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라산둘레길과 나바위성당
그리고 신성리갈대밭
(2018년 12월 22일)
瓦也 정유순
고향 땅을 밟는다는 설렘으로 밤새 잠을 설친다. 버스에 몸을 기대자 깊은 잠에 빠져버리고 막힘이 없는 도로는 예정시간보다 빠르게 먼저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신성리갈대밭으로 인도한다. 신성리 갈대밭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전북 익산과 마주하고 있다. 금강의 아침은 햇살과 어우러지는 물안개를 피우며 안개 속으로 꿈을 실어 나른다.
<물안개 자욱한 금강>
금강하굿둑으로 넓은 호수를 이룬 금강은 전북 장수군에 있는 신무산(897m) 뜬봉샘(780m)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무주, 충남 금산, 충북의 영동과 옥천을 향해 북으로 뻗어 오르다가 대청댐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서쪽으로 대전과 세종시, 충남의 공주, 부여, 논산을 거쳐 전북과 충남을 가르며 비단결 같은 천리 길 강을 만들어 군산 앞바다로 젖어든다.
<금강발원지 뜬봉샘>
<금강하굿둑>
그 비단 강 하류 강변에 펼쳐진 폭 200미터, 길이 1Km, 면적이 무려 6만여 평에 이르는 우리나라 4대 갈대밭 중의 하나로, 동짓날에도 기온은 벌써 봄이 오는 길목 같다. 강둑으로 올라서면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공동경비구역 JSA>에 출연한 배우 송강호 이영애 이병헌의 조형물에서 사진 찍기가 바쁘다. 둑 밑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키가 2∼3m 크기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갈대 숲속으로 몸을 숨긴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조형물>
갈대숲 사이로 들려오는 바람소리는 연인의 속삭임이다. 아니 천사의 속삭임이고 인어아가씨의 치명적인 유혹이다.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통나무집 창가에/길 떠난 소녀 같이/하얗게 밤을 세우네∼♬∼♩” 가수 이정옥이 부른 ‘숨어 우는 바람소리’가 콧노래가 되어 절로 나온다. 이 갈대밭은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지만, 아침햇볕이 여울지는 금강물결과 신비한 조화를 이루고 겨울철에는 고니, 청둥오리 등 철새의 군락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신성리갈대밭>
<신성리갈대밭 산책로>
옛날의 갈대밭은 경제적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갈꽃으로 만든 빗자루는 최고급 비였다. 갈꽃이 쇠기 전에 뽑아다 그늘에 말려 비를 만들면 결이 부드럽고 잘 쓸어져 실내에서 사용하는 비였다. 또한 갈대는 중요한 건축자재였다. 짚 대신 갈대를 엮어 지붕이엉을 하기도 했지만, 흙벽 사이에 발로 엮어 넣어 고정을 시킨 뒤 황토를 반죽하여 양쪽으로 붙이면 당시로는 아주 훌륭한 보온재 이었다. 갈대나 갈비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으며, 필자도 생전에 어머니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갈비를 30년 넘게 사용하고 있다.
<갈비>
또한 갈대밭은 어릴 적 추억이 새록새록 샘물처럼 솟는다. 늦여름이나 초가을 무렵이면 달이 뜨는 갈대밭에는 갈게들이 갈꽃까지 타고 올라오는 모습이 볼 만했다. 또한 캄캄한 밤에는 손전등으로 불을 비추면 빛을 따라 나오는 갈게를 잡아 간장게장을 담아 겨우내 밑반찬으로 즐겨먹었던 기억이 난다. 갈게는 갈대밭에 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큰 것이 갑각길이 약25㎜ 너비30㎜이다.
<갈꽃>
아주 여유 있게 ‘느림의 미학’을 만끽하며 갈대밭을 휘젓는다. 갈대밭은 가족과 연인의 이야기가 도란도란 정겨움 묻어나는 아름다운 곳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물안개는 잦아드는데, 미세먼지가 시야를 가린다. 잎과 줄기가 말라 스산함을 더하는 동짓날에 비상해야할 철새들이 아직은 조용하다. 갈대밭 산책길에 박두진, 김소월, 박목월 등 서정 시인들의 시를 써놓은 통나무 판자가 걸려 있어 한 구절 한 구절 읊어가며 사색을 하기에 최적이다.
<신성리갈대밭 시 게시판>
<신성리갈대밭 유람선 선착장>
1990년 금강 하구둑이 완성된 후 넓은 담수호가 조성되면서 겨울철새들의 낙원이 되었는데, 아침이라 해질 무렵에 펼쳐지는 군무를 보지 못하고 웅포대교를 건너 전북 익산시 함라산둘레길로 이동한다. 웅포대교(熊浦大橋)는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에 있는 다리로 금강을 가로질러 웅포면 맹산리와 충청남도 부여군 양화면 내성리를 연결하고 있다. 총 길이 1,226m의 왕복 2차선으로 1999년 완공되었다.
