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깝고도 먼길-덕수궁과 정동길(2)

와야 정유순 2019. 11. 23. 01:56

가깝고도 먼길-덕수궁과 정동길(2)

(20191119)

瓦也 정유순

   다음 발길은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유명한 구 러시아공사관 터다. 원래 경운궁(덕수궁) 영역이었던 이곳 정동 언덕에 러시아 공사관이 들어서게 된 것은 궁궐을 비롯한 도성의 사대문 안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미국·영국·프랑스 등 주변에 공사관을 두었던 국가들을 견제하려는 러시아 측의 정략적인 입지 선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구 러시아공사관 탑>


   이러한 상황에서 외세에 의존해 난국을 수습하려 했던 고종의 정치적 판단과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구 러시아 공사관은 조선 왕조가 주권을 상실해가던 격변기를 되돌아보게 하는 참회의 장소다. 원래 건물은 벽돌로 된 2층 구조로 한쪽으로 탑을 세웠으며 입구에는 개선문 형식의 아치문이 있었으나 본채가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탑과 지하 2층만 남아있던 것을 1973년 복원 과정에서 지금처럼 흰색 칠로 마감되었다.

<구 러시아공사관 평면도>


   당시 고종이 거처한 방은 공사관에서 제일 좋은 방으로 내부가 르네상스풍의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고 한다. 광복 직후에는 이곳이 소련 영사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건물은 우리에게 건축사적 의미보다는 역사적으로 더욱 중요한 곳이다. 1981년 서울특별시와 문화재청의 공동 발굴로 탑의 동북쪽에서 밀실과 비밀통로가 확인되었는데, 이것이 경운궁까지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주장도 있다.

<구 러시아공사관 탑>


   구 러시아공사관 터 아래로는 정동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한국 천주교수도원 첫 자리다. 1887726일 조선교구장 블랑주교는 버림받은 고아들과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프랑스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였으며 1888722일 네명의 수녀들(프랑스인 2, 중국인 2)이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723일 서울에 온 수녀들은 같은 해 97일 종현(명동)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에 이른다.

<정동공원 정자>


   정동공원 옆으로는고종의 길이 있다. 이 길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211일부터 약 1년간 왕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피난길로 201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120주년을 맞아 덕수궁 선원전자리(구 경기여고)와 미국대사관저 사이의 좁은 길로 구세군중앙회관부터 구 러시아공사관까지 길이 120, 3의 길을 201810월에 개통하였다.

<고종의 길 안내>


  그리고 이 길은 일제의 위협에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한 국왕이 남의 나라 공관으로 야반도주(夜半逃走) 했던 치욕의 길이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은 1년 뒤, 경복궁 대신 경운궁(후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되는데, 고종이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처럼,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이 길 역시 우리의 품에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종의 길>


   덕수궁 선원전(璿源殿)은 역대 임금들의 어진, 신주, 신위를 모신 곳으로 일제에 의해 훼철된 이후 조선저축은행 사택, 미 대사관저, 경기여고로 사용됐다. 또한 지금의 성공회성당이 들어선 정동 3번지 일대에 있던 귀족 자제들의 교육시설인 수학원(修學院)을 헐고 경성방송국(KBS)을 지었다.

<선원전 터-구 경기여고>


   1988년 경기여고가 서울 강남구 개포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선원전을 복원하기로 하고 옛 경기여고 담장과 연결된 미대사관저 철거부지에 전통 야생화와 교목을 심기로 했다. 인근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은 일제 궁궐 훼철의 증거이지만,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보수·정비한 후 관람 탐방 지원센터와 교육전시관으로 다시 꾸며 2021년 개관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구세군회관영국대사관서울시청 쪽으로 연결되는 골목길이 뚫렸다.

<조선저축은행 사택>


   덕수궁과 미 대사관저 사이로 난 돌담길을 따라 정동제일교회로 이동한다. 이 교회는 개신교가 이 땅에 보급된 후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이다. 1885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배재학당을 세워 한국의 근대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는 학교에서 종교 활동을 하였으나 예배만을 위한 건물을 구입하여 베델(Bethel) 예배당이라 하고 1887년 첫 예배를 시작하였다.

<정동제일교회>


   교인들이 늘어나면서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 건립이 필요하게 되자 1895년 공사를 시작하여 18971226일 봉헌식을 가졌다. 이 건물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19세기 교회 건물이다. 이 건물은 구조는 단층이지만 층고(層高)가 높아 2층으로 보이고 남측 종각은 3층 높이로 지어졌다. 미국식의 단순화된 고딕양식으로 건립 당시의 사진을 보면 이웃한 기와집이나 덕수궁과 잘 어울린다.

