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안동지방에서 하루(2)

와야 정유순 2018. 9. 4. 23:27

안동지방에서 하루(2)

(201891)

瓦也 정유순

   예안이씨 충효당에서 가까운 곳에 안동하리동모전삼층석탑(安東下里洞模塼三層石塔)’이 있다. 이 탑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3.25로 안동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모전탑이다. 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가 절터일 가능성도 있으나 흔적은 확인할 수 없다. 기단면석은 자연암석을 그대로 이용했기 때문에 암반인 기반과 함께 정제되지 못한 형태이다. 기단 덮개돌[甲石]은 대반석(大盤石)이며, 그 위에 초층 몸돌을 놓았다.

<안동하리동모전삼층석탑>

<안동시 하리동의 대추>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안동 시은고택(市隱古宅)은 예안이씨 7세손 이훈(李薰, 14861552)의 종택으로 1525(중종20) 무렵에 세워졌다. 1504(연산군10)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으나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참혹함을 보고 나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 집을 짓고 살았다. 평지에 지은 남서향 집으로 대문채는 없어지고 지금은 자형 정침(正寢)만 남아 있다. 유학자 집안으로 조상들이 저술한 문집을 비롯한 고문서들이 상당수 소장되어 있고 문중의 회의가 종택에서 열리며, 국가민속문화재 제287호이다.

<시은고택-예안이씨종택>


   마을 고구마 밭에서는 100년에 한 번 핀다는 고구마 꽃이 활짝 폈다. 중남미가 원산지인 고구마는 아열대 식물로 사계절이 뚜렷하고 날씨가 선선한 내륙지역에서는 좀처럼 꽃을 보기 힘들다고 하며, 고구마 꽃의 꽃말은 행운이다. 한편 전문가들은 고구마 꽃이 핀 것은 무더위가 이어지면서 땅속의 수분이 부족한 때문으로 보고 있다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과 자연환경의 변이가 아니기만 빌 뿐이다.

<고구마꽃>


   풍산시장 안에 있는 안동불고기 집에서 소 한 마리를 맛보고 오후에는 식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안동지역 예안이씨(禮安李氏)의 효()와 형제간의 우애(友愛)를 상징하는 풍산읍 상리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정자인 체화정(경북유형문화재 제200)으로 잠시 이동한다. 체화정(棣華亭)1761(영조37)에 진사 이민적(李敏迪, 17021763)이 학문을 닦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정자 앞쪽의 삼층도지(三層島池)라는 못에는 3개의 작은 섬이 있으며, 정자 뒤쪽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 수목이 울창하여 경관과 지세가 좋다.

<체화정과 삼층도지(체화지)>


   그 후 순조가 효자 정려(旌閭)를 내린 바 있는 용눌재 이한오(慵訥齋 李漢伍)가 노모를 체화정에 모셔 효도하였으며, 이민적이 형 이민정(李敏政)과 함께 살면서 우애를 다지던 장소였다고 한다. 정자 앞 연못 체화지(棣華池)의 세 개의 섬은 방장(方丈봉래(蓬萊영주(瀛州)의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하며, 산앵두나무의 꽃을 뜻하는 체화란 형제간의 화목과 우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시경(詩經)’에서 그 의미를 따왔다고 한다.

<체화정과 그 주변>


   체화정에서 연미사(燕尾寺)에 있는 보물 제115호로 지정된 안동이천동석불상(安東泥川洞石佛像)을 보러간다. 이 석불상은 마애불로 대웅전 왼쪽에 위치한다. 몸체와 머리가 각기 다른 돌로 되었는데, 몸체는 마애불처럼 새기고 머리는 조각한 특이한 모습이다. 본래 무너진 채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근래에 복원한 것으로 이천동 석불의 잔잔한 미소는 안동의 상징적인 얼굴로 잘 알려져 있다.

<안동시 이천동석불상>


   속칭 제비원 미륵불이라고도 불리는 이 석불은 바로 연미사의 대표적인 미륵불이다. 연미사라는 이름은 원래 조선시대 과객(過客)이 쉬어가는 숙소인 연비원(燕飛院), 속칭 제비원이라 불렀다는 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당시 연미사 석불에는 제비 모양의 누()가 덮고 있었으며 법당은 제비의 부리에 해당된다고 해 연미사라 지어 불렀다고 전한다.

<연미사 대웅전>

<연미사 대웅전 불상>


   그리고 이곳은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에/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대 가인이 그 뉘기며(중략)∼♬길게 늘어지는 남도민요 성주풀이의 본향으로 넉넉하고도 묘한 석불의 미소는 우리 민족의 정한(情恨)을 부처님에 기대어 표출시키고자 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한국 불교는 외부에서 들어온 종교라기보다는 불교 이전의 고대로부터 이어 내려오던 우리민족의 오랜 민속신앙과 결합된 종교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연미사 삼층석탑 원경>


   다음은 안동의 천등산자락으로 이동한다. 천등산(燈山, 574)은 안동시의 진산(鎭山)인 학가산(鶴駕山, 870m)과 마주보고 있는 산으로, 안동시에서 서북쪽으로 16떨어져 있다. 예전에는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신라 문무왕 때 천상의 선녀가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능인(能仁) 대사의 도력에 감복하여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혀주었다는 전설에 연유하여 천등산으로 바뀌었다. 이 산자락에 있는 봉정사와 개목사를 보기 위해서다.

