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지리산 백운계곡

와야 정유순 2019. 7. 30. 22:28

지리산 백운계곡

(2019727)

瓦也 정유순

주모에게 혼이 나간 철없는 서방놈이 제집인지 주막인지 분간 못하고 들락거리듯이 장맛비 오락가락 하며 어느 지역에선 쏟아 붙고 어느 지역에선 고쟁이 사이로 햇살이 뻗친다. 새벽잠 설치며 서울을 출발하여 세 시간 반 만에 도착한 곳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雲里). 운리는 석대산 등 지리산의 험준한 연봉들에 파묻혀 구름에 덮인 마을에서 붙여진 이름 같다. 정말 주변의 산봉우리들은 구름에 에워싸여 있는 풍경은 조선 명종 때 보우(普雨)대사의 시 <운산(雲山)>을 번뜩 생각나게 한다.

흰 구름 속에 청산은 겹쳐있고

(白雲雲裏靑山重, 백운운리청산중)

푸른 산중에는 흰 구름이 많구나

(靑山山中白雲多, 청산산중백운다)

날마다 구름 낀 산 따라 친구 되어

(日與雲山長作伴, 일여운산장작반)

몸 편한 곳은 집이 아닌 곳 없어라

(安身無處不爲家, 안신무처불위가)

<보우(普愚)대사의 시-운산(雲山)>

<운리마을>


   운리는 지리산둘레길 8코스 시작점으로 마을회관 뒤편으로는 너른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 여유 있게 여장을 다시 꾸린다. 장맛비는 지척거리며 습도를 한껏 높이어 온 몸이 끈적거린다. 경지정리가 잘된 산중의 논에는 벼 포기가 튼실하게 자리잡아가며 풍년을 예약한다. 덩달아 가로수로 자리한 밤과 감도 살을 찌우며 영글어 간다. 이들은 대추와 함께 조율시(棗栗枾) 3실과(實果)라 하여 제사상에 필히 진설하는 과일이다. 어느 집 입구에는 대추 대신 양다래가 주렁주렁 매달려 햇빛을 기다린다.

<양다래>


   대추()는 꽃이 핀 자리에는 틀림없이 열매가 맺힌다 하여 후손의 번창을 의미하기 때문에 제사상에 제일앞자리에 올려놓는다. ()은 씨 밤이 싹이 나면 그 나무가 생명을 다할 때까지 뿌리에 붙어 운명을 같이하여 후손을 지극히 사랑하는 조상을 의미하고 또한 사당의 위패도 밤나무로 만들며, ()은 어떤 씨를 심어도 싹이 나면 고욤이 되기 때문에, 좋은 감이 되려면 필히 접을 붙여야함으로 후손으로 태어났으면 감과 같이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큰 인물이 되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정유순의 세상걷기 중에서>

<밤>

<감>


   논길을 지나 임도에 접어들어 고개 하나를 넘는다. 고개를 막 넘자 지리산둘레길 화살표는 4시 방향으로 가리켰는데 후미그룹들은 모르고 12시 방향으로 직진하여 단성면 진자마을까지 약1이상을 갔다가 되돌아선다. 덕분에 잎이 진 다음에 꽃대가 올라와 꽃이 피는 상사화를 보았다. 그리고 지리산 골짜기 안에도 고향 같은 기름진 문전옥답(門前沃畓)이 펼쳐져 있는 것을 알았다. 도랑으로 흐르는 물소리도 향수(鄕愁)를 자극한다.

<상사화>

<논-단성면 운리>


   힘겹게 되돌아와 다시 임도를 따라 숲길로 접어든다. 이 길은 단성면 운리에서 시천면 덕산을 잇는 13.1의 지리산 둘레길 8코스로 솔숲과 참나무 숲이 우거져 있으며, 계곡길과 임도를 번갈아 가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빗방울은 좀 잦아들었지만 옷은 땀에 젖었는지 비에 젖었는지 촉촉하다. 산봉우리들은 어깨를 마주하며 흰 구름과 희롱한다. 덩달아 밤에 피는 달맞이꽃도 무리지어 낯 달을 맞이하려는지 계곡바람에 흥이 겹다.

<달맞이꽃 군락>


   정해진 코스인 임도를 벗어나 자세히 보아야 찾을 수 있는 정글 숲속으로 들어간다. 초목이 우거져 5정도만 떨어져도 앞사람이 보이지 않는 밀림이다. 앞서 가는 병사의 숲을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밀림을 헤쳐 나갔던 육군시절의 훈련모습이 추억의 밑바닥에서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세월의 두께를 비집는다. 이 길을 택한 이유는 단성면 백운리마을로 바로 가기 위해서다. 길 끝 지점에는 커다란 나무다발이 가로막아 어렵게 타고 넘는다. 아니나 다를까 땅주인이 왜 남의 땅 밟고 들어왔냐고 성화다.

