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세 번째-1)

와야 정유순 2020. 3. 18. 20:28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세 번째-1)

(정선읍-어라연, 201942728)

瓦也 정유순

   두 번째 여정에서 보고팠던 오대천과 골지천이 만나 조양강(朝陽江)을 이루는 합수머리를 아침 시간을 이용하여 버스로 둘러본다. 오대산 우통소에서 발원한 오대천은 유로 길이 55.7로 검룡소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한강의 본류였으며, 북에서 남쪽으로 거의 직선상으로 뻗어 흐르며 하천 유역의 폭이 좁아 규모가 큰 지류가 발달하지 못했다. 하상의 경사는 하류에서 상류로 갈수록 급해지는 편이며, 물이 맑고 깨끗해 열목어(熱目魚)가 서식하는 어류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오대천과 골지천의 만남>


   조양강 따라 다시 내려온 정선(旌善)은 우리나라의 최고 오지로 치는 곳이다. 예로부터 도읍에서 머나먼 심산유곡의 땅이었다. 산과 물밖에 없는 척박한 고장이라 이곳으로 부임하는 벼슬아치들이나 귀양을 오는 사람들이 들어올 때 걱정되어서 울고, 떠날 때는 너무 정이 들어서 울었다고 한다. 아무리 오지라 해도 사람들은 산 따라 물 따라 풀씨처럼 뿌리를 내려 살고 있었다. 동강 변을 따라서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그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마을을 이뤄 살고 있다.

<정선읍>


   정선의 명칭은 고구려 때 잉매현, 신라 때 정선, 고려 때 삼봉(三鳳도원(桃原심봉(沈鳳)등 군명이 자주 바뀌었다. 1353(공민왕2)에 군명이 다시 정선으로 환원되어 조선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선군의 군청 소재지로서 정치·행정·경제·교육·문화의 중심지다. 1906년 지방행정조직이 면()제도로 개편하면서 동하면(東下面)을 합쳐 정선면(旌善面)으로 되었다가 1924년에 서면(西面)을 합하였고, 197371일자로 정선읍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선시내>


   려말선초(麗末鮮初) 제주 고씨 순창공 형제가 강원도 정선으로 내려와 지었다는 <정선 상유재고택>은 정선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으로 정선읍 봉양리에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된 이 고택은 661(200) 규모의 너른 대지 위에 ㄷ자 구조의 안채와 ㅡ자 구조의 사랑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비봉산(飛鳳山)의 경치가 뛰어나다. 순창공 형제가 집터를 잡을 당시에 심은 뽕나무 두 그루는 상유재(桑惟齋)라는 택호를 가지게 되었다. 이들 뽕나무(봉양리 뽕나무)는 강원도기념물 제7호다.

<상유재>


   정선은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과 더불어 우리나라 3<아리랑의 고장>이다. 고려가 망하고 송도에 있는 만수산에 액운(厄運)이 감돌자 황해도 두문동에 들어가지 못한 선비 전오륜(全五倫) 7명이 정선군 남면 서운산으로 은신처를 옮겨 시운을 한탄하고 쓰라린 회포를 달래며 부른 노래가 정선아리랑의 시원이다. 여기에 조선 말의 비운이 더해지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서러움과 애통함이 합해져 구슬픈 노랫가락이 되었다. 전해지는 가사만 수백 절이 되며, 지금도 끊임없이 가사가 지어지고 있다.

<정선오일장 남문>


   오늘이 장날인 정선오일장에서는 마침 아리랑공연 한마당이 펼쳐진다. ‘눈이 올라나/비가 올라나/억수장마 질라나/만수산 검은 구름이/막 모여든다/아우라지 뱃사공아/배 좀 건네주게/싸리골 올동박이/다 떨어진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로 시작하는 정선아리랑은 1971년 강원도 무형문화재 1호이며,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리고 201829일 평창올림픽 개막식 행사에서 예능보유자 김남기옹에 의해 공연되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정선오일장의 아리랑 공연>


