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3코스 (충정로역∼절두산, 2019년 5월 21일) 瓦也 정유순 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3코스는 충정로역에서 출발한다. 1984년 5월 22일 개업했으며, 1996년 12월 30일 5호선이 확장 개통된 충정로역은 충정로 3가에 있는 서울지하철 2호선과 5호선이 환승역이다. 충정로(忠正路)는 거리 0.8㎞, 너비 40m의 왕복 8차선으로 광화문에서 신촌 및 마포 방향을 잇는 간선도로다. 1984년 10월 1일 8·15광복 전의 일본식 도로 명이었던 죽첨정(竹添町) 대신 조선 말기의 충신 민영환(閔泳煥)의 시호(諡號)인 충정공(忠正公)을 를 본 따 현재의 도로명이 되었다. <충정로역 지도> 충정로역 4번 출입구를 나와 서소문로로 향하다가 서울역(서부) 앞으로 하여 만리재로 발길을 옮긴다. 만리재는 중구 만리동2가에서 마포구 공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세종 때 학자 최만리(崔萬里)가 살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해마다 정월 보름에 이 고개에서 삼문 밖과 애오개 사람들이 돌팔매로 편쌈(석전)을 하는데 삼문 밖 사람들이 이기면 경기도가 풍년이 들고, 애오개가 이기면 8도에 풍년이 든다고 하여, 용산과 마포 사람들은 애오개 편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만리재(마포방향)>
조선 때 한양에는 동쪽의 왕십리와 서쪽의 삼개(마포)라는 성 밖의 마을이 있었는데, 왕십리사람들은 미나리 등 채소류를 재배하여 성 안에 팔았고, 삼개사람들은 소금과 젓갈류를 팔아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마포사람들은 젓갈이나 소금을 지고 동쪽의 아침 해를 보며 만리재를 넘었기 때문에 얼굴이 검었고, 왕십리 사람들은 해를 등지고 도성 안으로 들어와 뒷목이 검었다고 한다. 지금도 만리재는 서울 도심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길목이지만, 조선시대에도 지방의 세곡(稅穀)이 들어오고 해양으로 통하는 요지였다. <만리재(서울역방향)> 만리재를 넘어 한겨레신문사 앞에서 효창목길로 접어든다. 1988년 5월에 창간된 한겨레신문은 1975년 유신치하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언론수호 해직기자들과 1980년 신군부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강제해직된 기자들이 앞장서서 창간하였다. ‘나라의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과 민족통일의 목표로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정립’을 목적으로 종합일간지로는 최초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 지면을 선보였다. 2007년에는 국내 언론사 최초로 기자가 기사를 취재·작성할 때 지켜야 할 ‘취재 보도 준칙’을 제정하여 시행 중이다. <한겨레신문사> 효창목길 마루 너머에는 효창공원이 있다. 효창공원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친 선열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묘원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조 정조(正祖)와 의빈성씨(宜嬪成氏)의 소생으로 5세의 어린나이에 세상을 떠난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의 무덤이 있던 효창원으로 수림이 울창하였던 곳을 일본군대가 불법으로 주둔하여 훼손하더니 급기야 1944년에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강제로 이장하고 효창공원으로 만들었다. <효창공원 지도> 해방 후 김구선생은 이봉창·윤봉길·백정기의사의 유해를 모셔와 삼의사묘역을 만들고 안중근의사의 가묘(假墓)를 나란히 모셨다. 또한 임정요인인 이동녕·조성환·차리석선생의 유해를 모셔 임정요인묘역을 조성하였다. 백범 김구선생은 1949년 6월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하여 이곳에 묻힌 후 이 일대가 선열묘역이 되었으며 2024년까지 ‘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조성한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공원 안에는 이곳에 묻힌 선열들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義烈祠)와 백범기념관 등이 있다. <효창공원 의열사> 효창공원에서 효창원로를 따라 효창공원앞역에서 백범로 큰 길을 건너면 ‘경의선 숲길’이다. 이 숲길은 경의선의 지하화에 따라 생긴 약8만여㎡의 부지를 철도시설공단으로부터 50년간 무상임대 받아 용산구 효창동에서 마포구 연남동까지 6.3㎞ 길이의 폐철 길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탈바꿈 시킨 서울의 도시재생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일부 구간에서는 경의선 시절의 레일 및 건널목을 재현해 놓았다. <경의선 숲길> 경의선 숲길을 지나 용산구 신계동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면 ‘당고개 순교성지’가 나온다. 당고개는 문배산(문평산) 기슭에 있던 고개로 옛날 고개마루턱에 당집이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당현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고개는 헌종 5년(1839) 기해박해 때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곳으로서 서소문 밖 네거리, 절두산, 새남터 등 서울의 4대 순교성지 중 하나로 꼽힌다. 