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열 번째-3)
(팔당댐∼가양대교, 2019년 11월 23일∼24일)
瓦也 정유순
조반을 끝내자마자 잠실 석촌호수 옆에 있는 삼전도비로 이동한다, 석촌호수는 본래 송파나루가 있는 한강의 본류였다. 송파나루는 조선 왕조 이전에도 한양과 삼남 지방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뱃길의 요지였다. 옛날에는 한강의 토사가 지금의 잠실 쪽으로 쌓여 형성된 부리도(浮里島)라는 섬이 있었는데, 1971년 부리도의 북쪽 물길을 넓히고, 남쪽 물길을 폐쇄하여 섬을 육지화 하는 한강 공유수면 매립사업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때 폐쇄한 남쪽 물길이 바로 현재의 석촌호수로 남게 되었으며, 당시의 매립공사로 생겨난 땅이 현재의 잠실동과 신천동이다.
<석촌호수 지도>
<석촌호수>
지하철 2호선 잠실역으로 가는 석촌호수(서호) 북단에는 소위 삼전도비(三田渡碑)라고 불리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가 있다. 이 비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 태종의 막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하며 항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청 태종이 세운 비석이다. 비신(碑身)의 높이는 395cm, 너비 140cm로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춘 거대한 비석이다. 몽골문·만주문·한문의 3종류 문자로 같은 내용을 담음으로써 옛 글자 연구의 자료로도 이용되고 있다.
<삼전도비>
이 비의 옆에는 비신(碑身)이 없는 작은 귀부가 또 하나 있다. 병자호란이 끝나자 청 태종의 전승기념을 위해 비를 건립하던 중 중간점검을 나온 청나라 관리가 ‘거북이의 눈이 하늘로 치켜뜨고 있는 모습이 마치 천자를 째려보는 형상’이라며 트집을 잡았고, 더 큰 규모로 비석이 조성되기를 강요하는 청나라의 변덕으로 원래에 만들어졌던 귀부가 용도폐기 되면서 남겨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비신이 없는 작은 귀부>
1963년에 사적 제101호로 지정된 이 비는 당초(當初) 한강 변 나루터 인근에 세워졌으나 치욕의 역사물이란 이유로 수난과 수차례 이설을 거듭해 왔다. 1980년대는 송파대로 확장 시 석촌동 289-3 주택가에 있는 아름어린이공원에 세워져 있던 비를 원래 위치를 고증하고 문화재 경관심의를 거쳐 2010년 4월에 현재의 위치인 잠실동 47번지로 이전하여 설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치욕적인 역사임에는 틀림없으나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사실을 직시하는 태도가 더 필요하다.
<삼전도비 전경>
바쁜 발걸음은 다시 잠실한강공원 종합운동장 부근으로 이동한다. 성남 쪽에서 흘러오는 탄천(炭川)옆 부지에는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치른 잠실종합운동장이 있다. 1984년 9월에 완공된 이 운동장은 최대수용인원 20만 명이며, 외형은 우리의 전통적인 단순미와 곡선미를 아름다움과 스포츠를 통한 화합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이곳에서 제24회 올림픽 성화(聖火)를 밝힘으로써 KOREA가 세계만방으로 더 알려졌다.
<잠실종합운동장>
유로연장 35.6㎞인 탄천은‘숯내’라는 이름을 한자화하여‘탄천(炭川)’이 되었다. 그리고 성남시의 옛 이름은 탄리(炭里)다. 이는 남이(南怡)장군의 6대손인 남영(南永)의 호가 탄수(炭叟)인데, 지금의 성남시 수진동, 태평동, 신흥동 일대에서 살았다 하여 그의 호 탄수에서 탄골 또는 숯골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고, 탄골을 흐르는 하천이라는 뜻에서 탄천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탄천은 용인시 법화산에서 발원하여 성남시를 지나 서울 강남구에서 양재천을 끌어안고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 옆으로 하여 한강으로 들어간다.
<탄천>
또 옥황상제가 삼천갑자(三千甲子)를 살아온 동방삭(東方朔)을 잡기 위해 사자를 시켜 숯을 물로 씻고 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동방삭이 하도 이상하여 “왜 숯을 물로 씻느냐?”고 물었더니, 사자가 답하기를 “검은 숯을 희게 하려고 물에 씻고 있다”고 하자 동방삭은 크게 웃으며 “내가 지금까지 삼천갑자를 사는 동안 당신 같이 숯을 씻어 희게 만드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하였다. 이에 사자는 이자가 동방삭임을 알고 옥황상제께 데리고 갔다 하여 이때부터 이 하천을 탄천 또는 숯내라 불렀다고 한다.
