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열 번째-5)
(팔당댐∼가양대교, 2019년 11월 23일∼24일)
瓦也 정유순
동작대교 북단 좌측으로 이촌동 초 고층아파트가 보인다.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서울특별시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 정책에 따라 재건축된 한강 변의 유일한 초고층(최고 56층) 재개발 아파트다. 보통 재개발하면 세대수를 늘려 기존세대의 추가 분담금을 줄이는 방식을 택하는데, 2015년 8월 1일부터 입주가 시작된 래미안첼리투스 아파트는 기존 세대수(460세대) 그대로 일대일 재건축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추진하여 성공한 사례라고 한다.
<레미안첼리투스아파트-2017년 3월>
한강의 대표적인 유수지(遊水池)였던 이촌동 하천부지는 한강시민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많은 휴식을 제공한다. 유수지는 물이 흐르다가 잠시 쉬어 가는 곳이다. 지금은 아파트빌딩 숲으로 변한 이촌동은 여름에 장마가 지면 한강 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홍수를 피해 강안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촌동(移村洞)이라 하였는데,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촌동(二村洞)으로 뜻을 달리하여 표기하게 되었다. 한강대교 도로를 경계로 하여 동·서부 이촌동으로 나뉜다.
<이촌동 하천부지-2017년 3월>
정조(正祖)가 화성 행차 때 배다리[舟橋]를 띄웠던 자리 부근에는 한강의 최초의 대교인 한강대교가 떡 버틴다. 한강대교는 용산구 이촌동에서 동작구 노량진을 잇는 교량으로 한강에 놓인 최초의 인도교(人道橋)이며, 1917년 10월에 첫 준공하였으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다리 중간 부분이 유실되었다가 1929년 9월에는 노들섬∼용산부분이 개통되었고, 1937년 5월에 노들섬∼노량진부분이 다시 개통되었다. 당시 주관자는 조선총독부 한국인 직원이었던 최경열(崔景烈)이다.
<한강대교 남단-네이버캡쳐>
1950년 한국전쟁 때에는 적군이 밀려오자 당시 대통령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국민을 안심시키면서 야반도주하였고, 육군참모총장은 명령을 내려 한강대교를 폭파해 버렸다. 그래서 적군에 밀려 철수하려던 국군과 피난민들의 퇴로가 차단되어 엄청난 피해를 불러왔다. 이는 우리의 전사(戰史)에 큰 오점(汚點)을 남겼으며 국민의 지탄(指彈)을 받았지만 당시 명령을 받고 폭파한 육군 공병감 최창식(崔昌植)에게만 책임을 물어 총살하였다.
<한강대교 북단-2017년 3월>
제1한강교로도 불렸던 이 다리의 개통으로 영등포를 중심으로 새로운 도심이 발달하고 교통량의 증가로 1979년 4차선 교량을 8차선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시작하여 1981년 12월에 준공하여 쌍둥이다리가 되었고, 한강인도교라는 이름도 한강대교로 바꾸었다. 현재 한강대교의 길이는 1,036m이며, 초기 총공사비는 250만 원이었고, 연인원 28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한강대교와 노들섬-네이버캡쳐>
한강대교 중간에 있는 노들섬은 용산구 이촌동 302의 6에 위치한 타원형의 섬이다. 이전에는 한자 지명으로 제1중지도로 불렸으나 1987년 노들섬으로 공식지명이 바뀌었다. 백사장과 갈대숲으로 뒤덮인 황량한 모습이었다. 조선 시대부터 물맛이 빼어난 우물물을 왕궁에 바쳐오던 노들섬은 1917년 한강대교가 놓이면서 사람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에는 수영장과 낚시터,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노들섬-네이버캡쳐>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때는 당시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당 후보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1894. 6∼1956. 5)가 30만 군중 앞에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고 외치며 포효(咆哮)를 했던 곳이다. 해공선생은 불행하게도 정권교체를 눈앞에 두고 선거일 전에 호남선 열차 안에서 돌연사하고 만다. 이때 나온 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손로원 작사 박춘석 작곡 손인호 노래)”은 공전의 인기곡이 되었다.