일제 때는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신사를 지어 놓았는데 광복 후 없애버렸다. <당고개순교성지(성당옥상)> <당고개성당> 기해박해 때인 1839년 12월 27∼28(음)일 이틀 동안 이인덕(마리아), 홍병주(베드로), 홍영주(바오로), 이경이(아가타), 권진이(아가타), 최영이(바르바라), 이문우(요한), 손소벽(막달레나), 박종원(아우구스티노), 이성례(마리아) 등 천주교 신자10명이 처형당한 곳이다. 이곳이 처형장이 된 이유는 본래 처형이 이루어지던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의 인근 상인들이 장사가 잘되는 설 대목에 처형장소를 옮겨달라고 요청하여 이루어졌다. <당고개성당 예배실> 그 중에 아홉 명이 천주교 성인으로 기려지고 있는데 최경환 성인(1839년 기해박해 시 순교)의 부인이며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였던 최양업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마리아)는 마카오로 유학을 가 있던 맏아들 최양업신부를 제외한 다섯 명의 자식들과 함께 옥에 갇혔다. 결국 당시 세 살짜리 막내가 빈 젖을 빨다가 옥에서 굶어죽고 말자 이성례 마리아는 나머지 네 명의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일시 배교하고 옥을 나간다. 하지만 곧 아이들이 동냥 나간 사이 스스로 다시 옥으로 돌아와 갇히게 된다. <최경환-이성례 가족(중앙이 최양업신부)> 6세에서 15세까지의 네 형제는 부모들이 갇혀있는 옥에 찾아가면 자신들 때문에 부모들이 배교할 것을 우려해 동냥을 해가며 살아간다. 그 후, 어머니가 참수되기 하루 전 어린 형제들은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가지고 희광이(사형 집행인)에게 찾아가 자신들의 어머니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단칼에 베어줄 것을 부탁하고 이에 감동한 희광이는 밤새 칼을 갈아 그 약속을 지켰다. 이렇게 순교한 이성례(마리아)는 일시적이나마 배교한 사실 때문에 성인으로 시성되지 못하였다.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 석상> 이성례(마리아)는 어린자식들 때문에 한 때 마음이 약해져 배교한 이유로 오랜 기간 시복시성에서 제외되었다가 2014년 8월 14일 프란치스코 교종에 의해 복녀로 시복되었다. 한국교회는 1986년 문배산 마루에 순교기념비를 세워 성지를 조성하였으나 2008년 주변 아파트건립공사로 철거되었고, 2011년 신계역사공원 안에 “찔레꽃 아픔과 매화꽃 향기로 가득 찬 어머니의 성지로 새로 조성하였다. 당고개 성지는 용산전자상가에서 도보로 불과 5분 거리인 작은 언덕에 있다. 이러한 애절한 사연 때문에 당고개 성지는 많은 순례 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순교성지다. “이제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마리아를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최양업신부)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이성례복자의 유언이 매화꽃 향기처럼 당고개 순교성지를 환하게 밝힌다.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아래는 찔레꽃, 위는 매화> 당고개 순교성지를 나와 원효로 전자상가거리를 지나 새남터 순교성지로 향한다. 새남터는 조선 초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되었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었다. 1456년(세조2)에 성삼문 등 사육신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는데, 1801년(순조1) 신유박해 때 청나라 주문무신부가 이곳에서 처형당한 뒤 수많은 신앙의 증거자들이 순교의 성혈을 뿌린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1846년 9월 16일(헌종12) 병오박해 때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 1821∼1846)신부가 처형되었다. <새남터성당> <김대건신부 동상-절두산> 1956년 천주교도들에 의해 <가톨릭 순교성지>라는 기념탑이 세워졌고, 1981년 한강본당에서 새남터본당이 분리ㆍ독립되었다. 1983년 한국 복자수도회에서는 새남터에 대성전을 건립하기로 하여 공사에 착공, 그 이듬해 완공하였다. 이 성전은 지하 1층, 지상 3층, 종탑 3층의 순 한국식 건물로 기념관과 전시관, 기념성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103성인들의 모습이 있고, 여러 성화 중에서도 한복을 입은 마리아님과 아기예수님의 성화가 아주 인상적이다. <한복 입은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 <103성인도> 새남터에서 한강 변으로 나오면 바로 한강철교가 나온다. 한강철교도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놓여 진 다리이다. 용산역과 노량진역을 이어주는 한강철교(A)는 1900년 7월에 최초 준공되었으며, 지금은 교량이 4개(A·B·C·D)선으로 이루어 졌다. B선은 1912년 9월에, C선은 1944년 6월에, D선은 1995년에 건설하였으며, 지금의 용도는 A선은 경인선과 직통전철, B선은 화물열차, C선은 경부선 호남선 장항선 등의 철도, D선은 수원행 인천행 전철이 사용하고 있다. <한강철교>
