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아홉 번째-2)

와야 정유순 2019. 10. 31. 14:18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아홉 번째-2)

(이포보-팔당댐, 2019102627)

瓦也 정유순

   양근사거리에서 국도 제6호를 따라 잠깐 걷다가 다시 물안개공원을 따라 강변으로 빠져든다. 세 개의 인공폭포 소리에 맞춰 가수 김종환의 노래비에서는 <사랑을 위하여> 등 그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흘러나온다.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110만 장이 팔리며 1998년 골든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던 밀리언셀러다. 30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선정된 이 노래는 김수환 추기경의 애창곡으로, 김 추기경의 마지막 미사에서 합창으로 불리기도 했다. 김종환은 실제 시인으로 활동하며, 작사 작곡까지 하는 가수(歌手).

 

<물안개공원 입간판>

 

   “물안개 피는 강가에 서서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리∼♩무명시절 김종환이 홍천 처가 집에 가던 중 양평의 남한강 변에서 피곤한 몸을 잠시 쉬다가 일어나 강에 피어오른 물안개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즉석에서 기타를 들고 노래 한 곡을 작곡하였다. 노래는 지금의 김종환을 있게 해 준 그 유명한 <사랑을 위하여>라는 곡이다. 1990년대 이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하자 양평군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공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가수 김종환 노래비>

 

   물안개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꽁지머리 시인 황명걸(1935)의 시비가 보인다. 시비의 뒷면에는 황명걸 시인 행장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그 위로 두상이 있는데 앞에는 얼굴 형태가 없는 평평한 면에 꽁지머리를 좋아했던 한국의 아이 황명걸이라는 글이 적혀있고, 뒷면은 역시 꽁지머리다. 황명걸은 평양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문리대 불문과 3년 중퇴했으며, 1962년 시인 등단 후 시작 활동을 하다가 양평에 둥지를 튼 최초의 중앙문인이다.

 

<황명걸 시비>

 

   물안개공원이 있는 언덕 같은 작은 산이 떠드렁산으로 새벽이면 남한강의 자욱하게 깔린 물안개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산에는 이괄과 청개구리 이야기 있는 산이다. 무엇이든 반대로 하는 아들 청개구리에게 어미 청개구리가 돌아가실 때 묘자리도 반대로 할 줄 알고 강가 모래에 묻어달라고 이야기했지만, 아들 청개구리는 마지막 효도로 알고 진짜로 강가에 묻고 비만 오면 물에 쓸려 내려갈까 봐 운다는 이야기다.

 

<떠드렁산과 인공폭포>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조선 중기 <이괄의 난>으로 유명한 이괄(李适, 15871624)은 어려서부터 부모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반대로 하는 말썽꾸러기였다고 한다. 평소 풍수지리에 밝은 아버지가 용문산 정기가 뻗어 모여 있는 떠드렁산 바위 밑에 묻어달라고 하면서, 이괄이 반대로 할 줄 알고 내가 죽거든 거꾸로 묻지 말고 바로 묻어다오라고 하며 죽었는데, 그 이유는 이곳 지세가 반은 용이고 반은 사람인지라 거꾸로 묻어야만 죽은 후에 용으로 승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괄은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할 수 없어서 바로 묻어드렸고, 아버지는 승천하지 못해 훗날 이괄의 난이 결국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물안개공원 입구>

 

  바삐 물안개공원길을 따라나서면 천주교 양근성지가 나온다. 양근성지는 한국교회 초기 신앙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했던 하느님의 종 권철신(암브로시오)ㆍ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와 권상문(세바스티아노) 복자 등 양근 지방에서 태어나고 순교한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권철신은 한양 이벽(李檗)의 집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자인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양근으로 내려왔다. 양근(楊根)은 한국천주교의 요람이기도 하고 한국교회의 뿌리를 내린 성지(聖地)로 꼽히고 있다.

