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신흥무관학교 교가 해설

와야 정유순 2020. 10. 7. 01:26

신흥무관학교 교가 해설

瓦也 정유순

 

< 1절 >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의 영절의/여러 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동해섬 중 어린 것들 품에다 품어/젖먹여 기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좔좔좔 결치며 돈다

 

< 2절 >

장백산 밑 비단 같은 만리낙원은/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집이어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종설움 받는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우리 우리 자손들이라

가슴치고 눈물 뿌려 통곡하여라/지옥의 쇳문이 온다

 

< 3절 >

칼춤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어/새 나라 세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우리 우리 청년들이라

두 팔 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자유의 깃발이 떴다.

<신흥무관학교 교가-네이버 캡쳐>

   1910년 12월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 등 6형제를 시작으로 이듬해 2월 이상룡(李相龍), 김동삼(金東三) 등이 가산을 정리하고 서간도로 집단으로 이주하여 설립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항일독립운동 기지의 건설을 위해 설립된 독립군 양성 학교로 1911년 6월 10일(음력 5월 14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설립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에서 출발하여 일본의 탄압을 피해 운영해오다 결국은 1920년 7월 폐교하게 되고, 약 3,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우당 이회영 선생-여순감옥에서 2018. 7>
<신흥무관학교 터-네이버 캡쳐>

   신흥(新興)이라는 명칭은 1907년 결성된 항일비밀조직인 신민회(新民會)는 구국 투쟁을 왕성하게 한다는 뜻으로 만들었고, 이곳을 거쳐 간 졸업생들은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다. 해방 후 국내로 돌아온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47년 2월 신흥대학(新興大學)을 설립·운영하였으나 경영난으로 1951년 5월 조영식(趙永植)에게 인수되었고, 1960년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시영 선생 동상-서울 남산>

    교가(校歌)는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참여한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858년~1932년) 선생이 작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석주는 서간도로 망명한 후인 1913년 대동역사를 집필하여 학생은 물론 우리 민족의 민족정신을 고취 시키고자 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 역사 교과서로 사용하였다. 석주의 대동역사 집필은 경술국치 이후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동산 류인식(柳寅植, 1865~1928) 등이 활발하게 역사서를 집필한 목적과 같이한다.

<석주 이상룡 선생-임청각에서>

    이에 조선총독부는 이들의 역사책이 조선 민족에게 널리 읽혀질 것이 두려워 부랴부랴 조선사 편수회를 설립하여 단군 역사를 포함한 우리 고대사를 말살하고 신화로 둔갑 왜곡시킨 조선사 36권을 편찬한다. 1919년 3·1운동 이후 1920년부터 우선 심상소학역사보충교재(尋常小學歷史補充敎材)를 만들어 어린이부터 수직 강압식 교육으로 강제 주입 시킨다.

<친 나치를 청산한 프랑스 드골대통령>

    교가의 1절은 우리 민족의 영광스런 과거와 옛역사를 표현한 것으로, 비록 당시 모화사상(慕華思想)과 일제(日帝)에 의해 잠시 국권을 빼앗겼을지라도 우리 민족은 본래 북쪽으로는 흑룡강(黑龍江), 서쪽으로는 태원이 나오는데, 태원은 신의주에서 비슷한 위도의 중국 산서성(山西省)의 대륙에 있는 타이위안[(太原)]이다.

<고조선영역도>
<중국 타이위안[태원(太原)]역>

   남쪽으로 영절(절강)이란 중국 대륙의 대만 바로 위쪽 해안가 저장성[절강성(浙江省)]으로 나온다. 즉 이 지역 전체가 한민족 구성원의 영토이자 주요 활동무대였다는 이야기이고, 배달(倍達) 시대(신시개천시대, 환웅시대)부터 우리 민족이 중국의 한족(헌원자손)과 왜인들(동해섬 중 어린 것들)을 돌보며 키워왔다(업어 기르고 품에다 품어 젖먹여 준)는 뜻이다. 황제 훤원(黃帝 軒轅)은 염제(炎帝)와 함께 중국 한족(漢族)의 조상으로 중국인들은 스스로 ‘염황지손(炎黃之孫)’이라고 일컬어왔다.

<삼국시대 영역도>
<중국 저장성 위치도>

   후렴은 “우리 우리 배달나라…” 라고 나온다. 당시에 이미 우리 민족은 배달(倍達)민족이었고, 배달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조선 이전의 환웅(桓雄)시대를 일컬어 신시 혹은 배달 혹은 신시배달 그리고 치우(蚩尤)천황 이후에는 청구, 청구국이라고 했다. 이 내용이 실린 환단고기(桓檀古記)는 1911년에 5권의 책으로 합본해서 나오는데, 이는 이미 그 전에 많은 역사적 문헌이 있었다는 증거다.

<고구려 문양 삼족오>

   일제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조선 역사서 약 20만여 권을 압수하여 불살라버렸다. 이때 태우지 못한 5만여 권의 역사책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에는 조선의 역사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죄가 되고 아는 것도 죄가 되는 세상이었다. 이때 살아남은 책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다.

<고조선 47분의 단군>

   2절에서는 당시의 현실을 비감(悲感)해 본다. “장백산 밑 비단 같은 만리낙원”이란 구절은 당시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서간도 길림성을 말한다. 장백산(長白山)은 백두산(白頭山)의 중국식 이름으로 혼용해서 사용한 것 같다.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집이어늘”이란 가사는 이 지역이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터전으로 우리 민족의 안마당이었음을 일컫는다.

<발해의 행정구역>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종 설움 받는 이 뉘뇨”는 우리 민족의 땅인 간도 지역이 1909년 9월 4일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는 청·일 간의 간도협약(間島協約)이 체결되어 청나라로 넘어가고, 1910년에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탄 당하고 망명해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자신들의 설움을 일컫는데, 국토를 잃은 당시의 처지를 표현함으로써 국권회복(國權回復)은 물론 역사회복의 의지를 다지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간도 지도>
<간도협약으로 영토축소>

   3절은 우리 민족의 미래와 희망을 노래한다.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어 새 나라 세울 이 뉘뇨”는 만주 벌판과 중원대륙을 호령한 고구려의 개마무사(鎧馬武士)처럼,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화랑처럼 용맹과 지혜를 길러 조국의 광복과 새 나라를 건설하자는 희망을 노래한다.

<개마무사상-천등산휴게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린이와 젊은 청년들은 나라의 희망이며 미래의 주역이다. 민족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사상을 배우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다. 유구한 역사를 거치며 문화의 융성을 이룬 옛 선조들의 웅혼(雄渾)을 잊지 말고 그 핏줄을 이은 우리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마음으로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할 것을 담고 있다.

<안동 임청각 전경-석주 선생 생가>

    그러나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5년이 지나 한 세기가 다 되어 가지만 지금의 현실은 일제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내용을 그대로 답습한 반도사관(半島史觀)이 주류를 이루는 실정이다. 이것을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일제강점기 시절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지고, 또 아시아 지역에서의 한민족의 위상이 명확해지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진정한 광복(光復)이란 일제 식민사관을 청산하고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다시 찾는 것이다.

<주상절리-경주 양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