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길-태·강릉 숲길
(2019년 11월 26일)
瓦也 정유순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는 태릉과 강릉이 있다. 공릉동(孔陵洞)의 동명은 1963년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 성북구로 편입될 때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를 공덕동으로 개칭하면서, 이때 마포구의 공덕동과 동명이 같으므로 처음에는 태릉동(泰陵洞)으로 정했으나 공덕리 주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공덕리의 ‘孔’자와 동쪽 태릉의 ‘陵’자를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1973년 7월 도봉구가 신설되면서 도봉구에 속했다가 1988년 1월 노원구가 신설되면서 노원구에 소속되어 오늘에 이른다.
오늘의 출발점은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이다. 6호선 건설계획 때는 태릉앞역이라고 이름 붙였다가 인근에 육군사관학교가 있어 화랑대로 변경되었다. 화랑대역을 출발하여 경춘선 숲길을 따라 구 화랑대역을 경유 한다. 경춘선 숲길은 2010년 12월 열차 운행이 중단된 경춘선 옛 기찻길과 구조물을 보존해 철길의 흔적을 살리고 단절된 지역들을 공동체 공간으로 연결하는 시민의 길이다.
구 화랑대역의 이름은 1939년 경춘선(성동∼춘천) 개통과 함께 <태릉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나, 1958년 육사가 들어선 후 육사의 교정이 <화랑대>로 명명되면서 역 이름도 화랑대역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금은 폐역이 된 화랑대역사(驛舍)는 근대 건축양식의 목조건축물 등록문화재로 지정(제300호)되었으며, 이 역은 ‘경춘선 숲길’의 중심이 된다.
화랑(花郞)은 신라 진흥왕 때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취지 아래 수려한 용모와 교양이 탁월한 귀족의 자녀들을 선발하여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호연지기(浩然之氣)와 함께 실천하여 청소년들의 심신을 단련하는 교육제도다. 남자를 화랑(花郞), 여자를 원화(源花)라 불렀으며, 지인용(智仁勇)이 함축된 화랑정신을 육사생도들로 하여금 계승 발전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 본다.
태릉은 왕릉보다 각종 체육시설이 완비된 태릉선수촌으로 더 유명한, 조선 왕릉이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바람에 더 이상 확장이 어렵게 되자 2011년 10월 충북 진천에 제2 선수촌을 건립하였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태릉 일대가 개발되기 전에는 먹골배가 유명하였고, 갈비집이 진을 치던 곳으로 젊은이들의 산책코스로 사랑을 받던 곳이었다.
화랑로를 걸어서 입장 절차를 밟고 태릉구내로 들어와 처음 들른 곳은 <조선왕릉전시관>이다. 태릉과 강릉을 잇는 산책로는 일 년에 봄과 가을로 두 번 개방하고 있다. 개방 시기는 4월에서 5월까지는 오전 9시부터 17시 30분까지, 10월은 오전 9시부터 17시 30분까지이며 11월은 오전 9시부터 17시까지다.
왕릉전시관에는 국장 절차와 조선 왕릉에 담긴 역사와 문화, 산릉제례(山陵祭禮)를 포함한 왕릉의 관리, 그리고 전시관이 위치한 태릉과 강릉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들이 거의 훼손 없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예는 세계적으로 조선 왕릉이 유일하다.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학술적·문화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태릉(泰陵)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의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1501~1565)의 무덤이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중종 옆에 묻힐 요량으로 장경왕후의 능[희릉(禧陵)] 옆에 있었던 중종의 정릉(靖陵)을 풍수지리가 안 좋다 하여 경기도 고양에서 서울 강남구 선릉(宣陵) 옆으로 옮겼다. 그러나 아들 명종이 장마철에 물이 들어온다는 명분을 대고 태릉에 안장해 그녀의 뜻은 무산된다.
태릉의 능제(陵制)는 국조오례의식(國朝五禮儀式)에 따랐다고 하지만, 왕비의 단릉(單陵)이라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능으로,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봉분을 감싼 12면 병풍석에는 12지신상과 구름 문양을 새겼고,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 중앙에 12간지를 문자로 새겼다. 봉분 바깥쪽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봉분 앞에 혼유석과 망주석 1쌍을 세웠다.
봉분 주위로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으며, 뒤쪽으로는 곡장(曲墻)을 쌓았다. 봉분 아랫단에 문인석과 석마(石馬) 각 1쌍, 팔각 장명등이 있고, 가장 아랫단에 무인석과 석마 각 1쌍이 있다. 능원 밑에는 정자각·비각·수직방(守直房)·홍살문이 있다. 임진왜란 때는 능침 안에 금은보화가 많다는 소문으로 1593년 1월 왜군이 기마병 50명을 동원해 도굴하려 했으나, 회(灰)가 너무 단단해서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문정왕후는 중종과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왕비와 대비로 있으면서 정권에 개입하는 등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조선을 회오리바람 속으로 몰아넣은 인물이다. 우선 문정왕후와 관련된 정난정(鄭蘭貞)의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다. 그녀의 아버지 정윤겸(鄭允謙)은 부총관이었고, 어머니는 관비 출신이었다. 정난정은 신분 반전을 위해 우선 기생이 되어 문정왕후와 남매인 윤원형(尹元衡)의 첩이 되었다. 마침 명종이 12세에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자 모든 실권이 윤원형 쪽으로 쏠린다.