   조양강은 나래를 활짝 편 봉황(鳳凰)의 형상인 비봉산 아래를 휘돌아 정선읍 용탄리 정선비룡굴에서 용의 기를 받고 귤암리로 흐른다. 강원도기념물 제34호로 지정(1980)된 비룡굴은 주굴의 길이 480m, 총연장 1.2로 동굴 속에는 용이 도사리고 있어 산신과 대치하여, 때로는 산신과 싸워 벼락과 번개 소동을 일으키고 또는 홍수피해나 가뭄 피해도 가져온다는 전설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선비룡굴 내부-네이버캡쳐>

 

   안개 자욱한 조양강 물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병방산(兵防山) 자락을 잡고 뱅뱅이재로 오른다. 이 고개는 귤암리 사람들이 정선장에 갈 때 넘던 고개로 다른 이름은 병방치(兵防峙). 이 고개를 넘어갈 때 36굽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길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또 북실리 주민들은 이 고개를 멀구치라고도 하는데, ‘멀구는 머루의 정선지역 방언으로 이 고갯길에 옛날에 머루 덩굴이 많아서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마차길이 생긴 1979년 이전까지는 귤암리에서 정선 읍내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길이었다.

<뱅뱅이재-병방치>


   귤암리는 정선 땅에서 유일하게 감이 재배되는 마을이다. 예부터 감꽃이 만발해 귤화(橘花)마을이라 했는데, 1930년대 의암(衣岩)마을과 합쳐져 귤암리(橘岩里)가 되었다. 마을의 진산은 병방산이다. 병방산(兵防山, 819m)은 깎아지른 바위산으로 한 사람만 지키고 있어도 천군만마가 근접하기 어려운 천연의 요새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수리도 넘어 다니기 힘든 산, 사람의 정수리처럼 높다고 해서 수리봉이란 이름도 붙었다.

<병방산 지도>


   병방치 스카이워크 전망대 아래로 강물이 휘돌아 내려가며 한반도지형인 밤섬의 아름다운 곡선을 만든다. 한반도지형은 강물이 감입곡류(嵌入曲流)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는 하천이 흐르는 지역이 융기되거나 하천이 계속 아래를 깊게 깎으면서 흐를 때 자유로운 방향으로 뱀처럼 구불구불한 형태로 만들어진 사행천(蛇行川)이다. 강물이 흘러와 빠르게 부딪히는 쪽은 주변의 암석을 깎아서 절벽이 생기고, 부딪혀 천천히 흐르는 강물은 모래를 쌓이게 한다. 이러한 작용이 반복적으로 계속되어 한반도 같은 지형이 만들어진다.

<동강의 한반도지형>


   귤암리에 도착하니 정선의 문화 해설사 한 분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막걸리와 배추전을 내놓으셔서 목을 축였다. 오늘 정선 오일장 공연을 앞두고 목 풀이로 두 분 명창께서 약 15분 정도 맛보기공연을 선보였다. 인물이 노래 못지않게 고우셨다. 무대는 조양강과 나팔봉을 배경으로 꾸며졌다. ‘한강 물이/깊고야/깊다고/하지만/우리님 속은/한강보다 더 깊네’(이하생략) ‘여러분들 오셨는데 앞앞이 인사 못드리고 정선아리랑 한가락으로 인사드립니다.’ 하면서 맛보기를 마친다.

<정선아리랑 공연>


   한편 귤암리는 <동강할미꽃>의 자생지다. 동강할미꽃은 3월 초 경칩(驚蟄)이 지나면 바로 동강 변 석회암 절벽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4월까지 피어난다. 다른 할미꽃과는 달리 꽃대를 구부리지 않고 꼿꼿하게 편 게 특징이다. 1998년 봄 사진작가 김정명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고, 한국식물연구원 이영노 박사에 의해 동강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한국 특산 식물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꽃이 발견된 지역명인 동강을 붙여 세계 학계에 공식 발표하였으며, 그 때문에 학명에 서식지인 동강이 표시되는 아주 특별한 꽃이 되었다.

