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채계산(釵笄山) 비녀길

와야 정유순 2020. 11. 10. 21:03

채계산(釵笄山) 비녀길

(2020년 11월 7일)

瓦也 정유순

   가을바람 소슬(蕭瑟)하게 불어오더니 바람 끝은 바늘이 되어 옷 속으로 파고든다. 오늘의 목적지는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괴정리와 남원시 대강면 입암리·옥택리 경계에 있는 채계산(釵笄山)이다. 새벽길 달려 도착한 곳은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 임시주차장이다. 섬진강이 유등면의 중앙을 흐르고 대구∼광주 고속도로가 관통한다. 주차장 주변의 밭에는 붉게 익은 수수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든다. 쌀 대용으로 사용한 수수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잡곡이었으며, 고량(高粱)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고량주의 원료로 쓰인다.

<수수>
<섬진강관광자원 안내도>

   고속도로 교각 아래를 지나 채계산 유등책암진출입로는 데크로 조성된 긴 계단으로 이어진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소나무 길 사이로 산책하듯 가볍다. “채계산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녀길이며 가장 편안한 길입니다.”라고 쓴 푯말은 힘들게 올라온 나그네의 마음을 달래준다. 능선 마루에서 바라본 섬진강 들녘은 경지정리가 잘된 바둑판 같다. 두꺼비 전설을 안은 섬진강은 전라북도 진안군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임실·순창·남원·곡성·구례·광양과 하동을 적신 후 망덕포구를 지나 남해로 흘러나간다.

<유등책암진출입로 계단>
<대구-광주 고속도로>

   소나무 사잇길로 이어지는 산길은 첫 전망대가 나올 때까지는 어느 산과 똑같이 이어진다. 산 아래로는 섬진강이 굽이지고, 덩달아 대구∼광주 고속도로가 길게 뻗는다. ‘山外山不盡(산외산부진 : 첩첩 산은 넘고 넘어도 끝이 없고) 路中路無窮(노중로무궁 :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이 이어지네)’추구집(推句集)에 나오는 글귀가 채계산을 설명해 준다. 추구집은 일상생활에 숨어 있는 지혜와 슬기를 한 구절 한 구절 아름답게 꾸며 누구나 즐거운 마음으로 가볍게 애송할 수 있는 옛 서당의 초학서(初學書)다.

<솔밭길>
<산은 넘어도 끝이 없고~>

첫 봉우리에는 주인 없는 무덤이 홀로 있는데, 봉분은 겨우 흔적만 남기고 지나가는 발길만 무덤 앞으로 무수히 발자국을 남긴다. 혹시 처녀 무덤은 아닌지… 옛날에는 처녀가 죽으면 한이라도 풀어보라고 사람의 왕래가 잦은 길가에 아무 표시도 없이 묻는 풍습이 있었다. 봉우리에서 내려오면 말허리처럼 잘룩한 곳이 순창군 유등면 무수리와 남원시 대강면 입암리 사람들이 넘나들던‘무수재’다.

 

<무수재>
<섬진강>

  무수재를 지나면 순창군 성면 고원리이고, 다시 경사를 타고 일로매진(一路邁進)하면 두 번째 만나는 정상은 금돼지 전설이 전해오는 ‘금돼지굴봉’ 이다. 이 산에는 적성원님의 부인과 금돼지의 전설이 전해오는 금돼지 굴이 있다. 새로 부임한 원님의 부인이 자주 실종되자 지혜 있는 원님이 부인 치마허리에 명주실을 달아 두었는데, 한참 후에 부인이 없어져서 명주실로 행방을 찾아보니 채계산의 굴 쪽이었다.

<금돼지굴봉 전경>

   수색대와 같이 올라가 보니 금돼지가 원님의 부인을 희롱하고 있었다. 부인이 금돼지에게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즉 사슴 가죽이라 하자 원님은 사슴 가죽으로 된 장롱 열쇠 끝을 몰래 전해주었다. 그 부인이 녹비를 금돼지의 코에 넣었더니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산 정상에는 임자가 있는 묘가 있었는데 금돼지 전설과의 관계는 없는 것 같다.

<금돼지굴봉 암릉>
<금돼지굴봉 무덤>

   금돼지굴봉을 내려오면 적성 채계산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적성(赤城)은 순창지역의 옛 지명이다. 본래 백제의 역평현(礫坪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적성(赤城, 또는 磧城ㆍ硳城)으로 고쳐 순화군(淳化郡:지금의 순창군)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 때 남원부(南原府)에 귀속시켰다가 뒤에 복흥(福興)과 함께 순창으로 다시 이속(移屬) 되었으며, 조선 말기까지 적성방(赤城坊)으로 존속하다가 1897년에 적성면이 되었다.

