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오대산 비로봉을 다녀와서

와야 정유순 2019. 10. 22. 01:59

오대산 비로봉을 다녀와서

(20191019)

瓦也 정유순

  ‘지구(地球)엔 돋아난 이 아름다웁다신석정 시인의 노래처럼 전 국토의 3분의 2 이상이 산지로 되어있는 우리나라에는 많은 산이 있다. 그중에서도 2002년 산림청에서 선정 발표한 100대 명산의 하나인 오대산을 찾기 위해 새벽길을 나선다. 오대산(五臺山)은 우리나라 문수신앙의 성지이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오대산 사고(史庫)가 있던 역사적인 장소이자 백두대간의 중추로 생태적 가치가 높은 장소다.

<오대산의 가을>


   고속도로 나들목을 빠져나가 월정사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차는 거북이걸음이다. 비로봉(毘盧峰)까지 갔다 오려면 최소한 오전 11시까지 상원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하여야 하는데, 다행스럽게 그 이전에 도착하여 바로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 구간에 있는 상원사와 사자암 그리고 적멸보궁은 비로봉에서 내려오면서 둘러 보기로 했다. 오대산은 197511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비로봉(1563m)을 주봉으로 동대산(1434m), 두로봉(1422m), 상왕봉(1491m), 호령봉(1561m) 등 다섯 봉우리가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비로봉 입구>


   원래 유명한 산이라 사람들로 붐빈다. 주차장에서부터 비로봉까지 3.5를 뒤돌아볼 여유도 없이 발걸음은 바쁘다. 적멸보궁까지는 돌계단으로 정비해 놓아서 걷기는 편하다. 적멸보궁 입구를 지나면 흙길이고 경사가 급한 곳은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것으로 보아 정상이 가까워진 것 같다. 마지막 박차를 가해 정상에 올라서니 먼저 올라온 사람들로 붐빈다. 동쪽으로는 노인봉이 보이고 그 끝자락에는 소금강이 위치한다.

<오대산의 노인봉과 동대산>


   두 시간 반 만에 도착하여 준비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하고 비로봉 정상에서 산행 기념 인증사진을 찍으려 하니 늘어선 인파가 장사진이다. 오대산은 원래 중국 산시성[산서성(山西省)] 청량산의 다른 이름으로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 유학할 때 공부했던 곳이다. 그가 귀국하여 전국을 순례하던 중 백두대간의 한가운데 있는 산 형세를 보고 중국 오대산과 흡사하다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국립공원구역 안에는 월정사와 상원사가 소재하며, 이들 사찰에는 많은 암자가 딸려 있다.


<오대산비로봉 정상>


   신라 정신대왕(淨神大王)의 태자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의 두 왕자가 속세를 향한 뜻을 버리고 동행한 일천 명의 사람들 몰래 오대산에 숨었다. 그들이 산속에 이르자 푸른 연꽃이 문득 땅 위에 피었다. 형이 그곳에 암자를 짓고 머물렀는데, 이것을 보천암(寶川庵)이라 하였다. 동북 쪽으로 6백여 보를 가면 북쪽 대()의 남쪽 기슭에도 푸른 연꽃이 핀 곳이 있었는데, 동생 효명도 여기에 암자를 짓고 머무르며 각자 부지런히 불법을 닦았다.

<비로봉 올라가는 계단>


   하루는 형제가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올라 예를 올리려는데, 동대 만월산(滿月山)1만 관음보살의 진신이, 남대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이, 서대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대세지보살이, 북대 상왕산(象王山)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 대아나한(大阿羅漢), 그리고 중대 풍로산(風盧山)을 지로산(地盧山)이라고도 하는데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이 나타났다. 형제는 이와 같은 5만 보살의 진신에 일일이 예를 올렸다.

<길 옆의 확성기>


   올라오면 내려가야 하는 게 자연의 이치이거늘 아쉬움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들을 마음에 새기며 되돌아선다. 올라갈 때 시들하게 보였던 단풍도 내려올수록 선홍빛이 선명하다. 말 그대로 만산홍엽(滿山紅葉)이다. 나무 틈새로 보이는 곳마다 가을은 벌써 내 가슴 속에 사뿐히 안긴다. 지난 태풍이 쓸고 간 자리에는 고목이 뿌리까지 뽑혀 위에서 아래로 누워 있다. 국립공원의 특징은 고사목(枯死木)이라도 뒤처리는 자연(自然)에게 맡기는 것이다. 즉 사람이 관리의 주체가 아니라 자연이 관리하는 것을 도울 뿐이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


   오대산국립공원 지킴터를 지나 고개를 하나 넘으면 적멸보궁이다. 입구에서 올라가는 돌계단 양쪽 난간은 정교하게 세공한 용 한 쌍이 꼬리를 흔든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은 법당 앞에 사리탑을 두고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신라에 화엄사상을 처음 소개한 자장율사(慈裝律師)가 중국의 우타이산[오대산(五台山)]에서 문수보살 앞에 기도하고 가사(袈裟)와 사리(舍利) 5과를 받아와 봉안한 곳이다. 양산 통도사와 설악산 봉정암, 영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그리고 이곳 오대산 상원사에 적멸보궁이 자리한다.