인종(仁宗)이 승하하자 윤원형은 인종의 외척(外戚) 윤임(尹任)이 봉성군(鳳城君)에게 왕위를 주려 한다고 무고한다. 이는 인종의 외척인 대윤과 문정왕후 친정세력인 소윤의 권력 다툼으로 을사사화로 비화(飛火)되어 결국 윤임 등 대윤세력이 제거된다. 이때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 김씨를 몰아내어 적처(嫡妻)가 되고,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商權)을 장악해 부를 축적한다. 그리고 문정왕후의 신임으로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했고, 1553년에는 종1품 정경부인이 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 인물이다.
능침 위로는 울타리가 낮게 쳐 있어 올라가지 못하고 멀리서 눈요기만 하다가 뒤돌아 나와 태릉의 동쪽에 있는 숲길을 거닐어 강릉으로 향한다. 강릉(康陵)은 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조선 제13대 왕 명종(明宗, 재위 1545∼1567)과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능으로 태릉과 함께 사적(제201호, 1970년 5월 26일)으로 지정되었다.
명종은 1534년(중종 29)에 태어났으며 1545년 인종이 8개월 만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8년 동안 수렴청정하였고 1567년(명종22) 경복궁 양심당(養心堂)에서 34세로 죽었다. 왕비 인순왕후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로 1532년(중종27)에 태어나 1545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575년(선조8)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서 운명했다. 명종이 죽자 이곳을 능지로 삼았으며, 인순왕후 능도 왕의 능과 함께 국조오례의식(國朝五禮儀式)에 따라 나란히 앉혀 쌍릉을 이루었다.
어린 나이에 주상에 오른 명종은 재위 기간 내내 문정왕후의 섭정과 외숙 윤원형의 국정농단에 벙어리냉가슴을 앓아야 했다. 윤원형은 명종이 즉위한 때부터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기까지(명종 20) 20년 동안 그야말로 권력을 독점했다. 그는 이조판서(1548년, 명종 3)·우의정(1551년, 명종 6)을 거쳐 영의정(1563년, 명종 18)에 올랐고, 윤원형의 권력은 국왕을 능가할 정도였다. 윤원형은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문정왕후와 내통해 명종을 위협하고 제재하였다.
사관의 기록에는 문정왕후는 “명종이 조금이라도 내키지 않은 기색이 보이면 ‘나와 외척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면서,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하였다. 왕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後苑)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가끔은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주상이 심열증을 얻은 것 또한 이 때문이다”라고 되어있다. 이는 그녀의 강한 기질과 월권을 잘 보여준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즉시 윤원형을 강력히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이에 명종은 즉시 윤원형과 정난정을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유배를 보냈다. 또한 정난정이 윤원형의 전처 독살사건이 불거져 사사될 위기에 처하자 부부가 함께 음독자살하였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는 동안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의적(義賊) 임꺽정(林巨正)이 출현하여 평안도까지 세력을 펼쳤다고 한다.
강릉을 나오면 바로 삼육대학교 정문이다. 삼육대학교는 1906년 제7일 안식일예수재림교에서 평안남도 순안에 설립한 의명(義明)학교가 전신이다. 교훈은 진리·사랑·봉사다. 1942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되었다가 1947년 제7일 안식일예수재림교 조선합회신학교로 다시 개교하고 1951년 삼육신학원으로 개칭하였다. 1961년 정규 4년제 대학인 삼육신학대학으로, 1966년 삼육대학, 1992년 삼육대학교로 개칭하였다.
삼육대학교 뒤에는 제명호라는 아담한 호수가 나온다. 제명호의 ‘제명’은 James. M. Lee목사의 한국식 이름이다. 1912년에 부친이 선교사 활동을 하고 있는 평남 순안 의명학교에서 태어났다. 평생 한국의 교육과 선교를 위해 봉사한 그는 1947년 현재의 삼육대학교 부지를 마련하는 등 학교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이 호수는 그의 교섭으로 미군 장비가 동원되어 1953년에 만들어졌다 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제명호’라 하였다.
제명호에서 숲길을 따라 불암산능선에 올라서면 불암산 정상이 보인다. 불암산(佛巖山, 509.7m)은 큰 바위로 된 정상의 봉우리가 마치 납의(衲衣)를 입은 승려의 송낙(松蘿)을 쓴 부처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천보산(天寶山)이라고도 한다. 또한 불암산은 서울 노원구와 남양주시 별내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원래 ‘필암산(筆巖山)’이라고도 하였으며, 먹골[墨洞]∙벼루말[硯村]과 함께 필(筆)·묵(墨)·현(硯)으로 지기(地氣)를 꺾는다는 풍수지리(風水地理)적 의미가 있다고 한다.
삼육대학교 정문부터 제명호를 경유하여 불암산 방향으로 올라가는 숲길은 서울특별시와 삼육대학교가 지원하고 노원구가 조성한 주민 쉼터로 지역주민에게 명상과 산책 공간으로 제공되고 있다. 불암산 능선에서 서울둘레길로 접어들어 완만한 능선을 따라 쭉 내려오면 휴전선 보다 더 견고하게 쳐져있는 철조망이 보인다. 조그마한 푯말에는 모 공기업의 인재개발원이라고 쓰여 있다. 계속하여 내려오니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가 보이는 공릉산백세문(孔陵山百歲門)을 지나 지하철 7호선 공릉역에서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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