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재 너머 사래 긴 밭가는 숲길
(남산∼보개산, 2019년 4월 13일)
瓦也 정유순
4월의 중순으로 접어든 봄날이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조금 쌀쌀하다. 어린 시절 종달새 하늘 높이 솟아 울어대면 이슬이 채 가시기 전의 풀밭을 헤매며 신발을 적셨던 때가 아지랑이처럼 기억 저편으로 아른거린다. 조선조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약천 남구만(藥泉 南九萬, 1629∼1711)이 근면성실함의 미덕을 강조한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의 마지막 연에 나오는 ‘재 너머 사래 긴 밭가는 숲길’을 가기 위해 충남 홍성으로 이동한다.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희 놈은 상긔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종달새 울어대니 이미 동창에 해가 밝았다
소치는 아이는 아직도 아니 일어났느냐
재 너머에 있는 이랑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동창이 밝았느냐' 시비>
‘재 너머 사래 긴 밭가는 숲길’은 2011년 행정안전부의 공모사업으로 조성된 남산∼보개산∼거북이마을에 이르는 생태 숲길이다. 탐사워크북은 보개산 거북이마을의 역사 인물과 바위 전설 그리고 숲에서 자생하는 야생화, 나무, 동물들을 구별할 수 있는 사진자료와 자세한 설명으로 직접 체험 기록할 수 있는 교재로 자녀를 둔 부모나 교사들이 체험교육에 활용할 수 있게 구성되었다고 한다.
<보개산 능선>
아침 봄바람을 가른 버스는 충남 홍성읍 남장리에 있는 한국교통안전공단 홍성검사소 마당에 당도하여 여장을 점검한 다음 ‘재 너머 사래 긴 밭가는 숲길’로 향한다. 울안의 벚꽃은 화사한 자태를 뽐낸다. 예부터 “홍성 가서 말자랑 하지 말고 광천 가서 돈자랑 하지 말라.” 했을 만큼, 홍성에는 인물과 재물이 넘쳐나는 곳이다. 홍성군(洪城郡)은 1914년에 홍주군(洪州郡)과 결성군(結城郡)이 통합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홍성읍 시내>
홍성자동차검사소에서 남산으로 향하다 보면 홍성 출신의 보훈유공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충령사(忠靈祠)를 먼발치로 바라보며 소나무가 우거진 산속으로 진입하여 조금 올라가면 산 중턱에 남산정(南山亭)이 나온다. 누정(樓亭)은 관직에서 물러난 사대부들이 주로 세웠다. 특히 향촌사회(鄕村社會)에서 친교를 도모하고 학문을 수련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음주농월(飮酒弄月)로 세월을 보낸다는 비판도 있었다.
<남산정>
그러나 막상 남산(南山, 221.5m) 정상에는 또 다른 정자가 있는데, 콘크리트로 만든 건물이 주변경관과 썩 어울리지 않게 서있지만 위치가 좋아 사계가 확 트인다. 아마 실적 위주의 행정과 세월의 불일치로 생겨난 시대의 산물이 아닌 가 생각해 본다. 홍성군에서는 아이들이 전통 건축을 접하고 체험할 수 있는 학습공간으로 활용한다고 남산정 건립기에 기록하고 있는데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마음이 우선했으면 한다.
<남산정상의 정자>
남산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고 수리고개로 내려온다. 야생복사꽃도 꽃망울을 활짝 터트리며 봄맞이에 여념이 없다. 나무들은 잎눈을 뜨며 오월의 신록을 예약한다. 금북정맥 수리고개에는 원두막이 쉼터를 제공한다. 금북정맥(錦北正脈)은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13개 정맥 중의 하나로 경기도 안성군 칠장산(492m)에서 대전의 백월산(569m)에 이르고 다시 북상하여 홍성 보개산(寶蓋山, 274m)과 서산 성국산(252m)을 거쳐 태안반도 안흥진에 이르는 금강의 서북쪽을 지나는 산줄기다.
<복사꽃>
<수리고개 원두막>
다시 능선을 넘고 밀밭 초지를 지나면 원두막 같은 쉼터가 마련되어 있는 금북정맥 맞고개(125m)에서 발품을 쉬고 계속 보개산 쪽으로 향한다. 20여분 거리의 길목에는 ‘말구수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말의 구수(먹이통)로 사용하였다 하여 불리는데, 홍성 구항출신으로 중종 신미년 무과에 급제하여 제주 판관을 지낸 서련(연안서씨 5대손)이 마장술을 연마하면서 말에게 먹이를 주며 휴식을 취한 곳으로 전해진다. 또 구항의 온요마을 윤장자 절충장군이 기마훈련과 사냥을 하다가 휴식을 취한 곳이라고도 한다.