<해공선생동상-네이버캡쳐>
노들섬은 유원지, 오페라하우스, 한강예술섬 등 여러 개발사업을 추진하다 좌초돼 50년 넘게 빈 땅으로 방치되어왔는데, 서울시는 한강대교 아래에 음악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하여 음악섬으로 2019년 9월 다시 태어났다. 대중음악 전문 공연장 라이브하우스, 서점 겸 도서관 노들서가, 음식문화공간 엔테이블, 식물공방 식물도(島) 등의 시설이 들어섰다.
<노들섬 시설배치도-네이버캡쳐>
한강대교를 지나면 바로 한강철교가 나온다. 한강철교도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놓여진 다리다. 용산역과 노량진역을 이어주는 한강철교(A)는 1900년 7월에 최초 준공되었으며, 지금은 교량이 4개(A·B·C·D)선으로 이루어 졌다. B선은 1912년 9월에, C선은 1944년 6월에, D선은 1995년에 건설하였으며, 지금의 용도는 A선은 경인선과 직통 전철, B선은 화물열차, C선은 경부선 호남선 장항선 등의 철도, D선은 수원행 인천행 전철이 사용하고 있다.
<한강철교 -2019년 5월>
한강철교 북단 이웃에는 새남터가 있다. 새남터는 조선 때 연무장(鍊武場)으로 쓰였으며, 국사범(國事犯) 등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된 곳이다. 1456년(세조2년)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처형된 사육신(死六臣)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는데, 강 건너 노량진 언덕에 사육신의 묘역이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이후에는 많은 천주교도들이 처형된 곳이다. 1956년 천주교도 순교자기념탑이 세워졌고, 1983년에는 지하1층 지상3층 종탑3층으로 순 한국식 기념성당이 세워졌다.
<새남터순교성당-2019년 5월>
한강철교 밑으로 하여 앞으로 조금 지나면 여의도가 있고 원효대교가 나온다. 원효대교는 용산구 원효로와 여의도를 연결하는 다리로 1,470m의 민간자본에 의해 1981년도에 건설된 국내 최초의 디비닥공법 교량이다. 통행료를 받았던 유료도로였다가 운영하던 회사가 1984년 서울시에 무상기증하여 무료로 통행하고 있다. 디비닥공법은 콘크리트 받침대 없이 두 교각에서 콘크리트를 쳐 나가다가 만나는 지점에서 교량 상판을 연결하는 방법이다.
<원효대교-2017년 3월>
여의도(汝矣島)는 한강의 하중도(河中島)로 면적 2.9㎢(약 87만 평)이다. 영등포에서 샛강 건너에 있는 모래로 이루어진 쓸모없는 땅이었으나 일제가 1916년 9월에 이곳에 간이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미군이 접수하여 사용하였고, 백범 김구(白凡 金九) 등 독립투사 등이 이곳을 통해 개별 귀국하였다. 1967년에는 충남 청양의 구봉광산 매몰사고로 16일간 갇혀 있던 광부 양창선도 구조되어 헬기로 여의도공항으로 후송되었다.
<여의도 지도>
1968년 여의도 윤중제(輪中堤)가 축조되면서 여의도비행장은 경기도 성남으로 이전하였고, 지금의 여의도로 변신하기 시작하여 영등포에서 여의도를 가로 질러 마포로 연결되는 마포대교(1970년 5월), 원효대교(1981년 10월), 서강대교(1999년)가 차례로 개통되었다. 그리고 입법기관인 국회의사당, KBS 등 언론기관, 증권회사와 각종 금융관계사, 초대형 순복음교회, 63빌딩, 엘지(LG)쌍둥이 빌딩 등 고층건물이 숲을 이루고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다.
<여의도 빌딩숲-2019년 5월>
한강 건너 마포(麻浦)지역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으로 인하여 조강(祖江, 한강하구)의 수운이 폐쇄됨에 따라 옛날의 기능은 상실되어 한때는 침체기에 접어들어 은방울자매가 부른 <마포종점>이라는 가요가 소외된 서민들의 애환을 노래하기도 하였으나, 여의도가 개발되고 마포대교가 개통되면서 새로운 서울의 서부 거점도시로 발돋움하게 된다.