<탄천하구>
<탄천과 한강의 만남>
탄천을 건너 청담대교 남단 밑을 지나 영동대교에 다다른다. 강남구 청담동과 삼성동의 개발의 큰 역할을 했던 영동대교(1973년 11월 준공)는 성동구 성수동으로 다리를 쭉 뻗었고, 청담동 쪽 아파트단지 아래 한강에는 철새들이 무리를 지어 노닌다.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악취가 진동하여 한강 옆으로 지나가기를 꺼렸던 곳에 철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는 것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두가 환경을 위해 노력하신 국민의 덕이다. 그러나 민물가마우지가 우점종(優占種)이 되는 것은 우려(憂慮)해야 할 일이다.
<청담대교 교각>
같은 물이라도 흘러온 강에 따라 바로 혼합(混合)이 안 되는 것 같다. 한강 본류를 따라 계속 흘러온 물은 맑고 투명한데, 탄천에서 흘러나온 물은 맑으면서도 투박한 느낌을 주며 두 물의 경계가 뚜렷하다. 이러한 현상은 두 물의 수질(水質)과 수온(水溫) 등의 차이로 일어날 수 있다. 1980년대 초반 춘천 의암호에 유입되는 북한강과 소양강 물의 혼합상태를 측정한 결과 약 1.5일 정도가 소요된다는 기록이 아물거린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서울 남산은 더 가깝게 다가온다.
<한강과 탄천의 수면경계>
영동대교 북단 화양동(華陽洞)은 조선 시대에 이곳에 새워진 화양정(華陽亭)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속설에는 “병자호란 때 인질로 끌려간 부녀자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환향녀(還鄕女)들이 살던 마을”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인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종(端宗)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영월로 쫓겨 갈 때 부인 송씨와 이별하며 회행(回行)하기를 기원했다 하여 회행리(回行里)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화양동의 빌딩 숲>
한강의 11번째 다리로 1979년 10월 준공된 강남구 압구정동과 성동구 성수동을 잇는 성수대교는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 상판이 내려앉은 참사를 아는지 말없이 자동차만 바쁘게 달린다. 그때 강 건너 학교로 등교하던 학생들의 희생이 많았다. 사고조사결과 시공사의 부실공사로 발표도 했지만 평소 교량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되었는지도 꼼꼼하게 따져볼 일이었다. 그 뒤 서울시에서는 1996년 3월부터 기존 다리를 헐고 새 성수대교를 세우기 시작하여 2004년 9월에 왕복 8차선으로 확장했다. 길이 1,161m, 너비 35m이다.
<성수대교>
잠실 쪽에서 서북방향으로 물줄기가 흘러가다가 그 물 모퉁이를 이루어 서남으로 방향을 틀은 곳이 압구정(鴨鷗亭)이 있던 언덕이다. 이 언덕에 수양대군을 도와 권세를 잡은 한명회(韓明澮, 1415∼1487)가 말년에 “갈매기와 친하게 진낸다”라는 뜻으로 지은 정자가 압구정으로 지금도 갈매기들이 날아와 다른 철새들과 어울려 노닌다. 옛 압구정이 있던 곳에서 북쪽의 옥수동과 금호동 일대를 바라보면 닥나무가 무성했던 저자도(楮子島)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멀리 북한산 봉우리들까지 한눈에 들어와 중국 사신들의 접대자리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압구정과 저자도>
그리고 지금은 흔적마저 사라져 보이지 않는 섬이 하나 있었다. 중랑천이 한강으로 치고 들어올 때 토사가 쌓여 만들어진 삼각주(三角洲). 두 물이 부딪히는 곳에 섬이 있어 물살이 유유하며 섬 안에는 구릉과 연못과 모래밭이 펼쳐지는 저자도! 닥나무가 많아 저자도(楮子島)로 불리는 이 섬은 속칭 ‘옥수동 섬’이라고도 한다.
