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3·1운동만세길 걷기(2)
(2019년 4월 6일∼7일)
瓦也 정유순
어제 만세길 걷기를 마감한 우정읍 ‘쌍봉산근린공원’은 장안면 어은리 ‘옛 장안면사무소 터’에서 약4㎞ 남짓 떨어진 거리다. 어제의 열기를 담아 이틀째 식전행사가 진행되었다. 태권도 팀이 나와 1919년 당시 독립만세와 왜경들의 잔혹한 참상을 무예와 연기로 실감 있게 재연한다. 다시는 나라를 잃는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아야겠지만 아직도 일제의 사슬에 풀리지 못한 역사와 문화, 예술, 문학 등 되짚어 볼 일들이 너무 많아 답답하다.
<쌍봉산 원경>
<식전행사>
식전행사가 끝나자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온 세상을 향해 메아리쳤던 쌍봉산으로 올라간다. 화성 3·1운동을 상징하는 쌍봉산(117.4m)은 화성시 남부에 위치한 산으로 행정구역상으로는 우정읍과 장안면의 경계에 있다. 원래는 쌍부산, 마안산, 백산 등으로 불렸으나, 쌍봉산으로 불린 것은 근래의 일이라고 한다. 예전부터 풍수지리에서 명당자리라고 평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산 일대에 묘를 쓰려는 일이 빈번하였으며 멱우리 쪽 등산로에는 약수터와 체육 시설 등이 있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쌍봉산 전망대>
조암리 쪽에서 불로문(不老門)을 지나 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에는 1년을 상징하는 365개의 계단이 조성되어 있고, 계단을 따라 하루하루를 셈을 하듯 1919년 4월 3일 당시의 만세 함성을 되새기며 발길을 정상으로 향한다. 정상의 전망대도 당시의 감동이 살아나는지 진동이 심하여 여러 사람이 올라서기에는 부담스럽다. 일부러 흔들림이 있는 전망대인지는 몰라도 설명이 없어 좀 헷갈린다. 목련꽃 그늘 아래의 성황당은 이곳에 오는 사람들의 안전을 도모하는지 해가 진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쌍봉산 불로문>
<쌍봉산 성황당>
쌍봉산에서 근린공원으로 내려와 1919년 당시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들의 생활중심지였다. 쌍봉산에서 내려온 만세꾼들은 조암리를 거쳐 우정면사무소로 이동하여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일제는 만세운동에 보복하고자 조암리 마을에 있는 큰 집들만 골라 불을 질러 10여 채가 불에 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조암리(朝岩里)는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다. 큰 돌이 있으므로 아침돌, 돌래말 또는 조암, 조암동, 조원동이라 한데서 조암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조암리 시가지>
조암리 도심 번화가를 벗어나 우정면 화산리로 들어서는 길목은 목가적(牧歌的)이다. 밭두렁 논두렁에는 이미 꽃이 핀 냉이가 꽃다지와 함께 봄내음을 물씬 풍긴다. 전국적으로 외래종인 노란 서양 민들레가 우점종이 되어 우리의 토종 하얀 민들레가 설자리를 이미 잃었는데, 이곳에는 1919년 4월 3일의 함성과 함께 하얀 민들레가 일부 군락을 이룬다. 고향을 떠난 이산가족을 만난 양 눈물겹도록 반갑다. 참으로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인데…
<하얀 민들레>
우정읍 화산리 96-1에는 ‘김연방묘소’가 있다. 이 묘소는 고종 42년(1905) 을사늑약 때 낙향하여 교육 운동에 참여하고 3.1만세운동을 지원했던 김연방의 묘소다. 김연방(金然昉)은 우정면 화산리 일원동에서 태어났으며 고종 39년(1902)에 시종원 시어(侍御)로서 고종을 측근에서 보좌하였다. 김연방은 1919년 4월 13일 일본 헌병의 총탄에 순국하였고, 가옥은 모두 불탔다. 그의 묘역에는 ‘삼일독립운동순국추모비’를 세워 그의 의로움을 기리고 있다. 정부는 2015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김연방 묘소>
김연방묘소에서 약2㎞ 떨어진 우정면 화산리 559-2에는 ‘옛 우정면사무소 터’다. 이곳은 1919년 4월 3일 당시 우정면과 장안면의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대표적인 항쟁지였으나 현재는 없어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만세꾼들은 쌍봉산에서 독립결의를 다지고 조암리를 거쳐 우정면사무소에 도착하여 46㎡ 정도 규모의 초가집인 면사무소를 부수고, 집기와 서류를 불태움으로써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하였다.