<마포대교와 한강유람선>
그리고 여의도로 국회의사당이 이전하면서 마포지역이 여의도 다음으로 정치인의 활동장이 되었다. 마포는 우리말 삼개라는 포구 이름을 한자로 옮겨 적으면서 유래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각 지방에서 오는 산물의 하역과 보관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오강(五江, 뚝섬·노량·용산·마포·양화진) 중의 하나로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농산물을 저장하고, 서해에서 들어오는 새우·조기 등의 수산물의 집산지로 큰 역할을 하였다.
<국회의사당-후면>
국회의사당은 제헌국회(1948년) 때는 당시 중앙청 중앙홀을 사용하였고, 한국전쟁으로 피난 시절에는 부산의 경남도청과 부산극장을 사용하였으며, 서울 수복 후 별도의 건물이 없이 서울 중구 태평로에 있는 시민회관 별관(현 서울시 의회)을 사용하다가 1975년 8월 15일에 준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국회의원을 비롯한 의원보좌관과 사무처직원 등 2,200여 명이 근무하는 국회의사당은 잘 정리된 주위의 조경과 화강석 건물이 조화를 이루어 매년 2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고 있다.
<국회의사당 야경>
또한 매년 4월 초 화사한 벚꽃이 만발할 때 국회의사당 주변으로<서울여의도벚꽃 축제>가 열려 인산인해를 이룬다. 2000년부터는 10월 하순쯤이 되면 63빌딩 앞 한강시민공원에서 ‘21세기 한국의 비전을 새롭게 제시하고, 민족의 화합의지를 다지는 기쁨과 희망의 장”으로 삼고자 기획된 <세계불꽃축제>가 어둠이 짙어질 무렵인 저녁 8시경에 열려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
<영화 괴물 촬영지>
여의도와 마포 사이에는 밤섬이라는 작은 섬이 있다. 고려 때에는 귀향 보내던 섬이었고, 1394년에는 조선의 서울 천도와 함께 배를 만드는 기술자들과 천민그룹이었던 갖바치 등이 정착하여 살았고, 한국전쟁 이전까지 조선업과 뱃사공, 물산 도선하역 등이 성행 하였다고 한다. 1968년 여의도 윤중제 골재 공급을 위해 밤섬이 폭파됨으로써 주민들은 마포구 창전동으로 이주하였으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섬으로 철새와 수변생물들의 낙원이 되었다.
<밤섬과 국회의사당-2017년 3월>
밤섬 위로 지나는 서강대교는 마포구 신정동과 영등포구 여의도동을 연결하는 한강 위의 교량이다. 다리 이름은 조선시대 이 부근의 한강을 서강이라고 부른 데서 연유되었다. 1980년 2월 착공되었으나 88서울올림픽 준비와 막대한 공사비로 10년 동안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93년 공사를 재개하여 1996년 12월 30일 개통되었다. 길이 1,320m, 폭 29m로 강북의 신촌지역과 강남의 여의도를 연결하는 다리다. 수원·인천 방향으로 이어지는 동맥이며, 경인고속도로와도 연결되어 여의도의 교통을 분산하는 효과가 있다.
<서강대교 교각>
마포구 당인리에는 우리나라 전기산업의 산 역사인 당인리화력발전소(현 서울화력)가 있다. 한강에 황포돛배가 오가던 시절인 1930년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 1호기가 준공되었다. 한때는 학교 시험에 나올 정도로 유명했었지만 공기오염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다. 지금은 연료와 시설의 대폭 개선으로 발전 시 발생하는 증기로 여의도와 동부이촌동, 마포 반포지역 일대 5만여 세대에 온수와 난방을 공급하고 있다. 앞으로 발전시설을 지하화하고, 현재의 지상 부지에는 시민의 쉼터인 공원과 문화창작발전소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화력>
<서울화력-2019년 5월>
(6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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