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세 번째-2)
(정선읍-어라연, 2019년 4월 27일∼28일)
瓦也 정유순
가수리에는 동강 12경 중 제1경인 가수리 느티나무가 정선초등학교 가수분교 교정에 서 있다. 수령(樹齡) 700년 이상의 이 나무는 지금부터 약 700년 전 가수리에 처음 들어온 강릉 유씨(江陵劉氏)가 심은 나무라고 전해오는데 나무 높이가 40m, 둘레가 8.5m나 된다고 한다. 마을의 도둑도 느티나무를 지키는 신령이 현신하여 도망가게 한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당산목이다. 마을주민들은 해마다 음력 3월이면 마을의 안녕을 위해 당산제를 지낸다.
<가수리 느티나무>
느티나무와 함께 가수리의 상징이 되는 것은 오송정(五松亭)이다. 귤암리 쪽에서 가수리로 들어오면서 만나는 ‘붉은 뼝대(절벽)’ 끝에 선 가수리 오송정은 중국 진시황이 태산을 오르다가 폭우를 잠시 피한 후에 오대부라는 벼슬을 내린 오송정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다섯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는데, 국가의 환난(患難)이 닥칠 때마다 하나씩 죽어가 지금은 두 그루뿐이다. 그중 하나는 천년이 넘은 소나무로 마을의 장구한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가수리 오송정>
가수리를 지나면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다. 신동읍(新東邑)은 북쪽으로 정선읍, 서쪽으로 영월군 영월읍, 남쪽으로 영월군 상동읍, 동쪽으로 남면(南面) 등과 접한다. 조선 중엽에는 평창군 동면이었으나, 1906년 평창군에서 정선군으로 편입되면서 신동면으로 독립하였고, 1980년 12월 읍으로 승격되었다. 8·15광복 직후까지 군내에서 인구가 가장 적어 가구 수 500 내외에 불과했으나, 1948년 석탄공사 함백광업소가 설립되어 석탄개발이 시작되고, 함백선이 개통되면서 급격히 발전하여 신흥 탄광도시가 되었다.
<동강-신동읍>
운치리(雲峙里)는 동강을 따라 형성된 마을로, 신동읍 중에서 가장 넓고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납운돌마을의 운자와 돈이치 마을의 치자를 합해 운치리라 하였다. 또 동강 강물로 인해 물안개가 늘 산마루를 떠돌기 때문에 운치리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골이 깊어 옛날에는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자연마을로는 돈이치, 수동, 점재 등 8개 마을이 있다. 운치리의 수동 섶다리는 동강의 제2경이다.
<동강-신동읍 우치리 지도>
<운치리 수동 섶다리-네이버캡쳐>
운치리에서 고성리로 넘어가는 당목이재 고개에는 나리소전망대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산길을 따라 10분쯤 걸으면 백운산 능선 끝자락을 동강이 휘감고 도는 모습을 만난다. 그곳에는 동강의 물길이 나리소와 바리소라는 두 개의 시퍼런 소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나리소는 물이 깊고 조용한 까닭에 이무기가 살면서 물속을 오간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리고 물에 잠겨 있는 절벽 아래 굴에는 물뱀이 살면서 3∼4월에 용이 되기 위해 운치리 점재 위에 있는 용바우로 오르내렸다고 한다. 나리소와 바리소는 동강의 제3경이다.
<나리소>
태양이 서산마루에 가까워질 무렵 나리소전망대에서 내려와 영월의 장릉으로 이동한다. 장릉(莊陵)은 단종의 무덤이다. 단종이 죽자 살아있는 권력이 무서워 아무도 시신을 수습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이곳 영월 호장 엄흥도가 눈 내리는 밤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가다 보니‘노루 앉은 자리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장릉이다. 매년 4월 말이면 슬픈 사연을 간직한 단종을 기리는 ‘단종문화제’가 이곳 영월에서 큰 행사로 열린다.
<영월 장릉>
곤한 잠을 자고 오늘 첫 발길은 정선군 신동면 고성리에 있는 고성리산성으로 향하기 위해 덕천리 제장마을 입구에서 출발한다. 덕천리(德川里)는 본래 평창군 동면 지역으로 1895년(고종32)에 정선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소골(所洞), 바새, 연포(硯浦), 제장(堤場)마을을 병합하여 큰 산을 뜻하는 덕산과 내(川)의 이름을 따서 덕천리라 하였다. 제장(堤場)마을은 일설에는 큰 장이 서던 곳이라고 하지만, 물굽이에 의해 형성된 지형이 마당처럼 평탄하게 생겼다고 해서 ‘제장’이라고 한다.
