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논산의 문화유적을 따라(2)
(2019년 8월 10일∼11일)
瓦也 정유순
밀려오는 사람들에 떠밀려 명재고택을 빠져나와 논산시 등화동에 있는 보명사로 이동한다. 봉화산 자락에 안긴 보명사(普明寺)는 백제 의자왕 이궁터와 황하산성 등 백제문화 유적지에 자리 잡은 사찰로, 1910년 창건된 조계종 소속 기도도량이다. 관촉사, 쌍계사 등 천년 사찰이 가까운 곳에 있어 논산에서 100년 남짓 된 보명사는 인지도가 낮아 인적이 드물다. 그러나 보명사의 배롱나무 꽃만큼은 천년 사찰의 고색창연한 아름다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관음전, 삼성각, 요사채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다.
<보명사 관음전>
<보명사 배롱나무>
보명사를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황화산성(皇華山城)은 구릉형 야산에 테뫼형의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정상에 올라서면 논산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군사적 전략 요충지다. 둘레는 840m이고 흙벽의 높이는 안쪽 4.5m, 바깥쪽 5m이며 성벽 위 부분의 폭은 1.2m다. 평면이 방형에 가깝고 동·서·북문의 터가 확인되며, 성안의 내호(內濠)로 보이는 통로가 동쪽을 제외하고 전체 돌려져 있다. 모기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범바위를 둘러보고 산성을 한 바퀴 돌아보며 오전을 마무리 한다.
<황화산성>
<범바위>
오후에는 논산시 관촉동에 있는 반야산관촉사에서 일정을 시작한다. 관촉사(灌燭寺)는 논산8경 중 제1경으로 꼽히는 명승지로 조계종 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다. 968년(광종 19)에 혜명(慧明)이 불사를 짓기 시작하여 1006년에 완공하였다.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산에서 고사리를 캐던 여인이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곳으로 가보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에서 아이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그곳을 신성하다고 여겨 절을 짓게 하였다고 전한다. 법당은 1386년(우왕 12)에 신축되어 건립하였다.
<관촉사 대광명전>
옛날 중국의 지안(智安)이라는 유명한 승려가 이 절에 세워진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을 보고 미간의 옥호에서 발생한 빛이 “마치 촛불을 보는 것같이 미륵이 빛난다” 하면서 예배드렸다는 연유로 관촉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이 석불은 높이가 18.12m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이다. 관촉사 건립과 함께 제작했으며,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연산의 가마솥과 은진의 미륵과 강경의 미나(내)다리를 보았느냐”고 물어본다는 논산의 3대 명물 중의 하나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머리에 원통형의 높은 관(冠)을 쓰고 있고 그 위에는 이중의 네모난 모양으로 머리 위를 가리는 덮개가 표현되어 있으며, 모서리에는 청동으로 만든 풍경이 달려 있다. 체구에 비해 얼굴이 넓고 큰 편이며, 옆으로 긴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 뚜렷한 이목구비가 토속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정제되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신라 시대 불상과는 다른 압도적인 크기와 웅장한 미적 특성이 드러난다. 1963년부터 보물로 지정되어 오다가 2018년 국보(제323호)로 승격되었다.
<배롱나무 꽃과 미륵보살>
본당인 대광명전(大光明殿) 좌측에 있는 미륵전(彌勒殿)은 전각 안에 별도의 불상이 없고 석조미륵보살입상을 향해 예불을 올리도록 되어있다. 미륵보살입상을 중심으로 석등과 석탑 그리고 배례석(拜禮石)이 미륵전 중앙과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배례석은 중앙에는 커다란 원좌(圓座)가 있으며 그 안에는 가운데 1개와 주변의 8개의 씨방이 연주문(蓮珠文)처럼 돌려져 있는데 음각이다. 연꽃의 잎 끝이 뾰족하며 그 사이에 다시 중판의 연꽃잎이 뾰족하게 양각되어 꽃이 가지에 달려 있는 듯 실감나게 조각되어 있다.
<미륵전 석탑 미륵보살입상 배치도>
<배례석>
대광명전 마당 한쪽에는 윤장대(輪藏臺)가 있다. 윤장대란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이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이곳에 윤장대를 세운 이유는 불법(佛法)이 사방에 퍼져 태평성대를 이루어 달라는 염원이 들어 있다. 윤장대는 ‘티베트불교에서 글자를 모르는 티베트인을 위해 순례를 하면서 마니차(摩尼車)를 돌리기만 하면 불경을 읽은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하는 것에서 유래한 것 같다.
