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열 번째-4)

와야 정유순 2019. 12. 2. 13:00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열 번째-4)

(팔당댐가양대교, 2019112324)

瓦也 정유순

   응봉산을 지나면 옛날 대장간이 많아서 동네 이름이 금호동(金湖洞)이 되었고, <옥정수>라는 유명한 우물이 있어서 <옥정숫골>로 불리다가 동네 이름이 된 옥수동(玉水洞)이 있다. 한때는 소형 주택들이 금호동과 옥수동 일대를 다닥다닥 붙은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였으나, 지금은 재개발되어 서울에서 조망(眺望)이 좋은 명소로 자리 잡았다. 지하철 3호선과 경의중앙선 옥수역이 생기면서 교통도 사통팔달이 되었다.

<옥수역>


   강남구 압구정동과 성동구 옥수동을 연결하는 동호대교(東湖大橋)는 길이는 1,095m. 너비는 35m이며 한남대교와 성수대교 사이에 있는 연속 트러스교이다. 19806월에 착공하여 198522일에 개통되었다. 다리 가운데로 폭 11m의 지하철 3호선 전철교가 지나고, 각각 2차선으로 된 도로교가 그 양옆으로 난 복합교량인데, 인도 폭은 5m이다. 이 다리와 함께 장충체육관금호동동호대교압구정동도산대로에 이르는, 길이 5.11km의 동호로도 개통되어, 강남·북이 연결되어 있다.

<동호대교와 옥수동>


   도산대로에는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선생의 묘역이 있는 도산공원(島山公園)이 있다. 1973년 도산 안창호의 애국정신과 교육정신을 기리고자 조성된 공원으로 면적은 29,974이다. 안창호와 부인 이혜련의 합장묘소, 도산의 동상과 기념관, 도산어록(語錄), 체육시설 등이 있다. 매년 310일 흥사단과 도산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추모 기념행사가 열린다. 기념관에는 사진과 미국에 있을 때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로부터 받은 편지 19, 도산일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도산근린공원 지도>

<도산공원 입구-네이버캡쳐>


   동호대교를 지나 조금 하류로 내려오면 강남구 신사동과 용산구 한남동을 연결하는 한남대교가 나온다. 한때는 한강에 세 번째로 놓여 제3한강교로 불리었고, 혜은이가 부른 3한강교라는 가요로 더 유명해진 다리다. 그리고 이 다리가 개통됨에 따라 영동(永東)이라는 신도시의 개발이 촉진되었고,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의 관문이다. 한남동은 남쪽에 한강이 흐르고 서북쪽으로 남산이 있어 한강의 자와 남산의 자를 따서 한남동(漢南洞)이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에는 광진교를 한강의 대교로 치지 않은 것 같다.

<한강과 한남동>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와 서초구는 서울에서 집값이 가장 비싸고 명문고등학교들이 많이 이전해와 강남 8학군으로 유명해진 영동이다. 영동(永東)영등포의 동쪽이라는 의미다. 이곳의 땅이 서울시로 편입되기 전에는 대부분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언주면(彦州面) 땅으로 전형적인 농업지역이었으며, 한강 변으로는 참게와 민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던 내수면 어부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강남의 옛 언주면 지역>

 

   강북으로는 한남동을 지나면 바로 보광동이다. 보광동(普光洞)은 진흥왕 때 보광국사 (普光國師)가 세운 절 이름을 따서 얻은 이름이다. 이 절은 조선 후기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가을에 국운을 비는 제사를 지낸 곳이다. 보광동에는 웃당과 아랫당이라는 당집이 있는데, 웃당은 신라 김유신장군에게 매년 정월 초하루에 종친회에서 제사를 지내고, 아랫당에서는 중국 제갈량(諸葛亮)에게 음력 3월과 10월 초하루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한강과 보광동>


   보광동을 지나면 동빙고동과 서빙고동이 연이어 있고, 잠수교와 함께 2층으로 된 반포대교가 나온다. 반포대교 북단이 지금의 서빙고동이다. 동빙고(東氷庫)1396(태조5) 지금의 옥수동에 처음 설치되었고, 1504(연산군10) 서빙고 남쪽으로 이전하였다가 1898년에 폐지되었다. 서빙고(西氷庫)도 동빙고와 함께 지금의 서빙고동파출소 부근에 설치되었다가 1896년에 폐지되었다. 저장된 얼음은 궁중 내의 각 전(殿)과 관아에 공급하고, 관리들에게는 벼슬에 따라 차이를 두고 배급하였다고 한다.