<채계산 능선>

적성의 지명유래는 이곳에 있는 적화산(赤華山)의 동쪽이 ‘ㄱ’자 모양으로 절벽을 이루는데 매년 봄이면 두견화(杜鵑花)가 바위틈에 붉게 피어올라 ‘붉은 성’을 연상하게 된다는 데서 나왔다. 섬진강 연안에 발달한 이 지역은 조선 시대에는 서창(西倉)이 있었고, 순창과 남원을 잇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적성(赤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인용]

<섬진강과 적성>

채계산(360m)은 회문산, 강천산과 더불어 순창의 3대 명산 중 하나다. 채계산처럼 많은 전설과 수식어가 붙은 산도 드물 것 같다. 비녀를 꽂은 여인을 닮아서 채계산(釵笄山), 수만 권의 책을 쌓아 놓은 형상이어서 책여산(冊如山), 적성강을 품고 있어 적성산(赤城山)으로 불렸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화산(華山)으로 기록되었는데, 산의 들머리인 산기슭에 백발노인이 우뚝 서 있는 30m의 화산 옹바위 전설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채계산 정상>
<채계산 대나무 숲>

   특히 채계산은 적성강 변 임동의 매미 터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마치 비녀를 꽂은 여인이 누워서 달을 보며 창(唱)을 읊는 모습인 월하미인(月下美人)의 형상을 하였다고 하여 비녀 채(釵)자, 비녀 개(笄)자를 써서 지은 이름이다. 그곳에서는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르는 소리꾼들이 많이 나왔으며, 그중에서도 조선 말의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 1898∼1943)이 유명하다.

<섬진강과 들녘>

   또 하나의 전설은 고려 말 최영 장군이 그의 장인인 오자치(나성부원군)가 살던 장수군 산서면 치마대에서 화살을 날린 후 바로 말을 달려 이곳에 도착했지만, 화살이 날아오지 않아 화살보다 늦게 도착했다고 판단하여 이곳에서 불호령과 함께 단칼에 말의 목을 베어 버렸는데, 그 순간 화살이 바로 이 바위에 꽃힌 것을 뒤늦게 알고 자신의 경솔한 행동에 대해 한숨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채계산 정상 표지석 뒷면>

    채계산 산행의 백미는 송대봉(松大峰)을 지나 용의 이빨 같은 기이한 형상의 바위가 칼날처럼 이어지는 용아성벽(龍牙城壁) 능선이다. 지금은 철제 데크와 계단으로 편리하게 해놓았지만, 아슬아슬한 칼바위와 송림이 한데 어우러진 암릉(巖陵)이 매우 아름답다. 채계산을 휘돌아가는 적성강에는 조선 시대에 중국 상선들이 복흥의 도자기와 적성의 옥 등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많이 드나들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서 쇠말뚝을 박았던 곳이라고 한다.

<칼능선>

   채계산을 내려오는 길은 조금 가파르다. 그러나 넓게 펼쳐진 적성 들녘은 막혔던 숨통을 확 뚫어 놓는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금남호남정맥은 포근한 어머니의 품이다. 그 포근함은 1980년 후반에 모 광업회사가 채계산에서 규석 채취를 하면서 자연경관을 많이 훼손시켰는데, 이를 보다 못한 순창군의 28개 사회단체와 군민들이 책여산 살리기 보호회를 결성하여 채계산의 자연환경 훼손을 막는 범군민 운동을 벌인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칼능선 올라가는 계단>

때로는 곡예 하듯 아래로 내려오면 채계산 출렁다리가 멀리서도 출렁거린다. 2020년 3월에 개통한 채계산 출렁다리는 24번 국도 사이에 적성 채계산과 동계 채계산으로 나누어지는 채계산을 하나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며 현재 국내에서 가장 긴 기둥이 없는 산악 현수교(懸垂橋)다. 길이는 270m이고 높이는 최고 75~90m다. 다리 위에 올라서면 틈새로 보이는 상판 아래가 까마득하다. 다리 중간쯤에 도착하니 약간의 현기증도 수반한다. 그러나 그 어지러움보다 흔들거림의 짜릿한 맛이 훨씬 더 강하다.

<채계산 출렁다리>
<채계산 출렁다리>

   출렁다리를 건너 1,104계단을 밟고 어드벤처 전망대에 올라서니 세상 천하가 모두 내 것이로다. 채계산의 골격은 결코 어느 산에 비해 손색이 없다. 산줄기는 북으로 순창군 동계면의 남산까지 쭉 이어져 있지만 귀경할 시간에 쫓겨 데크 계단을 따라‘월하미인’간판이 있는 출렁다리 출입구로 내려온다. 아래에는 피톤치드가 가득한 편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그 아래에는 순창의 농특산물을 판매하는 시장이 손님을 맞이한다. 오늘 하루는 월하미인(月下美人)의 품속에서 꿈 같은 하루를 보낸 날이다.

<월하미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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