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안동지방에서 하루(1)

와야 정유순 2018. 9. 4. 10:31

안동지방에서 하루(1)

(201891)

瓦也 정유순

   구월 첫째 날, 가을이 시작되는 토요일로 발길을 자칭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고 하는 경북 안동지방으로 돌려본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 출발한 버스는 중간에 천등산휴게소에서 한번 쉬고 계속 뻗댄다. 천등산 휴게소에는 고구려 유적을 전시해 놓아서 잠시 역사공부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중에서도 말()에게도 갑옷을 입힌 개마무사상(鎧馬武士像)은 철 비늘을 한 땀 한 땀 엮어서 만든 갑옷으로서 그 당시에 최고의 아이콘으로 대륙을 누볐을 조상들의 기상이 선하게 그려진다.

<개마무사상-평택제천고속도로천등산휴게소(하)>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으로 서울에서 안동까지는 약 두 시간 반 만에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 도착한다. 소산리는 안동김씨(安東金氏) 집성촌으로 원래 이름이 금산촌(金山村)이었으나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상징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이 낙향하여 은거할 때 금산촌은 너무나 화려하므로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여 마을을 감싸고 있는 소요산(素耀山)의 이름을 따서 소산으로 고쳤으며, 소산(素山)깨끗하고, 희며, 빛나는 산에 둘러싸인 마을이란 뜻을 지녔다고 한다.

<소산마을 입구>


   소산리 안동김씨는 후안동김씨(신안동김씨)와 선안동김씨(구안동김씨)로 갈라진다. 후안동김씨는 고려시대 삼태사 중의 한 명인 김선평(金宣平)의 후손들이고, 선안동김씨는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의 후손들이다. 후안동김씨의 경우, 입향조 김삼근(金三近)이 진외가인 풍산류씨와의 인연을 기반으로 풍산읍 불정촌(佛頂村, 지금의 안교리)에 정착하였다가 소산리로 옮겨 와 집성촌을 이룬다. 참고로 소산리의 후안동김씨는 조선후기 세도정치의 온상이 되는 서울 장동김씨 혈통의 뿌리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소산마을 안내도>

<소산마을 입구 연못>


   소산마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동오’(東吳)라는 야트막한 언덕에 삼구정이란 정자가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3(19851230)로 지정된 삼구정(三龜亭)안동김씨 소산마을 입향조인 김삼근(金三近)의 손자 김영전(金永銓, 14391522)이 지례현감으로 있던 1496(연산군 2)에 당시 88세의 노모 예천권씨를 즐겁게 하려는 효심에서 아우 김영추(金永錘), 김영수(金永銖)와 함께 삼구정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연화문이 새겨진 주춧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절터의 석물을 재료로 이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삼구정 원경>


<삼구정>


   삼구정이란 정자 앞뜰에 고인돌처럼 보이기도 하는 거북이 모양의 돌이 세 개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거북이는 십장생 중의 하나이므로 모친이 거북이처럼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남 세 곳은 풍산들이 시원하게 트여 있으며, 남쪽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신역천이 흐르는 절경에 자리한다. 그동안 몇 차례 중·보수한 것으로 보이며, 현판은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이 썼다. 삼구정 앞 노송들은 효는 모든 덕행의 근본 [백행지본(孝百行之本)]’처럼 세상을 굽어본다.

<세개의 고인돌>

<삼구정 현판>

<보호수-소나무>


   삼구정을 나와 석류가 익어가는 소산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처음 만나는 게 경북민속문화재 제147호로 지정된 동야고택(東埜古宅)이다. 이 고택은 김중안(金重安, 16391705)이 처음 지은 것이라고 하며 대략 1700년대로 추측한다. 동야(東埜김양근(金養根, 17341799)의 본관은 안동으로,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만녕전별검(萬寧殿別檢), 전적(典籍), 병조낭관(兵曹郎官) 등을 지냈다. 1773년 시폐(時弊)를 논하는 소를 올려 문제가 되자, 낙향하였다가 이듬해 지평()에 복직되었다.

<석류>


   뒤에 현풍현감과 음죽현감을 역임하였고, 1799년 통정대부가 되어 형조참의를 지냈다. 김양근은 영조 때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어전의 면시(面試)에서 답안에 공자가어(孔子家語)<노인동야필사(魯人東埜畢事)>를 인용하였다. 이에 왕이 동야선달은 어디 있나라 부르면서 시권을 외우라고 명한 것을 기념하고자 호를 동야라 하였으며, 이로 인해 이 집의 이름이 되었다. 문집으로 <동야집(東埜集)> 146책이 있다.

<동야고택>


  동야고택 바로 위에는 안동김씨 종택(宗宅)이 있다. 이 종택을 지은 양소당(養素堂김영수(金永銖, 14461502)는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적옹(積翁)이다. 아버지는 한성판관 김계권(金係權)이다. 음보(蔭補)로 의금부도사·사헌부감찰·상주판관이 되었다. 영덕현령·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사헌부장령·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를 거쳐 영천군수·금교도찰방에 임명되었으며, 특히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김영수는 안동김씨 소산입향조인 비안공 김삼근의 손자이며 삼구당을 지은 김영전의 아우이다.