<동강할미꽃-네이버캡쳐>


   그즈음 영월(동강)댐 건설을 완강하게 반대하며 동강 살리기에 나선 원동력이 동강할미꽃이다. 한국 특산 식물인 동강할미꽃을 비롯한 동식물과 주변 석회암동굴 등의 보전을 위해 동강댐 건설계획은 결국 20006월 백지화되었다. 그 후 동호인 등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찾아와 동강할미꽃 서식지를 드나들며 꽃을 꺾는 등 훼손이 심해졌다. 그리고 2002년과 2003년에 연이어 들이닥친 초대형 태풍 루사와 매미가 덮쳐 서식지가 파괴되어 멸종위기종이 될뻔했다.

<동강할미꽃>


   이에 귤암리 주민들이 2005년부터 동강할미꽃보존회를 조직하여 보전에 앞장서고 있으며, 씨를 받아 모종을 기르고 공급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매년 3월 마지막 주에는 동강할미꽃 축제도 귤암리 들머리에 있는 동강생태체험학습장에서 자체적으로 열린다. 강원도에서도 동강할미꽃을 비롯한 동강생태계 보전을 위해 2~3년마다 한 번씩 동강에 자연휴식년제를 시행하여 래프팅은 물론 일정 지역 출입을 통제하는 등 동강의 생물보존을 위하여 노력한다.

<동강할미꽃 마을>


   또한 정선에는 개 볼 낯이 없다라는 속담이 전해온다. 가난한 농부가 병을 앓는 부모를 위해 기르던 어미 개를 잡아 봉양하고 뼈를 강에 버렸는데, 어미의 뼈를 본 두 마리의 강아지가 이 뼈를 묻어 놓고 한 마리는 그 옆에 쓰러져 죽고, 다른 한 마리는 물속의 어미 뼈를 수습하다 물살에 휩쓸려 이곳 귤암리까지 떠내려와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허구한 날 어미를 부르다가 강아지 형상의 바우로 변했다는 <개바우> 전설이다. 정선은 효()의 고장으로 여지승람(輿地勝覺)에 기록되어 있다.

<개바위>


   조양강은 계속 흘러 정선읍 가수리에 당도한다. 가수리(佳水里)는 가탄(佳灘)과 수미(水旀)마을을 통합하면서 나온 지명이다. 조선 시대에 서상면에 속했고 1906년에 서면에 합쳤다가 다시 정선면에 합병되었다. 지세는 만 갈래로 뻗은 만지산의 최단(最端)이고, 서쪽으로 월괘봉, 능봉이 둘러싸였으며, 조양강이 귤암리에 흘러 내려오고 수미마을 앞에는 남면에서 흐르는 지장천이 합수되어 동강이 시작된다. 가탄을 지나 신동 운치로 흘르는 강은 강변에 기암기석(奇巖奇石)이 쌓여 경치가 아름답다.

<조양강-가수리>


   지장천(地藏川)은 정선군 고한읍에서 발원하여 정선군 일대를 흐르는 하천이다. 함백산(咸白山)으로부터 내려오는 하천과 금태봉(金殆峰)으로부터 내려오는 하천이 고한읍 갈래초교 앞에서 합류하는 지점에서 강이 시작된다. 본류 하천이 하류 쪽으로 내려가면서 합류하는 지류 하천들은 본류보다 규모가 훨씬 작다. 하천의 하상 고도는 해발 260~730m, 고도 차이로 인해 하상 경사가 매우 심하다.

<조양강 여울>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이라는 데 이견이 없는 동강은 정선의 주 강이다. 동강 물길 56중 태백이 5, 영월이 14인데 정선이 37나 지난다. 동강(東江)은 원래 오동나무 동()자를 썼다. 그래서 지금도 오동나무에 나래 깃을 털고 대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봉황이 살던 곳이란 의미의 비봉산(飛鳳山)과 죽실리(竹實里)가 정선에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영월의 동쪽에서 흐른다고 해서 東江(동강)으로, 평창에서 내려오는 평창강은 西江(서강)으로 왜곡되었다.

<동강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