<신동읍 덕천리>
강원도 기념물(제68호)로 지정된 고성리산성은 정선의 남쪽에 있으며 동강의 상류가 사행(蛇行)하는 협곡지대의 남쪽 해발 425m의 고성산 정상과 북동(北東) 방향으로 기슭을 에워싼 테뫼식 산성으로 영월에서 정선, 정선에서 신동을 거쳐 태백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에 네 군데로 나누어 축성되었다. 구축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신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산성을 쌓았다고 하나, 축조형태나 석촉(石鏃)과 토기 등 청동기시대 유물이 출토되어 그 이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성리산성과 그 주변은 동강 12경 중 제5경이다.
<고성리산성>
가파른 산성을 숨 가쁘게 오르고 내려와 땀이 속옷을 적시고 한기가 피부를 자극할 때 동강 변에 당도하여 연포마을로 가는 다리를 지난다. 연포(硯浦)마을은 신병산(神屛山)자락에 위치하여 영월군과 경계를 이루고, ‘강물이 벼루에 먹물을 담아 놓은 듯이 베리매 앞 벼랑 아래 강물이 깊고 검어 잔잔하게 보인다’하여 벼루 연(硯)자를 써서 연포라 한다. 베리메는 산굽이의 이곳 방언이다. 그 옛날 마을 앞 강가에서 들리던 떼꾼들의 목소리는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 여름이면 래프팅객들의 고함으로 그 자리를 메운다.
<동강-연포마을>
연포마을에는 옛날 농촌에서 볼 수 있었던 담배건조장이 어려웠던 삶의 기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건조한 잎담배를 정부가 수매하던 시절에 담배 농사는 건조장의 작업과정을 거쳐야만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단층의 농가 건물들 사이에 그보다 훨씬 높았던 담배건조장이 나지막한 농촌의 이정표였다. 이젠 담배 농사를 거두어 실제로 담배 말리는 연기를 볼 수는 없지만, 비바람에 갈라진 담배건조장은 마을의 상징처럼 연포를 지키고 있었다. 연포마을과 담배건조장은 동강의 제7경이다.
<담배건조장-네이버캡쳐>
연포마을을 지나 백운산 하늘 벽 구름다리로 오른다. 동강 래프팅이 한창일 때 래프팅을 하며 강을 에워싼 저 절벽 위를 언제 올라가 볼까 하고 막연히 기다리기도 했던 그 산을 오른다. 연포마을을 지나는데 사과나무는 물기를 머금은 꽃망울이 앙증맞고, 하늘 벽 구름다리 유리 바닥은 아름다운 현기증을 동반한다. 2009년 12월에 탄생한 ‘하늘벽 구름다리’는 연포마을과 제장마을로 이어지는 중간 해발 425m 지점의 뻥대사이에 들어섰다.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동강은 천혜의 절경이로다.
<백운산 하늘벽 구름다리-2015년10월>
몇 구비 고개를 넘으며 가파른 곡예를 한다. 백운산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문희마을 쪽으로 방향을 튼다. 햇빛에 물든 산들은 춘색(春色)이 만연하고, 흐르는 강물은 저마다 전설을 쌓아간다. 내려오는 길에 칠족령(漆足嶺)이 나온다. 칠족령은 정선군 제장마을에서 평창군 미탄마을로 가는 고개로 옛날 선비 집의 개가 발에 옻칠갑을 하고 도망갔는데, 그 자국을 따라 가보니 동강의 장관이 수려하여 옻칠(漆)자와 발족(足)자를 써서 이름이 붙어졌다고 한다. 백운산과 칠족령은 동강 제4경이다.
<제장마을>
<칠족령 안내판>
하늘벽 구름다리에서 바라보면 조물주가 산과 강을 손아귀에 넣고 쥐어짜서 찌그러트려 놓은 것 같다. 산들도 반듯한 게 없고, 강들도 직선이 없다. 대신 강줄기가 휘어드는 곳에는 아름다운 모래톱이 펼쳐졌다. 모래톱 좋은 곳이 바새마을이다. 바새란 모래가 많은 동네란 뜻이라고 한다. 바세마을은 제장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마을 앞으로 모래사장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행정구역 통폐합을 하면서 소사(所沙)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바세마을과 앞 뼝대는 동강 제6경이다.
<동강 뻥대-2015년10월>
산에서 내려와 보니 석회동굴로 유명한 백룡동굴 위를 밟고 내려왔다. 백룡동굴 위로 산성(山城)이 있었다는 푯말도 보였지만 그 흔적은 잘 보이지 않았다. 평창군 미탄면 문희마을에 있는 백룡동굴(천연기념물 260호)은 동강 주변 256개의 동굴 중 관람이 가능한 유일한 석회동굴이다. 1976년 주민 정무룡씨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백운산에 있는 동굴을 정무룡씨’가 발견하였다 하여 ‘백룡동굴’로 이름 지어졌다. 발굴결과 동굴에서 오래전에 사람들이 생활한 흔적이 있다고 한다. 백룡동굴은 동강 제8경이다.
