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일곱 번째-1)
(충주 중원탑-여주시 도리, 2019년 8월 24일∼25)
瓦也 정유순
옛날 문경새재를 넘어 수안보를 지나 수회리에 다다르면 적보산(積寶山, 699m, 일명 첩푸산) 줄기가 뻗어 내리다가 석문천에 닿아 멈춘 곳에 마당 같이 넓고 평평한 반석을 만들어 놓은 마당바위가 있다고 하여 전번에 조반을 마치고 찾았으나 사유지라 철조망이 가로 막혀 들르지 못했다가 이번에는 남에서 북으로 넘어가는 길목 풀 섶을 해치고 아침이슬로 발목을 적시며 마당바위를 찾아간다.
<마당바위 가는 길>
연산군 때 충주로 유배 온 문신 이행(李荇, 1478년∼1534년)은 그의 자연대설(自然臺說)에서 “산은 우뚝함도 자연이요. 물이 흘러감도 자연이요. 벼랑이 산수의 형세를 점거하여 독차지함도 자연이요. 오늘 우리가 이곳을 만난 것도 자연이요…”라고 읊었다. 그의 말대로 마당바위를 보지 못하고 돌아섬도 자연이고, 다시 길을 찾아보는 것도 자연이련가? 참고로 자연대(自然臺)는 이곳에서 가까운 월악산국립공원 송계계곡 첫 입구에 있는 곳으로 맑은 계곡물과 넓은 암반, 깊은 소가 인상적인 곳이다.
<마당바위 옆의 학사대>
마당바위는 마당처럼 넓은 바위로 이 바위가 있는 적보산은 ‘패랭이번던’이라고도 불린다. ‘번던’은 ‘언덕’을 의미한다. 조선 명종 때 한 지관이 충주에 머물다 꿈에 선인을 만나 따라 나섰는데, 선인은 이 마당바위에서 술과 안주를 마련하고 서쪽 산을 가리킨 뒤 구름을 타고 날아가면서 꿈에서 깨어난다. 다음날 지관은 선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가다 이 바위에 패랭이를 벗어 나무에 걸어 놓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을 지나가던 행인들이 보고 이를 ‘패랭이버던’이라고 불렀다.
<마당바위>
마당바위가 있는 이 길은 영남대로(嶺南大路) 옛길이다. 영남대로는 부산에서 대구, 문경새재, 충주, 용인을 거쳐 서울로 이어지는 약960리 길로, 걸어서 완주하면 약14일이 걸렸다고 한다. 이 길은 경상도의 59개 군현, 충청도와 경기도의 5개 군현에 걸쳐 있고, 29개의 지선이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영남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영남대로 외에도 죽령을 넘어 서울로 15일 만에 가는 영남좌로와 추풍령을 넘어 16일 만에 가는 영남우로가 있었다.
<영남대로 옛길-충주시 수안보면 구간>
마당바위 옆에는 길이 73∼132㎝, 너비 99∼142㎝ 정도되는 화강암 자연석의 한 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현감서공유돈선정불망비(縣監徐公有惇善政不忘碑)’ 글자를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이것은 연풍현감을 지낸 서유돈(徐有惇)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연풍현과 충주목의 경계지점에 1798년경에 세운 것이다. 선정비를 현청이 있던 연풍향교 옆에 세우지 않고 이곳에 건립한 이유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영남대로 길목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서유돈은 31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연풍현감을 지냈고 39세에 세상을 떠났다.
<서유돈 선정불망비>
반대방향인 북으로 나올 때는 앞을 가린 철조망과 씨름하듯 통과하여 오늘의 출발지인 충주시 중앙탑면 탄금호 주변에 있는 중앙탑공원으로 이동한다. 중앙탑면(中央塔面)은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북쪽의 가흥면과 남쪽의 금천면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가금면이라고 했다. 그러나 가금면이라는 명칭은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날짐승을 연상시키며, 인근 금가면과 명칭이 유사해 혼동을 주는 등의 이유로 주민들의 명칭 변경 요청이 이어졌다고 한다.
<중앙탑공원 조각작품>
이에 2012년 2월 명칭 변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주민 투표를 거쳐 2014년 2월 1일 충주시 행정구역 명칭 변경에 따라 중앙탑면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예부터 중앙탑면 지역에는 조창이 있었는데,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는 창동리 지역에 덕흥창(德興倉)이 있다가 세조 때 가흥리로 옮겨 가흥창(嘉興倉)이 되었다. 그리고 개칭된 ‘중앙탑면’이라는 명칭은 중원문화의 중심지였던 이 지역에 세워진 후기신라 시대 석탑(국보 제6호)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의 별칭인 ‘중앙탑’에서 유래하였다.