 

<양근성지>

 

   조선 시대 오빈역(梧濱驛)이 있었던 양평읍 오빈리에는 사설 <양평들꽃수목원>이 있다. 남한강 변에 위치해서 강변의 정취와 꽃들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야생화 전시원에는 멸종위기에 처해 있는 우리나라 토종 야생화 200여 종이 전시되고 있고 자연생태박물관에는 각종 생태계의 표본과 실물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그 밖에도 강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강변산책로, 열대식물의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열대식물원, 자녀에게 각종 식물을 연구할 수 있게 해 주는 연구소 등을 갖추고 있다.

 

<들꽃수목원의 가을>

 

<들꽃수목원 조형물>

 

   오빈리에서 옥천면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덕구실나루가 있었던 곳에는 덕구실보도육교가 대신한다. 일명 오빈나루라고도 하며, 강상면 병산마을과 양평읍 오빈리 사이를 건너던 나루다. 나룻배는 10명가량이 타는 작은 배였으며 뗏목이 가끔 들렀다고 한다. 주로 병산리 사람들이 일을 보기 위해 건넜으며, 덕구실마을 사람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이용하지 않았으며, 팔당댐이 준공되면서 나루터가 수몰되었다.

 

<덕구실보도육교>

 

<백병산 아래 강상면 병산리>

 

   옥천면(玉泉面)은 군의 중앙 서부에 위치하는 면으로 소재지는 옥천리다. 본래 양근군 고읍면(古邑面)으로 1908년 양평군에 편입되고 1937년에 옥천면으로 개칭되었다. 중미산(仲美山, 834m) 등 면 전체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교통은 중앙선 철도의 아신역(我新驛)이 있으며, 국도(6호와 37)가 지나고, 중부내륙고속도(양평경남 창원)의 기종점이 옥천리다. 옥천리는 옥처럼 맑은 우물이 여러 군데 있어 옥천리라 하였다. 마을을 따라 사탄천이 흐르다가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사탄천>

 

<중부내륙고속도로 남한강대교>

 

   문화재로는 사나사(舍那寺), 사나사 원증국사탑(경기유형문화재 72), 사나사 원증국사석종비(경기유형문화재 73), 양평군 함왕성지(咸王城址, 경기기념물 123), 양근향교(楊根鄕校, 경기문화재자료 19), 양평용천리 3층석탑(경기문화재자료 21), 사나사 부도(浮屠) 등이 있다. 그리고 물맛이 좋아서 그런지 55년 전통의 옥천냉면은 면발이 굵으면서도 쫄깃쫄깃하고 튕길 듯 탱탱하며 한우 수육과 동그랑땡 완자를 곁들여 먹는 맛은 일품이라고 한다.

 

<사나사 전경-네이버캡쳐>

 

   아신역 교차로에서 다시 강변으로 진입하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아랫길로 접어들어 양서면 대심리로 들어선다. 원래 이 길은 제6호 국도였으나 4차선으로 확장 이전하는 바람에 지금은 한적한 남한강변길이 되어 연인들의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높다. 이 도로의 끝점에서 오솔길로 접어들면 양서면(楊西面) 대심리다. 양서면은 군의 서부에 위치하는 면으로 소재지는 용담리지만 두물머리가 있어서 더 유명한 곳이다.

 

<남한강변길>

 

    대심리(大心里)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탄리(大灘里)와 상심리(上心里)를 합쳐 대심리가 되어 양서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건너말, 상심, 한여울 등이 있다. 건너말은 한여울 건너 쪽 마을을 말한다. 상심마을은 한여울 동쪽 남한강 변의 마을로 대구 서씨의 선조가 지었던 상심정(上心亭)에서 유래하였으며 농장과 별장이 있다. 한여울은 대심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큰 여울을 일컫는 말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대심리 안내도>

 

   이 마을은 남한강과 국수역 앞 제6호 국도 사이에 성자봉이 가림막을 하여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마을이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오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한때는 난개발에 휘말렸으나 지금은 전원주택지로 안정이 되어 복잡한 도회지를 벗어나 전원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고 한다. 마을 골목의 카페나 문화시설 등 정비상태나 마을회관의 규모가 이곳 현재 상태를 말해준다.

