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부모의 뒤를 보고 자란다
瓦也 정유순
“네 아버지 이름이 뭐냐?”“네 아버지 무얼 하시냐?” 나 어렸을 때 마을을 지나가다가 어른을 보고 인사를 소홀히 했거나 그릇된 일로 들키면 의당 어른들은 특히 첫 질문으로 아버지 이름이나 직업을 물어보신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혹시 아버지 귀에 들어갈까 전전긍긍하며 말끝을 흐리거나 줄행랑 놓기가 일쑤였다. 그 당시에는 잘못은 내가 했는데 왜 아버지 이름을 물어볼까? 하고 의아해했다. 혹시 나의 잘못된 행실을 집에서 알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가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때에는 시골아이들이 뛰어놀만한 시설이 거의 없어 눈 앞에 펼쳐지는 자연이 놀이터였고, 그 산천에 꽃이 피고 열매가 익으면 거의 우리 것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서리’라는 명목으로 남의 집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슬쩍 하는 풍습도 있었다. 그때 시골에서는 성장하는 아이들이 의당 거처야 하는 놀이의 일종으로 관대한 편이었다. 물론 지금은 절도 범죄에 해당하여 감히 할 수 없는 놀이가 되었지만…
이때도 서리하다 들키면 다시는 안 하겠다는 약속과 두 손 들고 벌을 받거나, 바쁜 일을 도와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아마 이런 것들이 먹거리가 부족하여 보릿고개라는 배고픈 시절에 여유 있는 자들의 아량으로 하나의 관습처럼 여겨져 왔었다. 겨울의 끝물에서는 매화가 방긋 피어나 봄소식을 알리고 연이어 살구 앵두 복숭아 등 나무에 봄꽃이 화사하게 피어나서 꽃이 진 이후에는 열매만 익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시절이었다.
여기서 아버지 이름과 직업을 물어보는 것은 어린 나의 능력과 교양을 따지려는 것이 아닌 집안의 형편과 아버지의 인품을 따져 보려는 심산이었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깨달았지만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란 말을 알게 되었고 개인의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이에 대처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놈 참 쓸만하네. 또는 형편없는 놈이네” 등 평가가 엇갈리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들이 또 다른 하나의 교육이었다.
따사한 햇살이 비치는 바닷가에서 엄마 게와 아기 게가 즐겁게 산책을 나서고 있었다. 모처럼의 산책을 즐기던 엄마 게는 아기 게가 걷는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워 아기 게를 나무랐다. “그렇게 옆으로만 걸으면 안 돼. 엄마처럼 이렇게 걸어보렴.” 아기 게는 엄마 게가 걷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아기 게는 여전히 옆으로 걸었다. 엄마 게는 다시 아기 게를 야단쳤다. “그렇게 걷지 말라니까! 엄마를 따라 이렇게 걸으면 된다니깐.”
그러자 아기 게는 “엄마. 나는 엄마가 가르쳐주는 데로 열심히 따라 하고 있어요. 저기 보세요. 엄마가 걸어온 발자국과 제 발자국이 똑같지요.” 엄마 게는 모래밭에 난 발자국을 보고 놀랐다. 모래밭에는 아기 게의 말대로 똑같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엄마 게도 아기 게와 똑같이 옆으로 걷고 있었던 것이었다. <따뜻한 편지 제1648호, ‘엄마 게와 아기 게’인용>
조선 시대의 서당이나 향교에서의 교육방식은 훈장과 제자가 서로 물어보고 대답하는 주로 토론방식이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때 신교육이 도입된 이후부터는 수직 강압 방식 교육으로 전환이 된다. 전에는 문장 한 구절마다 뜻과 내용을 토론을 통해 숨어 있는 부분까지 들여다보았는데, 일제 치하에서는 일제가 만든 교재를 중심으로 수직적으로 받아 적고 외우는 강제 주입방식이었으며, 그 명맥은 최근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봉사와 헌신의 삶으로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린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도 교육을 “첫째도 본보기요, 둘째도 본보기요, 셋째도 본보기”라며 아이들은 가르치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대로 행한다고 했다.
얼마 전 지방의 어느 도시 편의점에서 30대 여성이 점주와 말다툼을 한 뒤 자신 소유 차량을 몰고 편의점을 들이받았다. 그리고 편의점 안으로 돌진한 뒤 약 20분 정도 차를 앞뒤로 움직이며 물건 등을 파손시켰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하차 요구에 불응하자 경찰은 공포탄 한 발을 쏜 뒤 그를 현장에서 체포했다.
이 여성은 “공모전에 딸의 그림을 접수해달라고 했지만, 편의점 점주가 고의로 접수하지 않아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자기 딸의 재능을 보여주려다가 접수가 안 되어서 오는 순간의 허탈감과 분노가 치밀어 올라 저지른 행동이겠지만, 만약에 그 순간을 참고 실의에 빠졌을 어린 딸과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조금만 참았더라면 더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의 자세를 몸에 익히는 데 꼭 필요한 곳은 가정이다. 올바른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줄 여러 규범을 배우는 ‘인간교육의 장’이며, 그곳의 ‘교사’는 아버지이고 어머니다. 옛말에 ‘아는 자는 말이 없고 말하는 자는 아는 게 없다(知者不言 言者不知)’고 했다. 아이 앞에서 현란한 언사(言辭)보다는 말없이 아름다운 뒤태를 보여주는 모습이 더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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