<안동낌씨 종택-양소당>

<양소당 내부>


   조선 성종 때 지은 이 건물의 구성은 사랑채, 중문간체, 안채로 구성된 자형 몸체가 있고, 오른쪽에 사당이 있다. 몸채의 왼쪽에는 담을 쌓아 안채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독립된 외부 공간을 마련하였다. 겹집으로 구성된 안채에는 2칸의 안방과 대청이 있고, 그 위에 벽장이 있으며, 대청이 옆에 다락이 있다. 이러한 형식은 안동지역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유형이다. 이 집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양소당 사당>


   다음은 종택에서 북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묵재고택(默齋古宅)이 있다. 이 고택은 언제 누가 지었는지 기록은 없지만 현재 살고 있는 김승진(金昇鎭)의 조상들이 여러 대에 걸쳐 살아온 집이다. 다만 사랑채의 암막새 기와 내림새 면에 새겨진 정덕(正德)10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1516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소요산 기슭에 터를 잡아 남·서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본채의 평면이 옛 가옥 형태에서 많이 나타나는 ‘H’자형이며, 그 앞에 ‘-’자 행랑채가 놓여져 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특히 초가형 대문이 눈에 띈다.

<묵재고택>


   이어서 비안공구택이 옆에 있다. 안동비안공구택(安東比安公舊宅)은 조선 세종 때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낸 비안공(比安公) 김삼근(金三近, 14191465)의 옛집이다. 김삼근은 풍산면 남불정촌(南佛頂村)에 살았으나 둘째 아들 김계행(14301517)이 출생한 후 이곳으로 옮겨올 때 이 집을 처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세조 때 대장경을 간행한 고승 김학조(金學祖)와 삼구정을 지은 김영전이 그의 손자이다. 이 건물의 정면에 돈소당(敦素堂)이라는 현판은 감찰공 김영전의 9대손 김언행의 호를 따서 부르는 이름이다.

<비안공구택-돈소당>


   삼소재는 선안동김씨(先安東金氏), 일명 상락김씨(上洛金氏) 중시조 김방경(金方慶)17세손 김용추(金用秋, 16511711)가 지은 집이다. 김용추는 선안동김씨 소산 입향조인 김언준(金彦濬)7대 종손으로서,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이다. 당호는 김용추의 5세손인 김영락(金英洛, 17961875)의 호를 딴 것이다.

<삼소재>


   김영락은 정조 때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삼소재는 안동지역 선안동김씨 종택으로 김용추의 처남 진성이씨 이고(李杲, 16491708)가 예천군수 재임 때에 들렀다가 초가삼간이 안타깝다며 지어준 것으로, 1692(숙종 18)에 완성되었으며,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6(19851230)로 지정되었다.

<삼소재 앞의 연꽃>


  ‘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뜻을 가진 청원루(淸遠樓)를 둘러보지 못하고 풍산읍 하리리에 있는 안동하리동삼층석탑을 보러 서둘러 빠져나온다. 이 탑은 참깨 밭 중앙에 위치하여 접근하기가 요원치 않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108)로 지정했으면서도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을 미확보 한 것 같다. 이 탑은 이층기단(二層基壇) 위에 올려 진 삼층석탑으로 높이는 5.8이고, 신라양식을 간직한 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탑의 특징은 몸체 돌의 아래 위가 서로 다른 돌로 되어 있다고 한다.

<안동하리동삼층석탑>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禮安李氏 忠孝堂)으로 가는 마을 길목에는 전국 각지에 분포하면서도 국내에만 자생하는 특산 식물인 하수오(何首烏)’, 아침에 피었다가 오후에 지는 나팔꽃과 경쟁하며 울타리를 타고 올라간다. 충효당 가기 전에는 정면 3, 측면 1.5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에 마루를 깔고 좌우 협간에는 방을 들인 곡강정(曲江亭)은 멀리서 눈인사만 나눈다. 곡강정은 조선 후기에 건립한 정자로, 명칭은 예안이씨 이호(李瑚)의 호인 곡강(曲江)에서 따온 것이다.

<하수오>

<곡강정>


   예안이씨 충효당(禮安李氏 忠孝堂)예안이씨 16대손 근재공(近齋公)의 둘째아들 풍은 이홍인(豊隱 李洪仁, 15281594)의 종택이다. 이홍인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 조선시대인 1561(명종 16) 무렵에 지었으며 충효당이라고 부른다. 이홍인은 무예와 병법에 능숙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풍천(豊川)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국하였다. 이에 나라로부터 정충각(旌忠閣)을 정려(旌閭)받았다. 또 그의 8세손 이한오의 뛰어난 효행을 기려 정효각(旌孝閣)을 정려받았다.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네이버캡쳐>


   건물구조는 자형 몸체와 ‘-’자형 별당인 쌍수당(雙修堂)’으로 구성되었다. 쌍수당이란 충과 효를 한 집안에서 다 갖추었다는 의미로, 순국한 이홍인의 충의와 그 후손 이한오의 지극한 효를 기리는 뜻이라고 한다. 쌍수당 측면으로는 백원당(百源堂)’이라는 현판도 보이는데, 백원(百源)이란 모든 근원, 즉 효()를 말한다. 충과 효는 둘이면서 하나이며, 이를 모두 갈고 닦고자 하는 가문의 지향(志向)인 것 같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쌍수당을 전면 보수를 하고 있었다. 기와를 끼워 만든 부엌 벽은 움직이는 문양 같다.

<쌍수당 사진>

<충효당 부엌 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