<잠수교와 반포대교>


   반포대교 남단에는 서초구 반포동(盤浦洞)이다. 이곳은 비가 오면 상습홍수피해 지역이라서 반포라 했다는 설과, 옛날에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흘렀다고 하여 한자로 반포(蟠浦)라고 쓰다가 반포(盤浦)로 변형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모래땅에 땅콩 농사를 짓던 넓은 밭이었는데, 서울 동대문 옆에 있던 고속버스터미널이 이곳으로 이전하였고, 고급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또 다른 서울의 관문이 되었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네이버 두산백과>


   반포대교 남단 한강에는 서울특별시에서 20069월에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로 추진한 세 개의 떠 있는 섬(Floating Island) ‘세빛둥둥섬이 있다. 한글 명칭의 세빛은 서로 그 빛을 겹칠 때 가장 많은 색깔을 만들어내는 빛의 삼원색 빨강·파랑·초록처럼 3개의 섬이 조화를 이루어 한강과 서울을 빛내라는 바람을 담고 있고, ‘둥둥은 수상에 띄워진 문화공간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3개의 섬은 제1(비스타), 2(비바), 3(테라)으로 구분하고, 서로 도교(渡橋)로 연결하였다.

<세빛 둥둥섬>


   둥둥섬 옆에는 인공으로 만든 서래섬이 있다. 이 섬은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올림픽대로 건설 및 한강 종합개발 시 조성한 인공섬으로서 3개의 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또 물길을 따라 수양버들이 잘 드리워져 있고 봄이면 유채꽃이,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하는 시민휴식공간으로 화훼단지, 수상스키장 등이 조성되어 있으며, 겨울 진객 철새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서래섬 버드나무>

<서래섬 지도>


   서래섬을 나와 반포천과 합류하는 지점 위로 지하철 4호선 동작역과 동작대교가 놓여 있다. 198411월에 개통된 동작대교(銅雀大橋)는 용산구 이촌동과 서초구 반포동을 연결하는 한강 11번째 대교이며, 도로교와 지하철4호선 전철교의 복합교량이다. 조선 시대 한양을 오가는 동작나루가 있어서 교량 이름을 동작대교라고 하였다. 동작대교의 특이한 점은 남단이나 북단이 직선으로 연결되지 않고 기존의 도로에 곡선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남단은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막혀 있고, 북단은 미군기지에 막혀 있었다.

<동작대교>

<동작대교 전망대>


   동작동 국립현충원은 관악산 맥()이 힘차게 뻗어 내려오다 서달산에서 뭉친 정기(精氣)가 한강을 향해 치맛자락으로 포근하게 감싸 안은 듯한 지형으로 국가와 민족을 향해 헌신한 영령(英靈)들이 잠든 곳이다. 지세형국은 공작새가 아름다운 날개를 펴고 있는 공작장비형(孔雀張飛形)이며 또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이라고도 하다. 규모는 143의 면적에 4분의 대통령과 172000여 영령들이 안장되었다고는 하나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들이 묻혀 있기도 하다.

<현충문 후면>


   해방 후 서울의 장충단공원 내의 장충사 등 여러 곳에 분산하여 모시던 것을, 1955715일 국군묘지로 창설되어 전사 또는 순직군인과 군무원 및 종군자의 영현을 안장하였으나, 10년 후인 1965330일 국립묘지로 승격되어 국가원수, 애국지사, 순국선열을 비롯하여 국가유공자, 경찰관, 전투에 참가한 향토예비군 등이 추가 안장되었다. 199661일 국립묘지관리소라는 관리기관 명칭이 국립현충원으로 변경되었고, 2006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변경되었다.