<정동교회 100주년 기념탑>


   배재학당(培材學堂)18858월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세웠으며, 오늘날 배재중·고등학교와 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18857월 서울에 도착한 아펜젤러가, 1개월 먼저 와 있던 스크랜턴의 집을 구입,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교실에서 2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다. 이에 고종은 18866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 이름을 지어 간판을 써 주었고, 그해 10월 학생 수는 20명으로 늘었다. 그리고 19201146일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우리나라 전국체육대회(1) 시초가 되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아펜젤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라고 설립목적을 밝혔고,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 큰 인물이 되려거든 남을 섬겨라)’이라는 학당훈()을 내걸었다. 기독교인과 국가 인재양성을 위하여 일반 학과 외에, 연설회·토론회 등을 열고 사상과 체육 훈련을 병행했고, 당시 배재학당에 설치되었던 인쇄부는 한국의 현대식 인쇄시설의 효시다.

<제1회 전국체육대회 개최지 표지>


   2001315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된 옛 배재학당 동관 건물은 1916년에 세워졌는데 처음 지었을 때의 원형(原形)이 대체로 남아있고 건물의 형태가 우수하여 1910년대 한국 근대 건축의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 1984년 배재고등학교가 서울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교실로 사용되었으며, 2008724일 이 건물을 새롭게 단장하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개장하였다. 그리고 뒤란의 수령 500년 넘은 향나무는 이 지역 격동의 역사를 말없이 머금고 있다.

<수령500년 이상된 향나무>


   길 건너 바로 이웃에는 서울시립미술관 건물이다. 1895년에 지은 조선 최초의 재판소인 평리원(한성재판소)이 있던 자리에 일제강점기인 1928년 경성재판소로 건립한 건물로 해방 후 대법원으로 사용하였다.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옮겨 간 후 1999~2002년 옛 건물의 파사드(Facade: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만 보존한 채 뒤쪽에 3층의 현대식 건물을 신축하여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축적·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다.

<서울시립미술관>


   그러나 서울시립미술관은 휴관 중으로 내부를 구경하지 못하고 돌담길을 따라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 앞으로 돌아 나온다. 돌담길 또한 덕수궁 안에 있던 땅으로 1922년 덕수궁을 관통하는 길을 내면서 생긴 길이며, 원래 정문으로 헐린 인화문(仁化門) 자리는 지금의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자리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뒤 덕수궁 터를 조직적으로 분할 매각했는데, 이는 궁궐이 지니고 있는 국격(國格)의 상징성과 민족정기를 파괴하기 위한 고도의 책략이었다. 경운궁에는 남쪽의 인화문, 동쪽에 대안문, 북쪽에 생양문(生陽門), 서쪽에 평성문(平成門)이 있었는데, 지금은 대한문 하나다.

<덕수궁 돌담길>


   그 대한문 앞에서는 마침 수문장 교대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조선 왕조에서 제정한 수문장 제도의 첫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예종 1년에 등장한다. 건국 이후 조선 왕조 궁궐문의 방비는 궁궐을 수비하는 호군(護軍)이 순번에 따라 돌아가며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종 때 남이(南怡)의 역모사건 등 표면적으로 왕권이 위협받는 사건이 일어나자 궁궐 수비체계에 대한 개편이 진행되어, 수문장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다고 한다.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


   수문장 교대식을 보고 서울 도시건축전시관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이곳도 오늘 휴관이다. 원래 이 자리는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훈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사당(덕안궁)이 있던 곳인데, 일제가 이 자리에 조선총독부 체신국 청사를 건립했고, 해방 후에는 체신부청사로 사용하다가 국세청 남대문 별관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건물 철거를 통해 국내 최초의 도시건축 전시관을 세우고 시민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지상에는 광장을, 지하에는 전시관이 있는 문화공간을 조성했다고 한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서울특별시청사>


   내친김에 서울광장 건너편에 있는 환구단으로 걸음을 옮겼으나 내부공사로 헛걸음이다. 환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祭天壇)이다. 이곳에 환구단(圜丘壇)이 건립된 것은 고종 광무 원년(1897)이다. 조선은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고종의 황제 즉위를 앞두고 남별궁(지금의 소공동)에 환구단을 세운다. 그리고 18971011일 고종은 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 나아가 천신에게 제사를 올린 뒤 황제에 즉위하였다.

<환구단 정문>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12월 환구단의 건물과 터가 총독부 소유로 되면서 일제는 1913년 환구단을 헐고 조선총독부 철도호텔(지금의 조선호텔)을 지었다. 지금 남아있는 팔각의 황궁우(皇穹宇)는 신위를 봉안하던 건물로 환구단의 북쪽 모퉁이에 해당하며, 그 앞에 있는 석고는 1902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세운 석조물이다. 명칭은 환구단(圜丘壇)과 원구단(圜丘壇 또는 圓丘壇)으로 혼용하던 것을 2005년 문화재청에서 한자 표기는 圜丘壇으로, 한글 표기는 환구단으로 정하였다.

<황궁우-네이버캡쳐>

<석고-네이버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