<웅포대교-다음캡쳐>
신성리갈대밭 강 건너 전북 익산시 웅포의 곰개나루에도 지금은 농경지로 바뀌었으나 이곳 못지않은 갈대밭이 있었다. 곰개는 ‘곰이 금강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 하여 ‘곰개나루’라고 이름이 붙여졌으며, 웅포는 곰 웅(熊)자에 개 포(浦)자를 써서 이름 지어졌다. 삼국시대 세 번째 안에 드는 포구로 일본, 중국 등과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진 백제의 대표적인 포구였고, 해양을 제패한 백제의 통로였다. 그리고 660년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치기 위해 금강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던 길목이었다.
<곰개(웅포)나루와 함라산 원경>
함라(咸羅)는 옛 함열현(咸悅縣)의 별칭으로 함라면의 중심지 지명이 함열리이고, 함열향교가 있다. 함열현은 본래 감물아현(甘物阿縣)이라 하였는데 근방의 곰개[熊浦]라는 지명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함열”은 이를 달리 적은 것뿐이라고 한다. 지금의 함열읍은 호남선 철길이 개설될 때 양반들의 반대가 심해지자 약6㎞ 떨어진 와리(瓦里)라는 곳에 철길을 내고 기차역을 ‘함열’이라고 하면서 원 함열은 ‘함라’가 되었다. 옛 함열현은 1914년 익산군(현 익산시)에 병합되면서 함열읍·함라면·황등면·웅포면·성당면으로 나누어진다.
<함열읍-함라면 지도>
<함열향교 입구>
함라산둘레길은 삼부자집 앞에서 시작한다. 삼부자(三富者)집은 조해영 가옥, 김안균 가옥, 이배원 가옥을 가리킨다. 세 가옥 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옥은 조해영 가옥뿐이다. 그것도 솟을대문은 굳게 닫혀있어 담장이 열려 있는 후원을 통해 들어간다. 조해영 가옥은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에 위치해 있으며 김안균 가옥과 같은 1986년 9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됐다.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안채와 본채, 별채 그리고 문간채만 남아있다.
<조해영 가옥 후원>
<조해영 가옥 대문>
안채는 상량문에 ‘대정(大正)7년’이라 명기돼 있어 1918년에 건축된 것으로 보이고 별채는 안채보다 조금 늦은 1922년이나 그보다 조금 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가옥은 남향이며 안채와 별채는 모두 남북으로 길게 서로 평행하게 배치되어 있다. 담장은 붉은 벽돌로 쌓고 그 중앙에 화려한 그림을 그려 넣었다. 네모나게 흰 회칠을 하고 돋움 그림 속으로 학·사슴·구름 등 십장생 벽돌꽃담이 있다. 경복궁 대조전 뒤뜰의 굴뚝꽃담을 모방한 것 같다.
<조해영 가옥 안채>
<조해영 가옥 담장>
울안에는 ‘김육불망비(金堉不忘碑)’가 서있다. 1659년(효종10)년에 세워진 이 비는 ‘영의정 김육’이 사망한 이듬해에 대동법시행에 따른 백성들의 칭송 비(碑)다. 잠곡 김육(潛谷 金堉, 1580∼1658)은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추진하였으며 화폐의 보급에 힘썼다. 1638년(인조16) 충청도 관찰사에 재직 중 대동법을 제창 건의하였고, 생전에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부분 시행되었다.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 전면 중앙에는 ‘領議政金公堉輕搖保民仁德不忘碑(영의정김공육경요보민인덕불망비)가 새겨져 있다.
<영의정 김육 경요보민 인덕 불망비>
삼부자 가옥 중 가장 먼저 지은 이배원 가옥(전북 민속문화재 제37호)은 출입이 안 되어 그냥 지나쳤으며, 조해영 가옥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삼부자 가옥 중 가장 큰 김안균 가옥(전북 민속문화재 제23호)은 안채와 사랑채는 1922년에, 동·서 행랑채는 1930년대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전통적인 상류가옥의 면모를 보여주고, 조선 말기 양반가옥 형식을 기본으로 구조와 장식에 일본식 수법이 가미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김안균 가옥>
이 세 가옥의 주인들은 특이하게도 한 마을의 만석꾼들이다. 당대 우리나라에는 90여명의 만석꾼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세 명의 만석꾼이 작은 마을에 모여 살았다는 것을 보면 옛 함라(함열)지역 명성과 풍요로움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본인들의 이익에 치중하지 않고 넉넉했던 수확만큼 동네 주민들에게 나눔을 실천한 함라의 삼부자들은 우리나라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로 전해지고 있다.
<김안균 가옥의 너른 입구>
특히 함라마을의 옛 담장은 주택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음에도 담장이 높은 점이 특징이다. 흙다짐에 돌을 박은 형식인 토석담이 주류를 이룬다. 그 밖에도 토담, 돌담, 전돌을 사용한 담 등 다양한 형식의 담들이 조화를 이룬다. 담장 일부는 거푸집을 담장의 양편에 대고 황토와 짚을 혼합하여 축조되었다. 마을주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세대를 이어가며 만들고 덧붙인 우리민족의 미적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문화유산이다.