<옛 우정면사무소 터>
<수령 450년의 음(엄)나무>
<화산교회>
옛 우정면사무소가 있는 화산리에서 북으로 약3㎞쯤 걸어가면 우정읍 한각리 ‘각리·죽리마을’로 만세꾼들이 시위를 마친 후 화수리주재소로 이동할 때 거쳤던 마을이다. 이곳을 지나면 우정읍 한각리 568-1 ‘한각리광장터’다. 이곳 주민들은 광장으로 들어오는 만세꾼을 맞이하고 화수리주재소로 이동하고자 대열을 정비하여 한 무리는 오른쪽의 솔밭 길을 넘어서 이동하였고, 다른 무리는 왼쪽의 화수리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화수리주재소를 향해 출발하였다.
<한각리광장터>
한각리광장터에서 한각들을 건너 한각리 561-2에는 ‘최진성의 집터’가 있다. 이 집터는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주민들과 함께 뒷동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며 만세를 불렀던 최진성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최진성은 1903년(고종40) 이곳에서 출샐하였다. 일제는 면사무소가 불타고 왜경이 죽임을 당하는 등 운동이 격렬해지자 주모자를 체포하고 마을에 여러 차례 불을 질렀다. 최진성이 검거망을 피해 다라나자 보복으로 최진성의 집에 불을 질렀으나 마을주민들이 합심하여 불을 껐다.
<최진성 집터>
최진성의 집터 마당에는 ‘만세 문’이 있다. 이 문은 공간적이고 예술적인 형태의 기념비로서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상징한다. ‘문’ 형태의 조형물 안으로 스며드는 빛은 자유를 향한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상징하며 관람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만세문>
화성시 우정면 화수리 834-13에는 1919년 4월 3일 당시 ‘화수리주재소’가 있던 곳이다. 2천 5백여 명의 만세꾼들이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를 불태우고 화수리에 도착하여 주재소를 에워싼 다음 만세를 불렀다. 이에 놀란 가와바다도요타로(川端豊太郎) 순사는 군중들에게 총을 쏘면서 달아났고, 시위대는 주재소를 모두 불태운 후 가와바타를 처단하였다. 화수리마을은 주재소가 파괴되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가옥이 불타는 등 보복을 당하였다. 이 ‘화수리주재소 터’는 지금의 화수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옛 화수리주재소 터-현 화수초등학교>
주재소 터를 지나면 어제 출발한 ‘화성3·1운동만세길’ 방문자센터다. 방문자센터는 옛 우정보건지소 건물 위에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수직적 기념비와 함께 재생의 의미를 드러낸다고 한다. 자유와 독립의 정신이 담겨 있는 만세 길을 내부 공간에서 경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이 없으면 이 센터가 서있는 의미가 쉽게 와 닿지 않는다. 기왕에 화성3·1운동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방문자센터를 건립했다면 화성지역이나 우리의 전통적 특성이 가미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크게 남는다.
<화성3.1운동만세길 방문자센터>
이러한 일제의 만행은 1919년 4월 15일 군대를 동원하여 제암리교회에서 마을주민 23명을 교회에 가두고 총살했으며, 주모자로 독립운동가 김홍렬과 그의 일가족 6명을 처참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처럼 화성3.1독립만세운동은 역사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민초들의 조직적이고 공세적 투쟁으로 일제에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이처럼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항쟁했던 선조들의 고귀한 희생의 31km길을 100년이 지난 지금 미래세대를 위한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되살렸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쌍봉산 정상의 목련>
<만세길 31km 완주기념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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