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비내길과 반기문 비채길
(2019년 12월 7일)
瓦也 정유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여 중원(中原) 땅으로 불리었으며, 남한강을 끼고 있는 삼국시대 요충지로 중원 땅을 차지하는 국가가 강성했던 상징의 땅이 충주(忠州)였다. 또한 충주(忠州)의 충(忠)은 한반도에서 삼국의 중심(中心)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고구려가 차지했을 때에는 ‘국가의 근본’이라는 뜻의 국원(國原)으로 불리었던 지역이다.
<충주시 지도>
이러한 충주에는 중원문화길, 새재넘어 소조령길, 반기문꿈자람길, 대몽항쟁길, 종댕이길, 하늘재길, 사래실가는길, 비내길 등 ‘충주풍경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중 충주시 앙성면에 있는 비내길과 음성에 있는 반기문비채길 찾아 길을 나선다. 먼저 비내길을 가기 위해 앙성면 조천리 의병대장 조웅장군 묘소 입구에서 출발한다. 앙성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앙암면(仰岩面)과 복성면(福城面)을 통합하여 앙성면(仰城面)이 되었다.
<충주비내길 행보도>
충주 가흥리에서 출생한 조웅(趙熊, ?∼1592)은 뛰어난 무예로 1591년(선조 24)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落鄕)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신립(申砬)이 충주 탄금대에서 패배하는 것을 보고 각 지방에 격문을 띄워 500여 명의 의병으로 북상하는 왜적의 후속부대를 물리쳤다. 조웅은 모든 기치(旗幟)를 흰색으로 하여 사람들이 백기장군(白旗將軍)이라 하였고, 전공(戰功)으로 충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 전에 전사하였으며, 영남의 홍의장군 곽재우와 더불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백기당조웅장군묘소입구>
조천마을에서 길이 아닌 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가 보도교를 건너면 비내섬이다. 비내섬은 태백시 금대봉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흘러 내려오는 남한강을 타고 켜켜이 쌓여온 토사가 이루어진 섬이며 일종의 하중도(河中島)로 아주 비옥한 땅이다. 비옥한 땅에서 자란 갈대를 ‘비내ㄴ다(베어낸다)’는 어원에서 ‘비내도’가 되었다고 한다. 섬 안에는 억새와 갈대뿐만 아니라 다른 식물들이 여름 잔치를 끝내고 긴 겨울잠으로 빠져들어 조금은 삭막하다.
<비내섬 보도교>
<비내섬 억새>
비내섬은 물가를 따라 버드나무 군락지가 있지만 무성했던 잎은 지고 앙상한 가지만 길게 늘어진다. 강바람에 날리다 지친 갈대와 억새의 씨앗들은 갈 곳을 몰라 어미 풀을 휘어잡고 미동도 없다. 사람 키보다 더 큰 갈대밭 사이로 고니의 애잔한 울음소리가 발목을 잡는다. 남한강 변으로는 겨울의 진객 고니[백조(白鳥)]가 노니는 순간 백수광부(白首狂夫)의 아내가 불렀다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가 불현듯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公無渡河, 공무도하)
임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公竟渡河, 공경도하)
물에 빠져 죽었으니,(墮河而死, 타하이사)
장차 임을 어이할꼬.(當奈公何, 당내공하)
저 울음소리는 혹시 목놓아 울던 부인 여옥(麗玉)의 목소리는 아닐까?
<남한강의 고니>
넓은 갈대밭과 억새밭과 자갈밭도 있다. 생태교란종 가시박은 다른 수목(樹木)을 질식하게 껴안고 잔치가 끝난 시골집 마당처럼 공허함을 연상케 한다. 흐르는 강물은 말이 없지만 한강의 역사는 흘러내려 오는 토사처럼 이 비내섬에 켜켜이 쌓이고 또 쌓는다. 눈부시게 하얀 억새꽃이 바람에 일렁일 때 으악새 우는 소리 들으며 수초 사이로 거미줄처럼 뻗은 샛길을 따라 슬렁슬렁 걷기에 그만이다. 섬 가장자리 여울에서 물질하는 오리들을 바라보며 내 마음도 저 강물 위에 띄워본다.
<비내섬 가시박>
사극과 영화 등 촬영지로 이용되는 비내섬은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약 850여 종의 생물이 모여 사는 생태계의 보고다. 더욱이 호사비오리와 단양쑥부쟁이 등 15종의 멸종위기생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국립환경과학원에서 조사되어 충주시는 생태습지 보호구역으로 지정하려고 추진하고 있으나 비내섬 전체 면적 19만 평 가운데 3만여 평이 한·미 군사훈련지역으로 되어 있어 미군의 반대로 난항을 겪고 있는 것 같다.
