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논산의 문화유적을 따라(4-完)
(2019년 8월 10일∼11일)
瓦也 정유순
어젯밤 몸을 의탁한 곳은 논산시 연산면 제1호 국도(목포∼신의주)변의 어느 여관이다. 그리고 조반을 하면서 주인에게 확인한 결과 백제의 최후 보루였던 황산벌이 바로 이웃이다. 어제 들렸던 돈암서원이 지근거리에 있고, 이 서원에 주향(主享)된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사계종가(沙溪宗家)’와 ‘김장생선생 묘역’이 가까운 연산면 고정리에 있어 아침 길을 재촉한다.
<김장생선생 묘소일원 지도>
주차장에 도착하니 바로 옆의 연지(蓮池)에는 늦게 핀 흰색 연꽃은 수줍음도 잊은 채 속살을 훤하게 내보이며 손짓한다. 솟을대문 대신 쪽문으로 종가에 들어서면 마당 가운데에 맨드라미 피어 있고, ‘염수재(念修齋)’라는 현판을 단 안채가 창문을 활짝 열고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안 것처럼 기다린다. 염수재 토방 아래 마당에는 정료대(庭燎臺)가 서 있다. 정료대는 야간 일을 할 때 등불이나 화톳불을 올려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돌로 만든 받침이다.
<사계종가-염수재>
<염수재 현판>
염수재를 중심으로 뒤편에는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 있으며, 우측에 있는 서재(西齋)는 종손(宗孫)이 방문객과 담소 등 사적용도로 사용한다. 좌측의 동재(東齋)는 종손부부의 살림집으로 다실(茶室)을 운영한다. 마당을 서성이며 발길 닿는 대로 구경을 하고 있는데,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방문객을 보고 약간 의아한 종부(宗婦)의 모습이었으나 금방 평상으로 돌아온다. 우리도 대추차를 주문하여 종갓집의 전통 차 맛을 음미하며 덕목이 몸에 밴 모습이 예학(禮學)의 대가인 사계의 종갓집 종부다운 면모를 엿본다.
<사당입구>
서울 중구 정동에서 출생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본관이 광산이며, 자 희원(希元), 호 사계(沙溪), 시호 문원(文元)이다. 선조 때 서인(西人)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효종 때의 예학으로 주목받았던 김집(金集)의 아버지이다. 이이(李珥)와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나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하다가, 1578년(선조 11)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됨으로써 벼슬과 연을 맺는다.
<사계 김장생-네이버캡쳐>
임진왜란 중에는 정산(定山)현감으로 있으면서 피난 온 사대부들을 구휼하였다. 1596년 호조정랑이 되어 남하하는 명(明)나라 원군의 군량조달을 담당하였으며, 선조 말과 광해군대에는 단양·안성·익산·철원 등 주로 지방관을 맡았다. 1613년(광해군5)에는 서얼들이 일으킨 역모사건(계축화옥)에 연루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난 후 연산(連山)으로 낙향·은거하면서 예학 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1657년(효종8)에는 영의정에 추증(追贈)되고 ‘문원(文元)’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받았다.
<보호수로 지정된 배롱나무>
사계 가문은 세도가보다는 대대로 학자를 많이 배출했는데 묘역에서 앞쪽 멀리 보이는 산은 금남정맥으로 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 발복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지형이라고 한다. 사계는 조선 예학의 한 줄기를 형성했고 제자로 아들인 김집을 비롯하여 송시열과 송준길, 윤증 등의 대학자를 많이 배출했다. ‘김장생선생 묘역’은 광산김씨 종중에서 관리하며, 1984년 7월 26일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되었다.
<김장생선생 묘역(전)>
사계종가 뒤로 올라서면 바로 ‘김장생선생 묘역’이다. 묘역 주변이 소나무 숲으로 둘러 싸여 있고 김씨 일가의 묘소와 사당, 비 등이 한곳에 모여 있다. 묘역의 맨 위에는 김장생의 묘가 있고, 그 아래에 김장생의 7대 조모인 양천허씨 묘가 있으며, 허씨의 아들인 6대 조부 김철산을 비롯하여 김겸광, 김공휘 등의 묘지가 있다. 이는 후손이 조상보다 위에 있는 역장(逆葬)으로 지금 같으면 비난 받을 만한 일이지만, 그 시대에는 별로 문제 삼지 않은 것 같다. 사계의 스승인 율곡의 파주에 있는 묘역도 역장이다.