<적멸보궁 입구 용 난간>

 

   오대산 적멸보궁은 5대 적멸보궁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오대산의 비로봉을 등지고 좌우로 상왕봉과 호령봉을 거느려 풍수상으로도 용이 여의주를 문 형상이다. 이 절은 석가세존의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모셨기 때문에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고, 보궁 뒤 1m 높이의 판석에 석탑을 모각한 마애불탑이 상징적으로 서 있을 뿐이다. 불단은 아무도 앉지 않은 좌복만이 불대(佛臺)에 대좌하고 있다. 건물 중앙 칸에는 두 짝의 판장문을 달고 좌우에 중방을 설치한 단순한 구조다.

<오대산 적멸보궁>

<오대산 적멸보궁 연등>


   적멸보궁이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당이다. 보궁은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설법한 인도의 마가다국 가야성 남쪽 보리수 아래 금강좌(金剛座)에서 비롯되는데, 그 후 보궁은 불사리를 봉안함으로써 부처가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을 법계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게 되었다. 적멸(寂滅)번뇌의 불꽃이 꺼져 고요한 상태를 말하는데, ‘육신을 부단히 움직여 게으름이 들어 오지 못하게 하고 생각도 많이 하여 한곳에 머무르지 않게 하는 것이 적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진신사리 마애불탑>


   적멸보궁에서 약 200m 아래에 있는 중대사자암으로 내려온다. 1400(조선 태종)에 중창된 중대사자암(中臺獅子庵)의 본전은 비로전이다. 비로전(毘盧殿)은 비로자나 화엄불국토의 주인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는 전각이다. 비로자나란 깨달음 그 순간의 부처를 <빛의 부처>라는 이름이며, ‘무한한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는다라는 뜻으로 대광명의 화엄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부처의 신광(身光지광(智光)이 이사무애(理事無礙)의 법계(法界)에 두루 비추어 원명(圓明)하는 것을 뜻함이다.

<사자암 전경>

<사자암 비로전과 석등>

<비로전 비로자나불(중앙)>


   대광명의 화엄세계가 도래했는지 상원사로 내려오는 흙길은 단풍으로 더 화려하다. 청자 항아리 같은 석등은 불빛이 더 환할 것 같고, 길옆 돌확 같은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불경 소리가 발걸음을 더 가볍게 한다. 깊은 계곡을 덮은 단풍과 흐르는 세월을 희롱하며 상원사에 도착하면 고목으로 깎아 만든 달마대사가 눈을 부릅뜨며 맞이한다. 달마(達磨)는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 등에 거주하여 불법을 전교했고, 묵묵히 면벽(面壁) 수행을 9년 동안 한 중국 불교 선종(禪宗)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고사목으로 만든 달마>


   상원사마당에도 적멸보궁과 마찬가지로 수능시험의 성공을 비는 연등으로 가득하다. 상원사(上院寺)는 신라 33대 성덕왕 4(705)에 보천(普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가 세운 절로 처음에는 진여원(眞如院)으로 불렀다. 본래 오대산은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전래한 문수도량으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있는 문수신앙의 중심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태조와 세조가 원찰로 삼으면서 상원사에는 여러 전설과 소중한 문화재가 있다. 현존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동종(銅鐘)이다.

<오대산 상원사>


  국보 제36호로 지정된 상원사 동종은 신라 성덕왕 25(725)에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동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이 종은 안동의 관풍루에 걸려 있던 것을 1469(예종 원년)에 상원사로 옮겼다고 한다, 종 표면에는 구름 위로 하늘을 날면서 옷깃을 흩날리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이 양각되어 있으며, 이 범종의 맑은소리는 오대산 너머 동해까지 은은하게 퍼진다고 한다.

<상원사 동종-네이버캡쳐>


   상원사는 특히 조선 7대 임금 세조와 인연이 깊다.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만나 불치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세조가 상원사 앞 계곡에서 목욕할 때, 동자승을 만나 등을 밀게 하고는어디 가서 임금의 옥체를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자, 동자승도임금께서도 문수보살이 등을 밀었다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홀연히 사라졌다. 이후 세조는 피부병이 완치되고 그때 만난 동자승을 나무에 조각하였으며, 이 목각상이 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이다.

<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네이버캡쳐>


   이때 세조가 목욕하면서 의관을 걸어둔 곳을 기념해서 후대에 만든 표지석이 <관대걸이>. 주차장에서 상원사 입구에 다다르면 상원사 입구 매점 옆, 철책으로 둘러싸인 버섯 모양의 비석으로 갓거리(갓걸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인연으로 세조는 친히 권선문을 작성하고 진여원을 확장하였으며, 이름을상원사’(上院寺)라 바꾸고 원찰(願刹)로 정하여 문수동자상을 봉안했다. 문수전(文殊殿)에 모셔진 문수동자상은 조선 초기 조각의 걸작이다.

<관대걸이>


   그리고 세조가 상원사를 찾아 법당으로 들어서려 할 때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옷자락을 물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는데 알고 보니 법당 안에 자객이 숨어들어 있었다. 고양이로 인해 목숨을 건진 세조는 사찰에 전답을 하사하였는데 그 전답은 묘답(猫畓; 고양이 논), 묘전(猫田; 고양이 밭)이라 불렀다. 세조는 궁궐로 돌아와 고양이를 잡아 죽이지 말라는 왕명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상원사 고양이 석상은 이 일을 기리기 위해 사찰에서 만든 것으로 문수전 올라가는 계단 왼쪽에 있다 

<상원사 고양이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