<비내섬 산책로>
비내섬을 느린 걸음으로 돌아보고 고니가 대신 불러주는 여옥(麗玉)의 혼의 소리를 뒤로하고 비내길로 접어든다. 비내길에는 충주 출신 시인 신경림(申庚林, 1936∼ )의 시화 판이 설치되어 있다. 그의 작품 중에서 ‘길, 달래강 옛 나루에, 그림, 목계장터’ 등 글과 그림으로 작품화한 시화 판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특히 1987년에 발표된 장편시집인 <남한강>은 농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 시도로서, 서사적인 스케일을 보여주는 방대한 작품이다. 그의 시는 농민의 고달픔을 다루면서도 항상 따뜻하고 잔잔한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신경림의 시화판>
불과 100여 년 전만 먼 해도 경향(京鄕)으로 오고 갈 배들로 분주했을 남한강 변 나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곳 출신 신경림은 <목계장터>라는 시 첫 연에서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이하생략) 육상교통의 발달로 쇠락해 버린 뱃길을 바라보고, 구름과 바람이 되어 흩어지는 세상인심을 바라보며 남한강의 서정과 서민들의 심정을 독백처럼 읊조렸다.
<남한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앙성천(仰城川) 합류하는 지점 봉황섬에는 초목들이 밀림을 이룬다. 저 숲속에도 수많은 생명이 저마다 ‘존재의 가치’를 실현하며 공존(共存)하는 평화의 세상일까? 뭇 생명들의 어울림은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철새 전망대공원을 돌아서면 앙성면 용포리 둔터고개에서 발원하여 능암리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앙성천이 나온다.
<앙성천>
앙성천 하구의 비내길 전망대 앞에는 커다란 수탉벼슬처럼 생긴 바위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 바위는 먼 옛날 마고(麻姑)할미가 수정을 치마에 싸서 들고 가다가 실수로 떨어뜨려 생긴 바위라고 전해온다. 그래서 그런지 바위의 영험이 있어 예로부터 벼슬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찾아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바위에는 김씨 처녀의 소원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정승까지 지낸 조선비와의 애틋한 사랑이 수정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봉황산 벼슬바위>
벼슬바위 아래로 앙성천 안길을 따라나선다. 천변 둑에는 사과나무가 겨울 전지(剪枝)를 끝내고 밑둥에는 냉해방지를 위해 짚단으로 감싸주었다. 짚단으로 사과나무 가지랭이를 감싸준 것은 내년의 풍요를 기약하는 저축이리라. 능암리(陵岩里)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인 능동(陵洞)과 죽암리(竹岩里)가 통합되면서‘능암(陵岩)’이 되었다. 탄산 온천이 있어 매년 9월에 앙성탄산온천휴양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앙성천 뚝방 사과밭>
<앙성면 능암리>
오후에는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당저수지 보덕산 입구 반기문비채길로 이동한다. 반기문 비채길은 하늘길(8.5㎞), 빛의 길(2㎞), 땅길(9㎞)이라는 3개 테마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태어난 음성군 원남면 상당1리 행치마을과 보덕산에 얽힌 전설을 바탕으로 반기문 생가와 반기문 기념관, 반기문 평화 랜드 등 기존의 자원을 특성에 맞게 연계시키고 있다. ‘비채’는 ‘비움과 채움’을 뜻한다.
<보덕산 임도>
<보덕산 임도정상>
오늘은 하늘길 중 중간지점인 하당저수지에서 출발한다. 보덕산 올라가는 길은 임도로 조성되어 있어 좀 수월하다. 그러나 산길이란 오르내리는 것이거늘 쉽다고는 볼 수 없다. 높은 산이던 낮은 산이던 올라갈 때는 용기(勇氣)가 더 필요하고, 내려올 때는 지혜(智惠)가 더 필요한 것을… 임도 고갯마루 정상에서 왼쪽 산길로 큰 숨을 몰아쉬며 보덕산 정상에 다다른다. 보덕산(保德山, 510m)은 원남면 동부의 평야 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서쪽을 바라보면 크게 보이는 산이므로 이곳 사람들은 큰산으로 부른다.
<비채길(하당저수지-보덕산-반기문생가)>
그리고 속리산에서 분기(分岐)하여 괴산을 거쳐 음성을 관통하는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의 구간인 백마산∼보천고개∼행치재∼보덕산(큰산)∼보현산으로 이어진다. 보덕산 정상의 정자에 오르면 음성읍과 원남면 일대가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멀리 충북의 혁신도시 증평이 보인다고 하는데 김장배추에 소금 절이듯 뿌려지는 싸락눈으로 시야가 멀리 가지 못한다. 정상에는 통신중계탑이 자리하고 전망대가 있으며, 귀퉁이에는 국토측량의 기준이 되는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보덕산 정상>
<보덕산 정자>
<보덕산 삼각점>
내려올 때는 보덕산에서 반기문생가가 있는 원남면 상당리 행치마을로 내려오는 길인 ‘빛의 길’ 구간을 따라 내려온다. 비록 2㎞의 짧은 구간이지만 내려오는 길은 올라올 때 보다 상당히 가파른 길로 주의가 필요하다. 내려오는 상당 부분은 밧줄과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몸을 의탁한다. 마을 어귀에 다다르면 먼저 반기문평화랜드가 기다린다. 평화랜드는 중앙의 상징탑을 중심으로 중앙에는 세계지도와 당시의 유엔가입 192개국의 국기가 새겨져 있다. 좌우 벽에는 이력사항과 활동 사항 등을 새겨 놓았다.