<함라마을의 옛담장
점심을 하고 둘레길을 따라 함라산으로 올라간다. 함라산(咸羅山, 240.5m)은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와 웅포면 웅포리·송천리의 경계에 있다. 산줄기의 서쪽으로 금강(錦江)과 맞닿아 있고, 정상에 서면 남쪽으로 호남평야가 내려다보인다. 북쪽에는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된 숭림사(崇林寺)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익산의 미륵산(彌勒山, 430m)이 멀리 보이고, 그 가운데에 나의 고향 함열읍 다송리 와야마을까지 훤히 보였는데 오늘은 미세먼지가 눈을 가린다.
<함라산 정상>
가을이면 곰개장으로 황석어젓갈 등 어물을 사시러 가시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함라산을 넘을 때 서천 장항제련소의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먹거리를 만들어 주는 경제인줄 알았다. 봄이면 함라산 동쪽 기슭으로 춘란(春蘭)을 채집하던 아저씨들이 지금도 있을까? 봄이면 황복 우어 등 곰개장에서만 맛 볼 수 있는 계절의 별미가 지금도 있을까?. 그러나 지금 함라산으로 올라가는 그 길은 기억에는 없고 숨만 차다. 어릴 적 추억이 무뎌진 것은 아닐까∼?
<함라산둘레길>
고향이라는 것은 참 묘한 관계다. 고향마을 논두렁·밭두렁으로 휘젓고 다니던 그 어릴 적 추억들이 맴돈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쪼르르 서울로 올라와 촌놈 티를 벗으려고 쓸데없는 억지도 부렸으나, 그럴수록 더 깊게 가슴으로 파고드는 고향! 그런 고향을 평소에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무슨 일만 있으면 호들갑떨 듯 생각나지 않았던가. 또 어느 때는 이유 없는 향수병에 울컥하여 독한 술을 목구멍 뒤로 삼켜야 했다. 참으로 고향이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배꼽이다.
<고향을 지키는 감나무>
함라산 정상에서 넉넉한 인심을 한가득 안고 웅포 쪽으로 내려오면 익산시산림문화체험관과 최북단야생차군락지가 나온다. 산림문화체험관은 연면적 477㎡로 숲 카페, 다도체험실, 목공체험실, 제다체험실을 두루 갖춰 시민과 학생들의 체험활동 증진은 물론 산림과 환경의 중요성 등을 교육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녹차군락지는 싱그러움이 넘쳐나기도 하지만 전라도 최북단에서 녹차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백제고분군이 있는 웅포면 입점리에서 천주교성지가 있는 나바위성당으로 이동한다.
<산림문화체험관>
<야생차밭>
<야생차재배단지>
<야생차북방한계군락지 표지석>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 있는 이 성당은 1845년(헌종11년) 김대건(金大建, 1821∼1846)신부가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처음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6년 프아넬신부가 설계 한 것을 베르모레르 신부가 감독을 하고 중국인 기술자를 동원하여 지은 건물이다. 당시에는 앞면 6칸, 옆면 13칸 목조건물이었으나 1916년 건물을 개조하면서 일부를 벽돌로 바뀌었다. 남·여의 출입문이 서로 다르고 예배당도 남·여가 따로 앉아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으며,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지은 건물로 우리 전통양식과 서양양식이 합쳐진 점이 특이하다.
<나바위성당 전면>
<나바위성당 내부>
<나바위성당 후면>
교회 뒤로하여 나바위(羅岩)가 있는 화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김대건신부의 성상과 순교기념탑이 있고, 정상에는 망금정(望錦亭)이 있다. 망금정은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1912년부터 매년 6월에 화산 정상에 올라 금강을 굽어보며 피정을 한 곳이었는데, 1915년 베르모렐 신부는 주교의 피정을 돕기 위해 정자를 짓자, 드망즈 주교가 망금정으로 명명하였다. 나바위 뒤에는 금강으로 출어하는 배들의 만선(滿船)과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는 마애삼존불이 오랜 세월과 함께 그 옛적 풍경을 상상케 한다.
<김대건 성상>
<망금정>
<마애삼존불-형상이 희미함>
망금정에서 우측 계단으로 내려오면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김대건 소나무도 나오고, 수탉이 알을 낳다가 돌이 되었다는 수탉바위도 보인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가 첫 착지한 십자바위가 있는데, 이는 그 때만 하여도 이곳까지 금강이 흘렀고 고기잡이배가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뱃길이 화산 아래로 이어져 있었던 것 같다. 화산이라는 이름은 우암 송시열이 후학을 가르치던 강경의 팔괘정에서 이 산을 바라보며 철따라 변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바위에 華山(화산)을 직접 새겨서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김대건소나무>
<수탁바위>
<십자바위>
<화산-송시열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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