여의도(汝矣島)는 한강의 하중도(河中島)로 면적 2.9㎢(약87만평)이다. 영등포에서 샛강 건너에 있는 모래로 이루어진 쓸모없는 땅이었으나 일제가 1916년 9월에 이곳에 간이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미군이 접수하여 사용하였고, 백범 김구(白凡 金九) 등 독립투사 등이 이곳을 통해 개별 귀국하였다. 1967년에는 충남 청양의 구봉광산 매몰사고로 16일간 갇혀 있던 광부 양창선도 구조되어 헬기로 여의도공항으로 후송되었다. <여의도 빌딩숲> 1968년 여의도 윤중제(輪中堤)가 축조되면서 여의도비행장은 경기도 성남으로 이전하였고, 지금의 여의도로 변신하기 시작하여 영등포에서 여의도를 가로 질러 마포로 연결되는 마포대교(1970년 5월), 원효대교(1981년 10월), 서강대교(1999년)가 차례로 개통되었다. 그리고 입법기관인 국회의사당, KBS와 MBC 등 언론기관, 증권회사 등 각종 금융관계사, 초대형 순복음교회, 63빌딩, 엘지(LG)쌍둥이 빌딩 등 고층건물이 숲을 이루고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다. 여의도로 국회의사당이 이전하면서 마포지역이 여의도 다음으로 정치인들의 활동장이 되었다. 마포는 우리말 삼개라는 포구 이름을 한자로 옮겨 적으면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각 지방에서 오는 산물의 하역과 보관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오강(五江, 뚝섬·노량·용산·마포·양화진) 중의 하나로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농산물을 저장하고, 서해에서 들어오는 새우·조기 등의 수산물의 집산지로 큰 역할을 하였다. <여의도와 국회의사당>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으로 인하여 조강(祖江, 한강하구)의 수운이 폐쇄됨에 따라 옛날의 기능은 상실되어 한때는 침체기에 접어들어 은방울자매가 부른 <마포종점>이라는 가요가 소외된 서민들의 애환을 노래하기도 하였으나, 여의도가 개발되고 마포대교가 개통되면서 새로운 서울의 서부거점도시로 발돋움 하게 된다. 여의도와 마포 사이에는 밤섬이라는 작은 섬이 있다. 고려 때에는 귀향 보내던 섬이었고, 1394년에는 조선의 서울 천도와 함께 배를 만드는 기술자들이 정착하여 살았고, 한국전쟁 이전까지 조선업과 뱃사공, 물산도선하역 등이 성행 하였다고 한다. 1968년 밤섬이 폭파됨으로써 주민들은 마포구 창전동으로 이주하였으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섬으로 철새와 수변생물들의 낙원이 되었다. <한강유람선> 마포구 당인리에는 우리나라 전기산업의 산 역사인 당인리화력발전소(현 서울화력)가 있다. 한강에 황포돛배가 오가던 시절인 1930년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 1호기가 준공되었다. 한때는 학교 입학시험에 나올 정도로 유명했지만 공기오염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었다. 지금은 연료와 시설의 대폭개선으로 발전 시 발생하는 증기로 여의도와 동부이촌동, 마포지역 일대 5만여 세대에 온수와 난방을 공급하고 있다. 앞으로는 발전시설을 지하화 하고, 현재의 지상 부지에는 시민의 쉼터인 공원과 문화창작발전소를 건립을 추진 중이다. <서울화력(당인리발전소)> 지하철 2호선 당산철교 북단 옆으로 절두산 성지가 나온다. 원래 이곳은 한강으로 돌출한 봉우리 모양이 누에머리 같기도 하여 잠두봉(蠶頭峰)으로 불리었고 바로 아래의 한강 변에는 양화(楊花)나루터가 자연과 어울려 명승으로 문인과 풍류객들이 뱃놀이를 즐기던 곳이었다. 겸재 정선은 이곳의 빼어난 산수에 반해 <양화환도 (楊花喚渡)>라는 진경산수화를 남겼다. 명나라 사신들은 중국의 적벽(赤壁)에 못지않다고 감탄을 했던 이곳이 순교의 성지가 된 것은 병인박해에서 비롯된다. <절두산> 1866년 2월 프랑스 군함이 천주교탄압을 문제 삼아 한강을 거쳐 양화진과 서강 나루터까지 침입했다. 이에 대원군은 “양이로 더럽혀진 한강을 서학쟁이들의 피로 씻는다”라는 이유로 천주교도의 목을 베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양화 나루터는 사형장으로 변하여 잠두봉은 자연스럽게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서학(西學)으로 불린 천주교는 당시 ‘사학(邪學)’으로 몰려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절두산에서의 처형은 ‘일단 먼저 머리를 자르고 본다.’는 무지막지한 선참후계(先斬後啓)였다. <무명순교자 기념비> <병인박해 조형물>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1만여 명에 가까운 천주교 신자들을 붙잡아 이곳에서 처형하였다. 그러나 이곳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은 28명 외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한국천주교에서는 순교 100주년인 1966년에 순교기념관을 건립하여 순교정신을 헌양하였다. 순교자기념성당과 박물관, 순교성인 28위를 모신 경당(經堂, 지하묘소) 등 셋으로 구분하여 순교자 기념공원을 꾸몄다. 이곳은 1997년 우리역사의 중요한 유적지로 인정받아 국가사적(제399호)으로 지정되었다. <절두산성당> 0 |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네 번째-2) (0) | 2019.05.30 |
---|---|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네 번째-1) (0) | 2019.05.30 |
홍성 재 너머 사래 긴 밭가는 숲길 (0) | 2019.04.18 |
화성3·1운동만세길 걷기(2) (0) | 2019.04.14 |
화성 3·1운동만세길 걷기(1) (0) | 2019.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