<김장생선생 묘역(후)>
광산김씨의 중흥을 이룬 사계의 7대 조모 양천허씨(陽川 許氏)는 조선 태조 때 대사헌을 지낸 허응(許應)의 딸로 광산김씨 김문(金問)과 결혼하였다. 17세에 남편이 죽자 부모가 다시 출가시키려고 하므로 아이를 데리고 시댁인 개성에서 연산으로 가서 평생을 마쳤다.
<사계종가 연지>
양천허씨는 유복자인 김철산(金鐵山)을 정성을 다해 키워 좌의정을 지낸 손자 김국광(金國光)을 비롯하여 김계휘(金桂輝),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김반(金槃) 등 조선시대 정치·사상계의 주요 인물을 배출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이러한 절행이 조정에 알려져 1467년(세조 13) 명정을 받는다. 명정(命旌)은 ‘절부 예문관 검열 증 의정부 좌찬성 김문 처 증 정경부인양천허씨지려(節夫藝文館檢閱贈議政府左贊成金問妻贈貞敬夫人陽川許氏之閭)’라고 쓰여 있다.
<양천허씨 정려>
논산에도 쌍계사가 있다고 하여 양촌면 중산리로 이동한다. 쌍계사 현판이 걸려 있는 봉황루(鳳凰樓) 밑 계단에 올라서면 절 마당에 그 흔한 석탑이나 석등이 하나 없이 잔디가 푸르게 깔려있고, 한 눈에 쏙 들어오는 대웅전(보물 제408호)이 위용을 자랑한다. 이 쌍계사(雙磎溪寺)는 고려 초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건조한 혜명(慧明)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온다.
<쌍계사 봉황루>
<쌍계사 대웅전>
대웅전은 문병·봉설(鳳舌)·용두(龍頭)의 장식과 문양이 화려하며, 내부에 봉안된 삼존불 위에는 각기 다른 닫집을 달아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하였고, 정면의 꽃살문은 예술적 가치가 높은 보기 드문 것이다. 특히, 대웅전 내부의 오른쪽 세 번째 기둥은 굵은 칡덩굴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윤달이 들은 해에 노인들이 이 기둥을 안고 돌면 죽을 때 고통을 면하게 된다고 한다.
<쌍계사 삼존불>
<쌍계사 닫집>
<쌍계사 꽃살문>
그 밖에 나한전(羅漢殿)·명부전(冥府殿)·칠성각(七星閣)·봉황루(鳳皇樓)·영명각(靈明閣) 등을 대충 둘러보고 마당으로 내려오면 느티나무 두 그루의 뿌리가 합쳐진 괴목연리근(槐木連理根)이 잎이 무성하게 펼쳐진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연리목이 나타나면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길조(吉兆)로 여겼다. 절 입구는 취봉당혜찬대사지도(翠峰堂慧燦大師之屠) 등 9기 부도가 있는데, 대부분이 석종형(石鐘型)이다.
<연리근 느티나무>
주마간산 격으로 쌍계사를 둘러보고 후백제의 아픔이 묻혀있는 연무읍 금곡리 견훤왕릉(甄萱王陵)으로 이동한다. 경북 문경 가은출신 견훤(甄萱, ?∼936)은 900년에 후백제를 세우고 중국의 오∙월(吳越)나라와 수교를 하며 궁예와 왕건에 대항하였다. 927년에는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자결하도록 하고 경순왕을 세우는 등 후삼국 중 가장 막강한 세력이었으나, 후계문제로 장남 신검에게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도망 나와 왕건에게 항복하고, 그를 도와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등창으로 죽는다.
<후백제왕견훤릉>
죽을 때 후백제의 산천이 보고 싶고 도읍지 완산(전주)을 바라볼 수 있는 쪽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묘를 썼다고 전해 내려오는데, 옛 후백제 땅인 익산의 미륵산과 완주의 예봉산이 들녘 건너로 지척이다. 지금까지 ‘견훤의 묘’로만 전해 왔으며, 봉분 주변에는 상석 외에는 아무런 석물이 없는데, 문중에서 세운 ‘후백제왕견훤릉(後百濟王甄萱陵)’ 비석이 능을 지킨다. 충남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었다.
