스호스텔-옛 중정 제6국>

    그로부터 3일 뒤인 10월 19일, 중앙정보부는 최 교수가 유럽 간첩단 소속 간첩인 걸 고백하고 중정 본부 7층에서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가족들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이 ‘최종길 교수는 고문을 받고 살해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진상 규명을 촉구했으며, ‘국가는 최 교수의 유족에게 18억 6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의 판결은 최 교수가 살해된 것을 법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당시 중정부장은 이후락이었고, 국내 담당 차장은 김치열, 담당 국장은 안경상이었다.

<세계인권선언문>

    최 교수가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받고 사망한 이유에 대해서는 박정희 정권이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하면서 서울대 학생들이 유신반대 데모를 하다가 붙잡히자 최 교수가 ‘서울대 총장을 보내 항의하고 박정희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라고 발언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아주 당연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유신 체제에선 당연한 말도 죽을 이유가 되는 시대였으니… 그러나 당시 관련자들은 유구무언이고 아무도 처벌받지도 않았다.

<세계인권선언문>

   중앙정보부 들어가는 길목에는 터만 남은 주자파출소(鑄字派出所)가 있었는데, 중정에 끌려간 사람들의 소식을 접하려고 찾아와 면회 접수하고 하염없이 기다려 소위 <중정 면회소>라고 불렀으나 면회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예장동 일대는 인권을 유린당한 영령들의 넋이 떠도는 <인권길>이고 망국의 한이 서린 <국치길>이다.

<옛 주자파출소 터>
<인권길 국치길 지도-네이버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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