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일곱 번째-3)
(충주 중원탑-여주시 도리, 2019년 8월 24일∼25)
瓦也 정유순
밤새 남한강은 충주시 소태면을 지나 앙성면으로 굽이쳐 흘러든다. 앙성면(仰城面)은 1914년 일제치하의 행정구역 개편 시 앙암면(仰岩面)과 복성면(福城面)에서 ‘앙(仰)’자와 ‘성(城)’자를 따 앙성면(仰城面)이 되었다. 1956년 7월 8일 중원군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됨에 따라 중원군 앙성면으로 되었다가 1995년 1월 중원군이 충주시와 통합되면서 충주시 소속이 된다. 앙성면은 남한강을 따라 경치가 수려하고, 탄산온천으로 유명하며 한우와 복숭아가 입맛을 돋우는 곳이다.
<남한강-충주 앙성면>
앙성면 강천리 강둑 우측 아래로 시원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유혹한다. 이 나무도 수령 400년 이상 된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그 옆에는 용머리에서 솟아나오는 우물이 나그네의 목을 축여준다. 이 느티나무는 샘개마을을 지켜주는 수호목(守護木)이었고, 그 옆의 ‘샘개우물’은 마을 사람들의 생명수였다. 100여 년 전만 해도 서울로 향하는 중요한 나루로서 5일장이 서던 큰 마을이었는데, 강 건너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을 잇는 남한강대교가 놓인 뒤로는 고기 잡는 작은 배 한 척만 놓여 있어 고독한 나루터가 되었다.
<샘개마을 느티나무>
<샘개우물>
강둑 왼쪽으로는 자두나무열매가 시고 달콤한 맛을 풍긴다. ‘오얏나무’라고도 불리는 자두나무는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 즉 “오얏나무 아래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으로, ‘남에게 의심받을 행동은 하지 말라’는 교훈도 이 나무에서 기인(起因)한다. 또한 창덕궁 인정전 용마루에 새겨진 대한제국의 ‘이화문(李花紋)’이 바로 자두나무 꽃이다. 그러나 이화문은 일제가 조선왕조를 이왕가로 격하시키면서 박았다는 의견이 있다. 이는 일제가 창덕궁의 전통양식 일부를 일본식으로 고치면서도 손을 대지 않은 것에 주목한다.
<자두나무>
앙성면 단암리 남한강 둔치에 스카이다이빙 체험시설이 있다. 스카이다이빙은 지상 3∼4㎞ 상공에서 비행기 밖으로 뛰어내린 후 낙하산을 펴기 전까지 약 1분간 자유낙하를 체험한 다음 5분 정도 지상으로 내려오는 익스트림 스포츠(Extreme Sports)다. 만 18세 이상, 몸무게 100㎏ 이하의 조건만 충족하면 누구나 20분 정도의 안전교육을 받은 후 비행복과 헬멧, 보호안경을 착용한 뒤 전문교관의 도움을 받아 하늘을 날게 된다고 한다.
<스카이다이빙 비행기활공장>
마음만 창공에 날려 보내고 발길은 의암마을을 지난다. 마을의 뒷산의 바위가 옷을 입고 있는 형상을 하여 옷 의(衣), 바위 암(岩)자를 써서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의암마을에서 남한강대교를 건너면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이다. 부론면(富論面)은 원주시 남서쪽에 위치한다. 한강 수상교통의 요지였던 흥호리가 면소재지였으나 1936년 대홍수로 주민들의 생활중심이 법천리로 이동함에 따라 면사무소도 1950년 3월 이전하였다. 교통은 영동고속도로가 북쪽 면을 지나고, 면 일대에 지방도가 잘 발달되어 있다.
<의암마을>
<남한강대교>
<부론면사무소>
버스정류장에 <흥원창>산수화가 걸려있는 흥호리(興湖里)는 흥원창(興原倉)이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 원주에는 북창(北倉, 안창), 동창(東倉, 주천), 서창(西倉, 흥원) 등의 창고가 있었는데, 서창이 바로 흥원(興原)에 있었기 때문에 보통 ‘흥원창’이라 불렀다. 흥원창은 고려시대 12조창(漕倉)의 하나로 강원도의 원주·평창·정선·울진·평해 등지를 관할하여 세곡(稅穀)을 운반·보관하던 곳으로, 조세미(租稅米) 수송을 위하여 설치한 수운창(水運倉)이다.
<버스정류장에 걸린 흥원창도>
이 조창의 제도가 완비된 것은 고려 성종 11년(992년)경이다. 세미(稅米)의 수송은 국가재정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므로 조창의 운영과 안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고, 횡령과 부정을 막기 위해 각 조창에 창감(倉監)을 파견하였다. 고려 말에는 왜구(倭寇)의 창궐로 수송은 전폐되다시피 하여 거의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조운제도가 다시 정비되었으나 전처럼 활발하지 않았으며, 한국전쟁 이전까지도 배 터와 장터가 몇 군데 있었는데, 홍수로 다 떠내려가고 최근에 세워진 자연석 표지석이 터를 지킨다.
<흥원창 표지석>
남한강이 충주에서 북으로 뻗쳐 올라오다가 이곳 흥호리에서 섬강(蟾江)을 만나 서쪽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어 당장이라도 서해로 들어갈 것 같은 기세다. 그래서 해질 무렵이면 보기 드문 해넘이가 장관이라고 하는데 오늘은 오전시간이라 마음속으로만 상상해본다. 섬강은 강원도 횡성의 태기산(泰岐山)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가 원주시를 지나 남서쪽으로 물길을 바꾸어 한강에 합류한다. 비교적 강수량이 많은 지역을 통과하므로 수량이 많고, 금계천(錦溪川)·횡성천(橫城川)·원주천(原州川) 등의 지류가 합류한다.