<안동 천등산-네이버두산백과>


   우선 개목사(開目寺)를 가기 위해서는 봉정사일주문을 통과하여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봉정사에 묵을 때 자주 나가 쉬었다는 명옥대(鳴玉臺, 경북문화재자료 174)입구에서 우측 산길로 접어든다. 태풍에 쓸어 진 나무를 넘고 흙이 패어 뿌리 채 삐져나온 산길의 정취를 만끽하면서 산책 삼아 한적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개목사에 다다른다.

<천등산봉정사 일주문>

<개목사 가는 길>


   개목사(開目寺)는 신라 때 의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의상이 이 산 정상 근처의 큰 바위 아래에서 수도를 하는데, 하늘에서 큰 등불이 비춰주어 99일 만에 도를 깨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자리에 99칸 절을 짓고, ‘하늘이 불을 밝혔다는 뜻으로 천등사’(天燈寺)라고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정몽주가 이 절에 와서 공부를 했다고 하며, 조선 초에 맹사성이 안동 부사로 와서 중수했다. 이때 맹사성이 안동지방에 장님이 많으니 개목사’(開目寺)라고 하면 장님이 안 생길 것이라고 하여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개목사 입구>

<천등산개목사 원통전>


  1969년 원통전을 해체·수리할 때 발견한 상량문에 따르면 이 건물은 1457년에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99칸이었다는 전설과는 달리 지금의 개목사 규모는 매우 단출하다. 낮은 담장에 이어 마치 여염집 같은 문을 지나면, 그다지 넓지 않은 뜰 안에 중심 전각인 원통전과 요사채가 있을 뿐이다.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조선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건물 전면에 툇마루를 깐 점이 독특하다. 옆에서 보면 지붕 앞쪽의 처마가 뒤 처마보다 더 길다. 조선 초기의 몇 되지 않는 건물로 보물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앞처마가 긴 개목사 원통전>


   다시 되짚어 명옥대 입구로 내려와 봉정사로 향한다. 안동봉정사(鳳停寺)2018630, 42차 유네스코에 공주마곡사, 보은법주사, 순천선암사, 해남대흥사, 영주부석사, 양산통도사와 함께 등재된 7곳 중의 하나이다. 또한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1999421일에 봉정사를 방문하기도 하여 더 유명해 졌다. 일설에는 영국 여왕이 꿈 전생에 비구니로 봉직했던 사원이 자주 나타나 측근을 통해 조사해 본 결과 봉정사란 사실을 알고 한국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봉정사 안내도>

<봉정사 대웅전>

  봉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682(신문왕2) 의상(義湘)이 창건한 절로 알려져 왔으나, 1971년 극락전에서 상량문이 발견됨으로써 672(문무왕12) 능인(能仁) 대사가 창건했음이 밝혀졌다. 천등굴에서 수학하던 능인 대사가 종이로 봉()을 만들어 도력으로 날렸는데, 이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창건 후 능인은 이 절에다 화엄강당(華嚴講堂)을 짓고 제자들에게 전법(傳法)하였다 한다.

<봉정사 극락전>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 때는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절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 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다.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永嘉志), ‘()의 서쪽 30 리에 천등산이 있다.’고 하였으며, 1566(명종 21) 퇴계이황(李滉)이 시를 지어 절의 동쪽에 있는 낙수대(落水臺)에 붙였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에서도 계속 존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엄강당>


   현재 이 절에는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국보 제15호인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하여, 보물 제55호인 봉정사대웅전, 보물 제448호인 봉정사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봉정사고금당(古今堂) 등의 지정문화재와 승방(僧房)인 무량해회(無量海會만세루(萬歲樓우화루(雨花樓요사채 등 21동의 전각이 있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에 건립된 총 높이 3.35m의 삼층석탑(경북 유형문화재 제182)이 있고, 경판고(經板庫)에는 대장경 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고금당>


  봉정사 동쪽 산길을 따라 잘 정리된 돌계단을 올라가면 영산암(靈山庵)의 고풍이 한눈에 와 닿는데, 하늘을 향해 자유롭게 뻗고 있는 고목과 암자와의 조화는 또 하나의 앙상블이다. 또한 영산암은 풍수적으로 봉정사의 동쪽 지세가 약해서 세운 암자라고 전해지고 있다. 영산암은 전체가 자 공간으로 구성돼 있으나 건물의 구체적인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봉정사영산전중수기등 사찰 고서와 여러 자료를 참고해보면 19세기 말로 추정해 본다.


<영산암>


<영산암과 반송>

 

   안동은 각 시대별로 다양한 역사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문화의 보고(寶庫)이자 우리 민족 정신문화의 가장 중심에 서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안동을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고 하는 이유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으로 대한민국 미래 천년을 내다보며 정신문화와 도덕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도록 승화시켜 나가고 더 나아가서는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잃어버린 고대사를 회복하기 위함일 것이다 

<소나무>


   따라서 조선 5백년의 유교문화에 머물지 말고 그 이전 우리민족이 면면히 이어온 배달민족(倍達民族)의 혼을 밝히고 유지하는 것만이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 한 가지 안동출신으로 조선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의 오판과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상징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의 아집이 조선역사상 두 번의 전란으로 국토가 유린되고 죄 없는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안동 의성김씨 종택>

<경북독립운동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