<말구수바위>
구수바위 옆에는 바위를 반으로 가르고 나온 나무가 위용을 자랑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길 한번 안 준다. 그러나 10여분 거리의 선바위는 보개산을 사이에 두고 황곡리와 마온리에 살았던 남녀가 살았지만 황곡리 총각의 부모가 혼인을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모님 몰래 이곳에서 만나 바라만 보다가 깊은 겨울날 부둥켜안고 죽었는데, 그 자리에 두 개의 바위가 솟아나 선바위가 되었다. 그 후로 노총각 노처녀들은 이 선바위에서 사랑을 빌면 결실을 맺었다고 한다.
<선바위>
보개산 정상아래 전망대에 당도한다. 보개산(寶蓋山)은 ‘보물로 덮여 있는 산’이라는 뜻 같다. 원래 보물이라는 것은 눈에 쉽게 띄는 것이 아니라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보물을 알아보는 사람에게만 보여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이다. 아마 이곳의 보물은 금은보화의 물질이 아니라 그 옥석을 가릴 줄 아는 현자들이 보개산자락에서 많이 태어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 산자락에서 태어난 인물은 고려 말의 충신 최영장군, 사육신의 성삼문, 청산리대첩의 김좌진, 33인 민족대표 한용운 등 역사적인 인물들이 수두룩하다.
<바위를 뚫고 나온 나무>
보개산 정상에는 곰보바위가 있다고 하는데, 가지 못하고 구절암으로 내려온다. 곰보바위는 어느 처녀가 혼인을 했는데 시집식구들이 전부 천연두를 알아 곰보였다고 한다. 이 며느리는 밖에 절대 말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지만 친정오빠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발설하고 마는데 두 남매는 비밀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고민 끝에 죽어 바위가 되었는데, 이 바위도 솟아날 때 울툭불툭하여 곰보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남 예기 좋아하는 우리에게 ‘끝까지 비밀을 지키라’는 교훈을 던진다.
<거북이마을 전경>
전망대에는 2층 목조건물로 높게 설치되어 있고, 아래에는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운치를 더한다. 큰 바위 아래에는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상(床)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날을 정해 산신이나 서낭신에게 제를 올리는 장소 같다. 크고 너른 바위들과 잠시 희롱을 하다가 구절암으로 내려온다.
<보개산전망대>
<보개산전망대 바위>
구절암(九節庵)은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의 보개산(寶蓋山) 정상부에 있는 사찰로 일명 칠절사(七節寺)라고도 부른다.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강희(康熙)’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청나라 강희제의 재위기간인 1662년∼1722년 사이에 창건되거나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사찰의 변화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1968에 마지막으로 중건되었다는 중건기가 걸려 있다. 사찰은 법당, 산신각, 요사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찰 안에는 충남문화재자료(제361호)로 지정된 홍성 구절암 마애불(磨崖佛)이 있다.
<구절암 대웅전>
약간 비스듬한 모습으로 코끼리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의 역사는 고려시대 이전 미륵신앙이 깃든 작품인 것으로 보여 진다. 미륵불은 연꽃모양으로 만든 대좌에 앉아 있는데, 대부분의 마애불은 입상(立像)인데 반해 구절암의 마애불은 앉아 있는 게 특징이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있는 모습이며 얼굴은 약간 아래로 쳐져 표현되었는데, 넓고 굵게 표현한 코, 길고 굳게 다문 입 등은 서민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석상을 볼 때마다 불교 이전의 우리 민속신앙의 산물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의 기우일까?
<구절암 마애불>
구절암에서 내려오니 구항면 지석마을에서 거북이마을까지 벚꽃 길 걷기 축제가 한창이다. 큰길을 피해 다시 임도로 접어 올라가니 만개한 벚꽃들이 화사하게 맞이해 주고, 겨울이 핀다는 동백(冬栢)이 봄에 활짝 피어 춘백(春栢)으로 반겨준다. 그리고 봄의 화신 홍도(紅桃)가 화려함을 더해준다. 길옆의 하트모양의 사랑바위도 전설을 이야기 한다.
<벚꽃길>
<동백>
<홍도>
이 사랑바위에 사랑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여 인근의 처녀들은 물론 과부들까지 와서 빌었다고 한다. 어느 해 거북이마을 종가 집으로 시집 온 새댁이 두 달 만에 과부가 되었는데, 집안에서는 열녀가 되기를 바랐지만 새댁은 매일 사랑바위에 가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빌었다. 시댁에서는 다른 데로 시집가려는 줄 알고 주변에 옻나무를 심어 새댁의 접근을 막았는데, 영문도 모른 채 밤이면 사랑바위를 찾아오다가 몸에 옻이 올라 남편을 따라 죽었다. 마을사람들은 여인의 은장도를 무덤에 넣어 주었다고 한다.