<남한강과 섬강(우) 합수지점>
이웃 마을인 법천리에는 ‘진리[法]가 샘물[泉]처럼 흐른다’는 법천사지가 있다. 법천사는 불교의 양대 교단이었던 법상종과 화엄종 가운데 법상종계의 절로, 후기신라시대에 세웠고 고려시대에 크게 융성하였다. 고려 문종(1019∼1083) 때에 지광국사(984∼1067)가 이곳에 머물면서 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없어진 뒤로 새로 짓지 못해서 현재는 폐사되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조선 초기에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이 여기에 머물면서 권람, 한명회, 강효문, 서거정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법천사지>
한참 발굴 중인 너른 절터를 지나 산모퉁이로 올라서면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제59호)가 있다. 법천사 터에 세워진 지광국사(984∼1067)의 탑비로, 국사가 1067년(고려 문종21)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현묘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놓았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 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하였는데, 이는 왕사(王師)를 지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북받침돌>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긴 수염이 달려 있고 부릅뜬 눈은 험상궂다. 오석(烏石)으로 된 비 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지금이라도 승천하는 모습이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지광국사현묘탑비>
국보(제101호)로 지정되어 현재 경복궁에 있는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玄妙塔)은 한국의 석탑 중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탑이다. 원주출신인 지광국사는 왕사와 국사(國師)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전체 높이는 6.1m로 원래는 이곳 법천리(法泉里) 법천사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반환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일제 강점기의 수탈과 한국전쟁에 탑신이 붕괴되는 아픔을 견뎌내며 원주를 떠난지 108년 동안 떠돌아다니다가 문화재연구소에서 보수가 끝나면 제자리로 돌아온다.
<지광국사현묘탑 모형도>
고려 전기의 것으로 추측되는 법천사의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이미 절터에 마을이 형성된 귀퉁이에 있는 것으로 보아 법천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는가를 보여준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깃발을 달게 되는데, 이 깃발을 거는 길 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시켜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남아있는 예가 있으나, 대개는 두 지주만이 남아있다. 당간은 무쇠로 되어 있어 대부분 일제 때 철의 공출로 많이 없어졌다.
<법천사 당간지주>
이 당간지주는 지광국사현묘탑비와 함께 남아있어 법천사 절터를 지키고 있다. 기둥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으며,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있다. 기둥사이에는 당간을 꽂아두기 위한 받침돌을 둥글게 다듬어 마련해 놓았다. 두 기둥의 윗부분은 모서리를 깎아 둥글게 다듬어 놓았고, 안쪽 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파놓았다. 또 하나 이 절터를 지키는 느티나무는 속이 텅 빈 채 절터 입구에 서있는데, 이 절의 영욕을 말해준다.
<법천사지 느티나무>
법천사지를 나와 부론면 손곡리로 이동한다. 손곡리(蓀谷里)의 원래 이름은 손위실(遜位室)이다. 이는 고려 말에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마지막 ‘왕위를 내주고 피거(避居)한 마을’ 이라 해서 불러진 이름이다. 그러다가 공양왕의 호가 손곡이라 지명이 되었고, 조선시대 서얼 출신 이달(李達)은 신분적 제약으로 벼슬길이 막힌 울분을 시문(詩文)으로 달래며 지금의 부론면 손곡리(蓀谷里)에 은거하며 호를 손곡이라 하고 제자교육으로 여생을 보냈다. 특히 말년에 허균(許筠)을 가르쳤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손곡시비쉼터>
허균의 <홍길동전>은 그 당시 그의 스승인 이달(1539∼1612)의 한을 소설로 쓴 것이 아닌 가 생각한다. 손곡의 묘소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허균이 엮은 손곡집(蓀谷集) 등이 있다. 지금 원주시 부론면 손곡1리 노변에 손곡 시비가 세워져있다. 시의 내용은 (‘손곡집 권 6’에 실린 예맥요(刈麥謠)다.
시골집 젊은 아낙네 저녁거리 없어
(田家少婦無夜食, 전가소부무야식)
비 맞으며 보리 베어 숲길로 돌아오니
(雨中刈麥林中歸, 우중예맥임중귀)
생나무습기로 연기만 나고 불길은 안 일어
(生薪帶濕煙不起, 생신대습연불기)
문에 들어서자 아이들 옷깃 잡고 울부짖네
(入門兒子啼牽衣, 입문아자제견의)
<손곡시비>
그리고 바로 옆에는 임경업장군추모비(林慶業將軍追慕碑)가 서있다. 충주 달천 출신으로 알려진 임경업(1594∼1646)은 이곳 부론면 손곡리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전쟁놀이 등 힘겨루기를 좋아했으며, 항상 이겼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린 부하가 말을 안 들으면 군율을 어겼다고 낫으로 찍는 등 심한장난으로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며, 이런 연유로 6세 때 충주로 이사했다고 한다.
<임경업장군추모비>
임경업은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합격한 조선의 명장(名將)이 되고, 명·청(明靑)교체기에 나라를 위해 많은 공을 세우지만, 국법을 어겼다는 누명을 쓰고 인조(仁祖)의 친국 때 모진 매로 숨진다. 1697년(숙종23) 12월 왕의 특명으로 복관(復官)되었고, 충주 충렬사(忠烈祠) 등에 제향 되었다. 이 추모비는 1968년 원주문화원의 고증을 거쳐 장군의 생가 터에 세웠다고 한다.
<남한강 자전거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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