<백룡동굴 매표소>
강물은 행정구역을 가리지 않고 흐른다. 동강 물이 다다른 평창군(平昌郡)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유명해진 곳으로 오대산(五臺山)을 비롯한 백두대간 고산준령의 서쪽에 위치하여 영서지방에 속하나 언어나 풍습은 영동지방과 비슷하다. 동강이 지나는 곳은 평창군 남쪽의 미탄면(美灘面)으로 조선 말엽에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어 미창(米倉)으로 불려오다가 1914년 미탄(美灘)으로 바뀌었다.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盆地)로 군내에서 가장 작고 외지다. 분지 안에는 비교적 평탄지가 넓은 창리(倉里)가 있어 면의 중심지를 이룬다.
<동강-미탄면 창리>
동강 제9경인 <황새여울과 바위들>은 미탄면 마하리 문희마을 하류 쪽에 있다. 문희마을은 인적 드문 오지 마을이며 동강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간직한 곳으로, 마을을 지키던 개의 이름이 문희여서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황새여울은 물살이 센 여울목에 뾰족한 바위들이 널려 있어 바위에 부딪히는 물고기를 먹이로 얻기 위해 황새들이 몰려들었다고 하여 얻은 이름이다. 황새여울의 물소리는 이곳에서 변을 당한 땟목부부의 슬픈 전설을 안은 채 조용히 흐르기만 하고, 강 가운데 하얀 바위는 이들 부부의 육신 같다.
<황새여울>
<동강-하얀바위>
황새여울에서 2㎞ 남짓 떨어진 곳에는 안돌바위가 있다. 옛날 뗏목으로 나무를 운반하던 시절 뗏목을 타고 내려오던 낭군이 황새여울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고 물속으로 떠내려가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자, 부인이 남편을 찾아 황새여울로 오던 중 안돌바위를 안고 건너가려다가 물에 빠져 떼꾼 남편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들 부부의 넋을 기리고자 마을 사람들이 위령비를 세웠다. 이 바위 위에 동전을 던지고, 손을 대고 기도를 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뗏군부부위령비>
미탄면 마하리에서 미리 주문한 도시락으로 오전을 마감하고 엊그제 내린 비로 범람한 창리천(기화천)을 허벅지까지 바지를 걷고 맨발로 물을 건넌다. 찬물은 발끝이 닿는 순간 머리털이 하늘로 솟구친다. 창리천(倉里川)은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1,256m)에서 발원하여 동강으로 흐르는 폭이 좁은 계곡으로 미탄면 마하리에서 동강에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강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흐르다가 샘물이 솟아 한겨울에도 얼지 않으며 인근에는 1965년 우리나라 최초로 송어양식에 성공한 국내 최대 송어양식장이 있다.
<창리천 맨발 도하>
창리천을 지나 험한 벼랑길을 곡예(曲藝) 하듯 넘으면 평창군을 벗어나 영월읍 문산리다. 동강은 뻥대(절벽)가 발달하여 길 찾기가 힘들다. 갯버들 꽃가루 날리는 사이로 절벽을 탄다. 물길이 범람한 곳에는 나뭇가지마다 떠내려온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걸려 넘쳐난다. 그렇게 예쁘게만 보이던 단애(斷崖)도 지친 몸에는 위험한 흉기로 보인다. 이때 함께한 도반 바우(별명)님의 테너 열창 ‘떠나가는 배’가 한순간의 긴장을 씻어 준다.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바람을 안고서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곳이 어디메뇨
강남 길로 해남 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 너머로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
<동강-영월읍 문산리>
어느 정도 긴장을 풀고 10여m 벼랑을 외줄 타기로 내려와 발 디디는 순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옥죄었던 공포는 떠나가는 배처럼 사라지고 강변의 아름다운 자연에 방긋 웃는다. 영월읍 문산리(文山里) 그무마을에서 동강 물길을 3km쯤 따라 내려가면 동강 물길의 수많은 바위 가운데 떡 버티고 앉아있는 두꺼비바위를 만난다. 마치 살아있는 듯한 이 두꺼비바위는 바위 앞뒤로 길게 이어지는 모래밭과 강 건너편의 거무스레한 뼝대와 조화를 이뤄 동강 제10경이다.
<두꺼비바위-네이버캡쳐>
영월읍 문산리는 예전에 나룻배를 타고 동강을 건너야만 했으나 지금은 문산교(文山橋)가 놓이고 그 아래로 동강이 흐른다. 뱀처럼 구불대며 흐르는 강물은 어라연(魚羅淵)을 겨드랑이 속에 숨겨두고 석양이 비치는 동강 변은 빛과 그림자의 명암이 더 선명하다. 동강∼! 그간 질곡의 세월을 감내했듯이 앞으로도 꿋꿋하게 변함없이, 자연이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영원하기를 빌 뿐이다.
<동강의 오후-2015년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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