<점촌마을로 가는 밀림>


   그러나 이미 지나온 것을 어찌하랴 미안합니다라는 말 한 마디로 때울 수밖에백운동마을로 알려진 점촌마을에서 오전을 마감하는 점심은 품을 많이 팔아서 그런지 꿀맛이다. 자연 속에 묻힌 오찬은 최고의 성찬이었다. 우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은 시원한 청량제가 되어 안겨온다. 그리고 모든 일정이 끝난 것처럼 마음이 포근해진다.

<백운동 점촌마을>


   지리산의 수많은 계곡 중에서 물 맑기로 알려진 배운계곡은 단성면과 시천면의 경계에 자리한다. 이 계곡은 점촌마을에서 시작하여 약2를 이어가면서 맑고 푸른 자연의 장관을 보여준다. 그리고 지리산자락 산청지역은 조선조 학자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을 상징하는 흔적들이 가득하다, 덕천서원을 중심으로 덕산지역이 남명의 학문과 삶을 대표하는 장소라면, 백운동계곡은 남명이 자연을 즐기며 호연지기(浩然之氣)하던 곳이다.

<백운계곡(하류)>


   영산산장 앞으로 하여 백운천을 조금 올라가면 삼라만상의 온갖 자연의 소리를 모아 떨어져 기암절벽 아래 크게 자리 잡은 웅덩이로,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저절로 아는 것이 생긴다는 다지소(多知沼)’라는 못이다. 남명의 뜻을 따르는 후학들이 스승의 높고 넓은 학문을 그리며 남긴 이름인 듯싶다. 수량 많은 백운계곡은 지리산의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아름다움을 마음껏 보여준다.

<다지소(多知沼)>


   다지소 위쪽으로는 용문폭포가 큰 바위를 타고 우렁차게 낙하한다. 물은 눈송이처럼 모였다가 너른 바위 위로 흘러 실타래처럼 감겨온다. 폭포 왼쪽 바위에는 龍門川(용문천)’龍門瀑布(용문폭포)’라는 글자가 새겨있다. 낙하하는 폭포수는 아래 미끈하게 고인 물에 다시 눈송이처럼 튕겨 올라 사방으로 파편처럼 흩어진다. 백운계곡은 물과 바위가 하나 되어 뒹구는 자연 그 자체였다.

<용문폭포>

<용문천과 용문폭포 바위글씨>


   백운동은 남명이 지리산권역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인정했던 동천(洞天)으로 남명이 세 번 유람했다 해서 삼유동(三遊洞)이라고도 불린다. 19세기 말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자 이 지역 남명학파 유생들이 남명정신을 기리기 위해 1893년 용문폭포 위쪽 바위에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屨之所)> 여덟 글자를 새기고 화합을 가졌다. 따라서 이곳은 남명의 후학들이 남명과 그 정신을 추모하던 공간이다.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屨之所)>남명선생이 지팡이()와 신발()을 벗어놓고 자연에 심취했던 곳이다.

<남명선생장구지소>

<남명선생장구지소 바위글씨>


   남명은 왕이 제수하는 관직을 단호히 물리치고 은거하여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곽재우(郭再祐정인홍(鄭仁弘) 등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 제자가 되길 자청하여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히 절제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특히 경의(敬義)를 중시하여 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로써 행동을 해나간다는 생활철학을 실천했다. 학문을 익히는 것 못지않게 실천을 중시했던 스승의 정신은 임진왜란 때 그 제자들이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하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남명은 평소에도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이는 배우지 않음만 못하고, 오히려 죄악이 된다.” 하였다.

<남명 조식 초상>


   남명은 백운계곡에서 천하 영웅들이 부끄러워하는 것은(天下英雄所可羞, 천하영웅소가수)/ 일생의 공이 유 땅에만 봉해진 것 때문(一生筋力在封留, 일생근력재봉유)/ 가없는 푸른 산에 봄바람이 부는데(靑山無限春風面, 청산무한춘풍면)/ 서쪽을 치고 동쪽을 쳐도 평정하지 못하네(西伐東征定未收, 서벌동정정미수)” <백운동에 놀며(遊白雲洞, 유백운동)>라고 읊으며 사람의 욕심은 그칠 줄 몰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세상사를 탐한다고 탄식했다.

<백운계곡(상류)>


   백운계곡 상류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물이 더욱 검푸르다. ()를 빠져나온 물은 큰 바위를 타고 우렁차게 낙하한다. 계곡의 물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하면서 발걸음도 빨라졌다 느려진다. 길이 계곡과 멀어질 때는 마음이 먼저 몸을 앞질러 풍광 좋은 계곡으로 달려간다. 길 중간 중간 계곡으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별 지루함도 없다. 아름다운 계곡과 너른 반석 그리고 맑은 물이 흐르는 백운계곡은 지리산이 품은 또 하나의 걸작이었다.

<백운계곡의 장승과 솟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