 

<대심2리 마을회관>

 

<양평시니어센터>

 

  남한강 가운데에 있는 개인소유의 거북섬을 지나치면 서울 쪽으로 제6호 국도와 만나 4차선 차로에 다시 올라선다. 소음과 매연으로 폭주하는 차들을 스쳐가며 1정도 걷다가 자전거 길로 올라서 중앙선 신원역에 도착한다. 신원역(新院驛)은 양수역과 국수역 사이에 있는 중앙선의 기차역으로 200912월 국수~용문 연장 구간 개통에 맞추어 신역사가 완공되어 수도권 전철 중앙선 전동차가 정차한다.

 

<제6호 국도와 부용산>

 

<신원역>

 

   신원역에서 몽양길을 따라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면 길섶 돌 위에 새겨진 16기의 몽양 여운형의 어록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첫발을 내딛게 됐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은 이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1945년 해방 후 휘문학교 운동장에서 행한 첫 연설 중에서> 여러 어록 중에 눈에 띈다.

 

<몽양 여운형 동상>

 

   마당으로 올라서기 전에 <묘골애오와공원(妙谷愛吾窩公園)>을 만난다. 묘골은 동네 이름이며, <애오와(愛吾窩)>나의 사랑하는 집이란 뜻이다. 몽양의 친필로 쓴 이 글귀를 돌에 새겨뒀다고 한다. 몽양은 그 의지가 왜곡되고 사상이 의심되어 한때는 금기시하는 인물이었으나,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이어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묘골애오와공원>

 

  지상 1층은 복원된 여운형의 생가이며, 지하 1층은 기념관으로 이용된다. 함양 여씨(咸陽 呂氏)가 양평에 입향한 1715(숙종 41) 지어진 생가는 여운형이 출생한 곳으로, 부친 탈상 후 서울로 이사한 1908년까지 살았으며, 해방 전후에도 종종 내려와 지낸 장소다. 한국전쟁 중 소실되었다가 2001년 생가터가 정비되고 이듬해 기념비가 건립되었으며,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것을 계기로 2011년 복원되었다.

 

<몽양 여운형 생가>

 

   몽양기념관에는 여운형의 삶의 궤적을 따라 관람할 수 있도록, 출생과 애국계몽운동(1886~1913), 독립운동(1914~1945), 건국준비활동과 좌우합작운동(1945~1947), 서거(1947719)로 나눠 그의 생애에 관해 설명하고 관련 유물을 전시하였다. 여운형의 사진, 친필, 관련 도서들을 전시한 정관재(正觀齋), 여운형 좌상, 크로마키 촬영 공간, 추모 영상을 상영하는 영상실이 함께 있다. 같은 층의 매진 홀에서는 여운형과 관련된 다양한 기획 전시가 열린다.

 

<몽양기념관>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의 생가와 몽양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몽양은 중국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이 되자마자 안재홍(安在鴻), 정백(鄭栢) 등과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여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우려고 주도하였으나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했음은 물론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파 한지근(韓智根)에 의하여 1947719일 암살되었다.

 

<몽양친필(애오와)>

 

   <조선중앙일보>사장으로 재직할 때인 1936년에는 베를린올림픽 대회에서 마라톤을 제패하여 월계관을 머리에 쓴 손기정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일제에 항거(신문사는 일제에 의거 강제 폐간)하고, ‘적의 심장부인 일본 도쿄에서 조선 독립을 외치던 몽양의 기개(氣槪)를 회상해본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완의 장으로 남은 몽양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빌며 오늘의 장정을 마무리한다.

 

<몽양선생을 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