<사랑바위>
사랑바위에서 거북이마을로 내려오면 호랑이가 잡아준 묘 자리가 있다. 옛날에 전씨 성을 가진 분이 보개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는데 집채 만 한 호랑이가 길을 막고 서 있어서 잠시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구원을 청하는 것이었다. 전씨는 호랑이 입에 손을 넣어 목에 걸린 비녀를 빼주었고, 호랑이는 고맙다는 표시를 하며 사라졌다. 훗날 전씨가 아버지 산소를 이장하려고 보개산 초입으로 들어서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산 중턱에 멈춰선 자리에서 땅바닥을 몇 번 긁고는 사라졌다. 바로 그 자리가 호랑이가 잡아준 명당으로 담양전씨 문중에 인물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호랑이가 잡아준 명당>
묘 자리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묘역 아래로는 담양전씨(潭陽田氏)의 사당인 구산사(龜山祠)가 포근하게 자리한다. 구산사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일 제례를 지내고 있으며 이곳 사당 주변에도 수선화가 한창하다. 담양전씨 해설사는 “보개산의 지형이 거북이 형상인데, 목을 쑥 빼어 15°의 각을 이뤄 가장 왕성한 기운이 뻗쳐 있다”고 설명하면서 마을이름이 ‘거북이마을’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대나무 밭을 한번 둘러보라 권하여 대나무 길로 접어들자 대나무 숲 사이에는 거북바위가 자리한다.
<구산사>
<수선화>
<거북바위>
대나무 밭 초입 소나무 사이에는 보살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마을에서 자손이 없어 걱정하던 사람이 보살바위에 정성껏 기도하여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그 뒤로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 정성껏 기도하면 소원을 들어주는 바위로 통한다.
<보살바위>
그리고 바로 옆에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의 초가 3칸이 자리한다. 약천 남구만은 본관이 의령(宜寧)으로 이곳 거북이마을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 아버지 숙부 모두 홍성군 내현리에 살았다. 숙종 때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으로 낙향하였고, 약천의 시 중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의 재(嶺)는 거북이마을에 있는 북방서낭당의 고개이고 사래 긴 밭은 발현마을 냉천 옆 긴 밭을 가리킨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강원도 동해시 심곡동에도 약천(藥泉)이라는 샘과 시조와 관련된 지명이 있다.
<약천초당>
대나무 밭 가운데에는 거북이마을 혼인목(婚姻木)이 있다. 상수리나무와 회화나무가 맞닿아 한줄기로 커가고 있는 것으로, 혼인목은 남녀의 지극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으며, 연리목 중 다른 나무의 결합을 혼인목이라 한다. 그런데 오늘 이 길을 걸으면서 남산정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길목의 연리목(連理木), 보개산 전망대로 가는 어느 산소(山所) 뒤에 서있는 10여 개의 가지가 한 나무에서 돋아나 하늘로 향하다가 서로 얽히고 얽힌 ‘바람난 소나무?’ 같은 연리지(連理枝) 등 사랑에 얽힌 사연들이 복잡하다.
<혼인목>
<바람난 소나무?>
<연리목>
대나무 산책로를 돌아 나오면 말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장군과 함께 전쟁터에 나가던 말(馬)이 어느 날 장군이 전쟁터에서 전사하자 장군의 애마는 피 묻은 몸으로 수 천리를 한걸음에 달려와서 장군의 전사소식을 전해주고 숨을 거두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자 애마가 죽은 자리에서 큰 바위가 솟아올라 사람들은 이 바위를 ‘말 바위’라고 불렀다. 이 말 바위와 애마는 전운상장군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오는데, 바로 옆에는 전운상장군(田雲祥將軍, 1694∼1760)의 영정이 모셔진 영당이 있다.
<말 바위>
<전운상장군 영당>
거북이마을은 고려말 문신인 담양전씨 집성촌이고, 약천초당(약천 남구만 선생 생가터)과 고택 등 전통 문화유산이 풍부한 곳이다. 구산사에서 실시하는 전통방식의 성인식인 성년의례 체험, 제례 체험 외에도 농사 체험, 공예 체험 등 다양한 체험을 운영하며 전통과 농촌의 문화를 전승하는 농어촌인성학교 앞으로 돌아 나오면서 ‘재 너머 사래 긴 밭가는 숲길’이 끝난다.
<농어촌인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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