<현충원 국립묘지>


   동작동 고개 넘으면 흑석동이다. 흑석동은 243번지 일대에서 검은색 돌이 나왔다고 하여 지명을 검은돌 이라고 했고, 이것을 한자로 바꿔 흑석(黑石)이 되었다. 1933년 중앙대학교가 흑석동에 자리를 잡은 뒤 중앙대학교와 함께 발전해 왔다. 관내 주거시설과 상업 시설의 상당수는 중앙대학교 학생들이 이용한다. 2005년 뉴타운 조성으로 기존 주택이 철거되자 중앙대 주변의 자취생들이 살 곳을 구하지 못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이 한강 경치에 반해 마을 이름을 명수대(明水臺)로 부르기도 했다.

<흑석동 지도>

<흑석동 강변길>


   한강의 남안(南岸)을 따라 동·서로 길게 늘어선 다리가 노량대교(鷺梁大橋). 86 서울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대회를 앞두고 동작구 동작동(銅雀洞)과 노량진동(鷺粱津洞) 사이의 올림픽대로 확장이 어렵게 되자 한강 변을 따라 놓은 다리로 길이 2,070m1986년에 준공되었다. 이 다리의 건설로 김포공항~잠실종합경기장 간의 주행시간을 단축하였고, 서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많은 교통량을 흡수하게 되었다. 이 교각 밑으로는 자전거도로와 보행로가 나 있어서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

<노량대교-네이버캡쳐>


   노량대교 노량진 쪽 끝 지점에는 <漢江水死者弔魂碑(한강수사자조혼비)>라고 새긴 돌기둥이 숨어있다. 뒷면에는 <昭和四年六月建龍山記者團有志(소화46월건용산기자단유지)>라고 쓰여 있어 1929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강철교(1900)와 한강인도교(1917)가 준공되고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희생된 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당시 용산경찰서와 철도국에 출입하던 기자들이 세운 것 같다. 용산기자구락부에서는 1922경부터 한강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한강수사자조혼비>



   노량진(鷺梁津)은 백로(白鷺)가 노닐던 나루터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던 나루터로서, 한강대교 남단에 있었다. 시흥·수원을 거쳐 충청도·전라도로 통하는 곳이었다. 조선 시대에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뒤로 경제와 군사 등의 측면에서 한층 중요시되었으며, 태종 때에 광진도와 함께 처음으로 별감이 배치되고 이후 경강의 4대 도선장의 하나로 교통량이 많았다. 경향 각지에서 올라오는 물산의 집결 장소였으나, 지금은 한강철교와 한강대교가 건설됨으로써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한강대교-2017년 3월>


   노량진본동사무소 앞 도로변에는 <주교사터(舟橋司址)> 표지석이 있다. 정조는 생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그곳에 정기적으로 참배하기 위해 한강에 배다리 놓은 일을 전담하는 주교사를 1789(정조13)에 설치하였다. 주교사에서는 서울의 선박 수백 척과 사공 1천 명을 동원하여 배다리를 설치하였으며, 정부에서는 배다리 가설비를 마련하기 위해 충청도와 전라도의 세곡 운반권을 주교사에 부여하였다. 그러나 배를 이용해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원성도 커져 정조의 고민도 많았다고 한다.

<주교사터 표지석>


   <주교사터> 앞에는 정조(正祖)가 배다리를 건너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수원 화산(華山)의 현륭원(顯隆園, 융릉)에 갈 때 잠시 쉬고 갔다는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 있다. 건축연대는 정조13(1789) 이후로 보고 있으며, 능행 도중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주정소(晝停所)라고도 한다. 내부 벽에는 정조의 능행길화성행차도<반차도>가 그려져 있고, 정선(鄭敾)의 동작진(銅雀津)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걸려 있다.

<용양봉저정> 

<능행길화성행차도>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는 사육신묘역이 있다. 이곳에 사육신묘가 조성된 계기는 일찍부터 박씨지묘(朴氏之墓유씨지묘(兪氏之墓이씨지묘(李氏之墓성씨지묘(成氏之墓)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서 있는 네 개의 무덤과 그 뒤편에 또 하나의 묘가 있었고, 민간에서는 네 개의 묘소를 사육신묘라 일컫고 뒤편의 묘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묘라 전해왔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생육신의 한 분이신 매월당 김시습이 거열형(車裂刑)을 당한 시신을 바랑에 담아다가 노량진 외진 언덕에 임시로 매장하였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의절사>

<사육신묘>




(5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