<반기문평화랜드>
반기문(潘基文, 1944. 6. 13∼ )은 충주고등학교 2학년 때 ‘외국학생의 미국 방문 프로그램(VISTA)’에 선발되어, 3학년 때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때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보고 외교관의 꿈을 처음 갖게 되었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진학하였다. 1970년 2월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5월 외무부에 들어갔다. 외무부에 재직 중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에 유학하여 1985년 4월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평화랜드의 반기문 이력사항>
1972년 주뉴델리 부영사를 시작으로 1990년 외무부 미주국장, 1992년 외무부 장관 특별보좌관, 1996년 외무부 제1차관보와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 수석비서관, 2000년 외교통상부 차관, 2002년 외교부 본부대사, 2003년 대통령비서실 외교보좌관을 거쳐 2004년 제33대 외교통상부 장관이 되었고, 재직 중인 2006년 10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이로써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유엔 사무총장이 되었으며, 2012년 연임되어 2016년 12월에 임기를 마친다.
<반기문>
평화랜드 마당을 거쳐 경로당과 광주반씨 장절공파 숭모재(崇慕齋)를 지나면 반기문생가가 나온다. 생가는 초가 4칸 반이고, 주변으로 쟁기·지게·탈곡기 등 각종 옛 농기구 소품을 정성껏 비치해 놓았지만, 새로 개축(改築)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 고풍스러운 옛맛은 우러나지 않는다. 새로 신축한 반기문기념관과 유엔평화기념관도 화려한 만큼 어색함도 비례한다.
<반기문 생가>
반기문평화기념관은 유엔의 정신과 반기문 제8대 유엔사무총장의 활동과 업적을 기리고 더 나아가 미래의 글로벌리더들이 될 청소년들에게 꿈과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설립되었다. 이 기념관은 대지 7,803㎡, 건축면적 2,856㎡ 규모로 세계 다양한 문화와 유엔 그리고 반기문에 대한 내용을 예술·놀이·체험·교육 등 다각적인 분야를 접목하여 참여형 전시로 구성하였으며, 다목적실과 휴게공간을 두루 갖추어 복합문화힐링공간으로 조성하였다.
<반기문 생가, 기념관, 평화기념관 지도>
<반기문평화기념관 입구>
<평화기념관 배치도>
행치(杏峙)마을은 보덕산 정기를 받아 봄이면 살구꽃이 만개하여 ‘살구꽃 고개’라는 의미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살구꽃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삼신(天神, 地神, 明神)이 살았다 하여 보덕산을 삼신산(三神山)으로도 부른다. 보덕(普德)이라는 이름도 여러 번의 난리 통에도 마을 사람들이 희생되거나 다친 사람이 없는 것은 이 산의 큰 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삼신산의 정기를 받은 행치마을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큰 인물이 나올 것이고, 큰 부자와 큰 장수가 태어난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삼신산(보덕산)과 반기문생가>
그리고 태백산이 여자가 성하는 산이라면 보덕산은 남자가 성하는 산으로 여겨 찾아오는 사람들이 삼신산의 정기를 받아 득남하기를 기원한다고 한다. 행치고개는 한강과 금강의 분수령(分水嶺)으로 일명 한금령으로도 불린다. 실제로 고개에는 수백 년 묵은 살구나무가 있어서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섬기고 정월 대보름 밤이면 많은 사람이 찾아와 정한수 올려놓고 소원을 빌었다고 하는데, 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살구나무가 없어졌다고 한다.
<행치마을>
행치마을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이곳에서 태어난 반기문이 제8대 유엔사무총장으로 출현하면서부터다. 세계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유엔 사무총장이 되면서 사람들이 마을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조용한 농촌 마을에 외지인이 몰리면서 그들을 위한 공사가 진행됐다. 생가복원, 기념관, 연못, 주차장, 공원 등이 조성되면서 최고로 기뻐하고 환영했던 마을 주민들이 공유하던 추억은 하나둘씩 벗겨져 나간다. 그러나 반기문은 예나 지금이나 이곳에 살지 않고, 그의 명성만이 마을의 옛 정취를 바꾸고 있다.
<광주반씨 장절공파 숭모재 삼문>
더불어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마을은 급변하기 시작하여 옛 모습과 정취는 마을 사람들의 추억 속에만 남아있다. 이 마을의 주인공은 주민이 아니라 이곳을 찾아오는 외지인들이다. 마을과 산줄기는 자연과 사람이 서로 부둥켜안고 함께 노는 공간이자 과거를 공유하는 타임머신이다. 그래서 마을의 옛 모습을 찾고 끊어진 추억을 이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혁신도 중요하지만, 옛것을 익히고 지키면서 새것을 받아들이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평화기념관 안의 지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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