<견훤왕릉과 배롱나무>
논산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이라는 남연군묘를 보기 위해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로 향한다. 충청남도기념물(제80호)로 지정된 남연군묘는 풍수지리에 문외한일지라도 묘 뒤편 가야산의 능선들이나 묘 앞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 덕산 쪽만 바라보아도 좌우로 뻗은 능선이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로 명당이라고 느낄 만큼 빼어난 곳임을 알 수 있다.
<가야산>
<남연군묘 앞>
더욱이 풍수지리설을 믿은 대원군 이하응이 한 지관(地官)에게 명당을 찾아줄 것을 부탁하자, 지관은 이 자리를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二代天子之地]’로 지목하였다고 한다. 7년 후 대원군은 차남 재황(載晃)을 얻었는데, 이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고, 그의 아들이 순종으로 두 분 다 대한제국 황제다. 2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 그 후 조선은 어떻게 되었는가?
<남연군묘>
1868년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가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한 뒤 대원군과 흥정하기 위하여 이 묘의 시체와 부장품을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외적으로는 서양인의 위신이 크게 떨어졌고, 크게 노한 대원군은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탄압을 가중시켰다.
<남연군묘 석물>
남연군묘 올라가는 길목에는 상여(喪輿)집이 있다. 이 상여는 경기도 연천에서 이곳으로 남연군의 묘를 옮길 때 통과지역 주민을 동원하였다. 마지막 구간을 담당한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 주민들이 극진히 모셨기 때문에 마을에 주었는데, 이에 마을의 이름을 따서 ‘남은들 상여’라 하였다. 이 궁중상여는 장강(長杠) 위에 구름차일을 친 용봉(龍鳳)상여로 4귀에는 용모양의 금박이 있고, 중앙부위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동자상이 있으며, 휘장은 흑(黑)·황(黃)·백(白) 천으로 되어 근엄하면서 호화롭다.
<남은들 상여>
묘역 밑으로는 남연군묘 때문에 고려 때부터 존속해 오다가 폐사가 된 ‘가야사 터’를 충남기념물(제150호)로 지정하고, 예산군에서는 가야사 터의 보수 및 복원·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조사(2012∼2014)를 하여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하는 8동의 건물 터를 확인 할 수 있었고, 석조불상 8점, 청동불두 1점과 명문(銘文)기와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가야사 터에 대한 건물 배치 및 사명(寺名)을 알게 되었다.
<가야서 터 주춧돌>
계획된 일정을 모두 마무리하고 귀로 길에 배롱나무 꽃이 좋다는 서산시 운산면의 문수사를 둘러보기로 한다. 문수사(文殊寺)의 확실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 수 없지만 1973년에 극락실전 내에 안치된 금동여래좌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서 고려 제29대 충목왕2년(1346)이란 기록이 있어 고려 때 창건된 사찰로 추정된다. 한편 발원문 발견 시에 생모시, 단수포, 쌀, 보리 등 600여 점이 함께 발견되기도 하였다.
<문수사 극락보전>
조용한 산사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봄철에는 주위의 산과 목장에 벚꽃과 야생화가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는 문수사는 한적한 작은 사찰이다. 본전인 극락보전은 문이 닫혀 있어 보물(제1572호)로 지정된 ‘문수사금동여래좌상’과 복장유물은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마당에 활짝 핀 배롱나무 꽃은 발정 난 수컷공작의 긴 꼬리 깃털처럼 꽃망울을 바짝 세워 세월의 발길을 유혹한다.
<문수사 배롱나무>
모든 일정을 마치고 올라오는 길에 차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고 지나온 발걸음을 더듬어 보며 사계종가 서재에 걸려 있던 편액의 글씨 <知者不言>을 마음에 새겨본다. 이는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제56장의 첫 구절에 나오는 문구로 知者不言言者不知(지자불언언자부지)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라는 뜻으로, 말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말로 인한 오류를 경계하는 말이다.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나는 어느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을까? (完)
<지자불언(知者不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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