<중앙탑>
<중앙탑면사무소>
국제조정경기장이 있는 탄금호(彈琴湖)는 1985년 충주댐과 함께 건설된 조정지댐으로 원래 특별한 명칭 없이 그냥 조정지호라고 불리다가 2004년 충주시가 시민과 공무원을 대상으로 공모를 하여 호수 이름을 탄금호(彈琴湖)로 정하고, 2004년 8월에 명명식을 했다. 탄금호란 명칭은 명승지 탄금대(彈琴臺)가 있어 얻게 되었다. 탄금호는 겨울철새를 비롯한 각종 조류의 보금자리로, 가금체육공원에는 탄금호에서 서식하는 텃새와 겨울철새들을 관찰할 수 있는 철새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탄금호>
<탄금호 철새전망대>
<탄금호조정경기장 관람석>
충주조정지(調整池)댐은 금가면 월성리와 중앙탑면 장천리 사이에 있는 충주댐의 보조 댐으로 본 댐인 충주댐의 홍수 조절을 도와주고 충주댐 발전(發電)으로 일시에 흘러내린 물을 일단 비축하였다가 수온(水溫)과 수질(水質) 및 수량(水量)을 고르게 하류로 공급을 하면서 동시에 발전 시설을 가동하는 댐이다. 간접 효과로는 댐 하류부의 하천용수를 고르게 유지함으로서 수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높이 21m, 길이 480.7m, 총 저수용량 3,000만㎥, 문비 20문(높이 7.7m, 폭 15m), 발전시설 12,000㎾ 규모다.
<충주조정지댐>
<조정지댐 공도>
조정지댐을 지나 하류로 내려오면 하천부지에는 수생식물대가 잘 발달되어 숲을 이루고, 강변 숲 사이로 난 자전거도로 옆으로는 ‘사랑바위’가 애절한 전설을 이야기 한다. 부잣집 5대독자가 결혼을 하여 아들을 얻지 못하자 후사를 보기 위해 집안에서 첩(妾)을 들였는데, 아들은 본처만 사랑하고 첩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본처는 자신 때문에 후사가 없음을 걱정하여 장자못에 몸을 던지고, 아들도 식음을 전폐하다가 뒤따른다.
<사랑바위 옆 자전거도로>
후에 장자못의 물이 마르더니 남·여의 성기가 결합된 상태의 바위가 있고, 올망졸망한 작은 바위들이 옆으로 놓여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며느리와 아들이 저승에서 여러 아이들을 낳고 ‘이승에서 못다 이룬 소망을 죽어서 이루었다’며 여성의 성기를 닮은 바위를 ‘사랑바위’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바위 주위를 아홉 번 돌며 간절히 기원을 하면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사랑바위>
사랑바위 옆에는 ‘장자 늪(못)’이 있는데, 놀부의 심보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원래 이곳 장천리에는 천석꾼인 장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인색하고 몰인정하고 욕심쟁이로 어느 날 노승이 시주를 하러왔는데 때마침 거름을 내던 장자는 노승 바랑에 쇠똥 한 삽을 넣어 주고 목탁과 발을 빼앗아 때려 부셨다. 이 때 착한 며느리가 나타나 시아버지의 잘못을 사과드리며 쌀 한 바가지를 들고 왔다. 노승은 돌아서며 “3일 후 신시에 있는 상좌승 하나가 동구 밖 느티나무 밑에서 부인을 기다릴 터이니 만나라”고 하고는 사라진다.
<장자늪 안내문>
3일 후 동구 밖에 나가보니 상좌승이 기다리고 있다가 지금부터는 소승이 하는 대로만 하여야 된다고 했다. 입을 떼지 말며 무슨 소란이 있어도 그곳을 바라보지 말라고 했다. 며느리가 상좌승을 따라 가다 별안간 찬바람이 뒤에서 성벽을 향해 불어 올라가는가 싶더니 하늘이 무너지듯 굉음이 울렸다. 무의식중에 며느리가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장자의 집은 사라져 버리고 호수로 변해 장자가 비명을 지르며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선 채로 한 개의 부도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남한강변의 밭 이랑>
장자늪 대신 안내판만 읽어보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밭에는 가을채소를 파종하기 위해 이랑을 내었고, 남한강을 가로지르는 중부내륙고속도로(경남 창원∼경기 양평)의 남한강대교와 제38호국도(충남 서산∼강원 동해시)의 목계대교도 하늘을 향해 줄을 선다. 내 발길은 저 높은 교각 대신 제599호 지방도로인 목계교를 건너 목계나루터에 당도한다. 목계교(牧溪橋)는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와 중앙탑면 장천리를 연결하는 남한강 교량이다.
<38호국도 목계대교(좌)와 중부내륙고속도로(우)>
남한강의 목계나루는 1930년대 충북선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 남한강 수운물류교역의 중심지로 큰 마을이 형성되어 뱃길로는 서울에, 육로(陸路)로는 강원, 충청, 경상, 경기에 이르는 큰 길목이었다. 또한 전성기 때 가구 수가 800호 이상 되었던 큰 도회지로 100여 척의 상선이 집결하던 곳이다. 조선 후기에는 내륙항 가운데서 가장 큰 규모였으나, 번성했던 목계장터는 충북선 열차 개통으로 남한강의 수송기능이 완전히 끊어졌고, 1973년에 목계대교가 놓이면서 목계나루의 나룻배도 사라져 목계장터는 쇠퇴하였다.
<목계나루터 표지석>
옛날 충주 목계나루터에는 강배체험관과 전통주막, 저잣거리 등이 재현해 놓았으나 사람의 발길은 뜸 한 것 같다. 대신 충주출신 시인 신경림(申庚林, 1936. 4. 6∼)의 시비(詩碑) <목계장터>만 옛날의 번성했던 길목을 지킨다.
<목계나루터 체험장 안내도>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신경림 시비>
<목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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