<관촉사 윤장대>
윤장대를 정성들여 한 바퀴 돌려보고 석문을 통해 내려온다. 석문(石門)은 사찰로 들어가는 계단 맨 위에 세워진 문으로 해탈문(解脫門)이다. 문 입구의 양쪽 돌기둥은 너비 48㎝인 직사각형의 돌을 세웠고, 천정에는 길게 다듬은 돌 5개를 가로로 걸쳐 얹어 4각형의 천정을 이루어 마치 터널 모습과 비슷하다. 이 석문은 사찰의 중문역할을 하는 것으로 다른 사찰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다. 축조에 관련된 기록은 없으나 석조미륵보살입상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관촉사 석문>
다음 행선지는 논산시 연산면(連山面) 임리(林里)에 있는 돈암서원이다. 사적 제383호로 지정되었고, 2019년 7월 6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9개 서원 중 하나인 돈암서원(遯巖書院)은 창건 이전에 김장생의 아버지인 계휘(繼輝)가 설립한 정회당(靜會堂)이 있어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었고, 김장생은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1634년(인조12) 양성당과 정회당을 중심으로 서원이 건립하게 되었으며, 1660년(현종 1)에 ‘돈암서원’으로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돈암서원 배치도>
서원은 선현을 봉사하는 사우(祠宇)와 유생들을 교육하는 재(齋)가 결합된 사학(私學)이다. 처음 돈암서원은 이곳에서 서북방 1.5㎞ 떨어진 숲말에 건립되었으나 1880년(고종17)에 홍수피해로 이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1866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보존된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을 주향(主享)하고 그의 아들인 김집(金集)과 제자인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을 배향(配享)하였다.
<돈암서원>
돈암서원은 산앙루를 지나 외삼문인 입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양성당 좌측에 응도당(凝道堂) 그리고 사우(祠宇)는 양성당 후면에 있고, 장판각, 정회당이 있다. 산앙루(山仰樓)는 ‘높은 산을 우러러 보듯 김장생의 정신과 학문을 더 높이 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황산벌에서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 이마의 땀을 씻어준다.
<돈암서원 산앙루>
사우인 숭례사(崇禮祠)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中丁)일에 향사(享祀)를 올린다. 사우의 전면은 1칸통을 개방하여 전퇴를 두었고,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전퇴는 전돌 바닥이다. 전면 기둥사이에는 사분합 띠살문을 달고 옆면과 뒷면은 회벽이다. 숭례사를 둘러싼 담장은 지부해함(地負海涵, 땅은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는 만천을 포용)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서일화풍(瑞日和風, 상서로운 햇살과 온화한 바람) 12자로 장식한 꽃담장이다.
<숭례사>
<꽃담장-地負海涵>
보물(제1569호)로 지정된 응도당은 유생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1880년(고종17) 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 옛터에 남아 있던 것을 1971년에 옮겨지었다. 응도당은 사당방향과 직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서원이나 향교에서 아주 보기 드문 예라고 한다. 여러 가지 기록에 의하면 돈암서원의 건물배치와 규모는 김장생이 강경 죽림서원(竹林書院)을 창건했던 규례를 이어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기와의 명문(銘文)으로 보아 1633년(인조11)에 건립되었다.
<응도당>
응도당 옆의 정회당(靜會堂)은 유생들이 수행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고요하게 몸소 실천하며 수행’한다는 뜻의 ‘정회(停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김장생의 부친인 김계휘(金繼輝)께서 강학하던 건물이며, 대둔산자락의 고운사 터에서 1954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후면열 가운데에 마루방을 두었고 우물마루를 깔았다.
<돈암서원 정회당>
<돈암서원 배롱나무와 소나무>
돈암서원은 광산김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연산 지역에서 세거하는 광산김씨(光山金氏)는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사족가문으로 돈암서원은 서인-노론계를 대표하는 서원이다. 특히 김장생이 타계한 후 제자와 문인들이 만든 돈암서원책판(遯巖書院冊版) 등 여러 자료가 남아 있다. 현재까지 잘 보호, 관리되고 있으며 지역사를 연구하는 향토 자료로서도 보존적 가치가 높다. 그리고 당시 실질적인 실력자인 김장생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돈암서원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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