<겸재 정선의 압구정과 저자도>
조선 시대에는 서울 앞을 흐르는 한강 구간을 따로 경강(京江)이라 불렀는데 옥수동과 금호동 일대의 강을 경강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호(東湖)라 했다. 저자도(楮子島)는 동호의 아름다운 자연을 대표하는 자연자산이었다. 고려 때에는 한종유(韓宗愈)란 사람이 여기에 별장을 두었고, 조선 때에는 세종이 이 섬을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여 그의 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물려주어 대대로 소유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철종의 부마인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하사되기도 하였다.
<동호와 성수대교>
그리고 저자도 남쪽에 어린아이처럼 생긴 바위가 마치 춤추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무동도(舞童島)라고 부르기도 했고, 옛날 이 마을에 집오리를 많이 길러서 압도(鴨島)라고도 하였다. 1936년 뚝섬의 제방을 쌓을 때와 중앙선 철도를 부설할 때도 이 섬의 흙을 파다가 사용하였다. 1970년대에는 공유수면 매립허가를 받은 현대건설이 저자도의 흙과 모래를 파내 지금의 압구정동 택지를 조성하는 데 사용하여 한강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서울 숲의 아이서울유>
성수대교 북단에는 성동구 성수동으로 뚝섬체육공원 일대에 2005년 6월에 문을 연 35만 평 규모의 서울 숲이 조성되어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녹색공원이 적은 서울 동북부지역의 시민을 위해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같은 대규모 도시 숲을 만들기 위해 친환경적으로 숲과 동물이 어우러질 수 있도록 자연 그대로의 숲을 재현한 곳이다. 서울 숲 안의 472m 보행교는 한강 선착장과 연결하는 통로이고, 몸이 불편한 사람을 위해 승강기도 설치해 놓았다.
<서울 숲의 사슴>
뚝섬은 조선 태조부터 성종까지 약100여 년간 151차례나 왕이 직접 사냥을 나온 사냥터였다. 그리고 매년 음력 2월 경칩과 음력 9월 상강에 왕이 직접 군대를 사열하거나 출병하면서 독기(纛旗, 소꼬리나 꿩 꽁지로 장식한 큰 깃발)를 세우고 독제(纛祭)를 지냈기 때문에 유래했다. 한강과 중랑천에 둘러싸인 지형이 마치 섬처럼 보이고 ‘독기를 꽂은 섬’이라 하여 독도(纛島)로 불리다가 ‘뚝도 또는 뚝섬으로 소리가 바뀌었다.
<서울 숲의 경마상>
서울 숲 모퉁이를 돌면 의정부에서 흘러 내려오는 중랑천과 합류하는 지점으로 철새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중랑천 상류로 조금 올라가면 용비교 밑으로 중랑천을 자전거와 사람이 건너는 교량이 있고, 교량을 지나면 봄마다 개나리로 노랗게 물드는 응봉산이 있다. 응봉산(鷹峰山, 81m)은 임금이 매사냥을 하던 곳으로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역 북쪽이다,
<응봉산 원경>
<응봉산정>
용비교 쪽으로 우회전하여 중랑천 초입으로 들어서면 ‘살곶이 벌’이 나온다. 살곶이벌은 조선조 초기 왕자의 난으로 보위에 오른 태종(이방원)이 함흥에서 돌아오는 태조(이성계)가 만났던 곳으로 태종을 보자 화가 치민 태조가 화살을 쏘았으나 태종이 차일을 치기 위해 세웠던 큰 기둥 뒤로 몸을 피하는 바람에 화살은 그 기둥에 꽂히고 말았다. 이에 태조는 하늘이 뜻이라며 태종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 후로 이곳을 화살이 꽂힌 벌판이라 하여 살곶이벌이라고 한다.
<살곶이다리 상판>
살곶이다리는 세종 2년(1420) 5월에 상왕(태종)이 다리 공사를 명하여 시작하였으나 세종 4년(1422)에 상왕이 죽자 방치되다가 이곳을 오가는 백성들을 위해 성종 6년(1475)에 이르러 다시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되었다. 다리는 길이 75.75m 폭 6m인데 조선 시대 다리로는 가장 길다.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동쪽의 광나루를 통해 나가면 강원도 강릉에 닿았고 동남쪽으로는 송파에서 광주·이천을 거쳐 충주로 나갈 수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성수동 한강 변에 닿아 선정릉(宣靖陵)과 헌인릉(獻仁陵)으로 가는 왕의 배릉(拜陵) 길이 되었다.
<살곶이다리>
(4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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