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천 삼 백리 길을 따라(여섯 번째-1)
(2018년7월14일∼15일, 구미 도개면∼제2왜관교)
瓦也 정유순
도개면(桃開面)은 구미시 최북단에 있는 지역으로 신라불교 최초 전래지로서 도를 열었다 하여 도개면(桃開面)이라 부른다. 길 도(道)자를 쓰지 않고 복숭아 도(桃)자를 쓴 이유는 길 도(道)자를 쓰는 도개리가 있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고, 또한 구미시에 있는 신라 최초의 가람이 도리사(桃李寺)이므로 복숭아 도(桃)와 길 도(道)를 같은 뜻으로 보아 도개면이라 하였다.
<도개면사무소>
아침부터 햇살은 바늘이 되어 옷을 뚫고 살갗으로 파고들어 땀샘을 자극한다. 도개면사무소에서 출발하여 낙동강 자전거 포장도로에 올라서자 복사열은 아침의 여유도 없이 뿜어댄다. 낙동강 푸른 물도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 더위에 데워지는지 가까이 보이는 선산대교가 오늘 따라 더 까마득하다. 선산대교는 경남 고성에서 구미 도개까지 연결되는 국도 제33호선의 낙동강 다리이다. 그래도 달맞이꽃은 아직도 달밤인 양 얼굴색이 환하다.
<낙동강과 선산대교>
선산대교와 나란히 있는 일선교(선산읍∼해평면)를 지나면 의구총이 있는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이다. 국도 제25호 도로 옆에 있는 의구총(義狗塚)은 술 취해 길가에서 잠을 자다 불이 나서 위태롭게 되자 낙동강 물을 몸에 적셔와 주인을 구한 의로운 개의 무덤이다. 오랫동안 방치된 것을 1629년(인조7)에 선산부사 안응창(善山府使 安應昌)이 만든 의열도(義烈圖)의 의구전(義狗傳)에 나오는 내용대로 묘를 만들고 화강암 4폭에 조각하여 새롭게 정비하였다. 의구총은 경북 민속자료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의구총>
낙산리고분군은 3세기에서 7세기 중반기의 가야와 신라의 무덤들로 총 205기에 달하며, 낙동강 동쪽에 인접한 해발 700m 내외의 광범위한 구릉지대에 분포한다. 무덤을 덮은 봉분은 원형과 표주박형으로 되어있고, 내부는 옹관묘와 석관묘로 되어있다. 널무덤(토광묘), 오목야(吳木野)·중리(中里)·불로산(不老山)·월파정산(月波亭山)·정묘산(鄭墓山)·칠창동(七倉洞) 등 6개의 소지역 고분군으로 나누어지고, 유물은 굽다리접시를 비롯한 토기류와 장신구, 고리자루, 큰칼(환두대도) 등의 철기류가 발견되었다. 1990년 사적 제336호로 지정된 낙산리 고분군의 면적은 22만 9,245m2이다.
<낙산리 고분군>
고분군에서 구미유아교육체험장이 있는 안마을로 들어가면 밭 가운데에 7.2m 높이의 낙산리 삼층석탑이 있다. 주변 경작지에서 연화문 수막새를 비롯하여 많은 기와파편과 토기 조각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부근이 절터였음을 추측케 한다. 이 탑은 약간의 손상이 있으나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인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특이한 것은 탑신부의 1층 남쪽에 불상을 모시기 위한 감실(龕室)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낙산리 삼층석탑>
삼층석탑에서 논길을 따라 돌아 나오면 오얏(자두)나무 밭에는 자두가 익어가고 길옆에는 참나리가 붉게 물든다. 낙동강의 정체된 물의 흐름을 따라 구미보를 건너면 선산읍 원리에 있는 금오서원이 나온다.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말로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물은 흘러야 하고 흐르지 않는 물은 썩기 마련이다. 이러한 단순한 진리를 잊고 사는 게 지금 낙동강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모습 같다.
<참나리>
경상북도기념물 제60호(1985년10월15일)인 금오서원(金烏書院)은 고려 말 학자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570년(선조 3) 금오산 밑에 건립한 서원이었다. 1575년(선조 8)에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2년(선조 35)에 지금의 선산읍 자리에 옮겨지었다. 1609년(광해군 1)에는 다시 사액되어 중수하였고, 길재의 출생지인 봉계리를 향하여 남향으로 서 있는데 앞쪽으로 감천(甘川)과 낙동강이 만나는 물길이 내다보인다.
<금오서원>
<금오서원 앞 전경>
길재는 고려 말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를 지냈다. 1389년(창왕 1)에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고 노모의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였다. 1390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충절에서 은거하기로 작정하고 낙향하여 금오산 기슭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서원에는 성리학의 대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 정붕(鄭鵬), 박영(朴英), 장현광(張顯光) 등을 추가로 배향하여 5현의 위패를 모셨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은 47개의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금오서원 입구 읍청루>
<읍청루 올라가는 통계단>
금오서원에는 원계칠조(院戒七條)가 있다. 汚穢窓壁(오예창벽: 서원주위는 더럽히지 말 것) 損傷書冊(손상서책: 서책이나 기물을 손상하지 말 것) 遊戱廢業(유희폐업: 서원에서 노래하고 춤추지 말 것) 群居無禮(군거무례: 때지어 무례한 짓 하지 말 것) 干索酒食(간색주식: 술과 고기는 삼갈 것) 說話亂雜(설화난잡: 대화는 조용하고 음담패설을 하지 말 것) 衣冠不正(의관부정: 의관은 부정하게 하지 말 것) 등 하지 말 것을 7가지 정해 놓고 “이 칠금을 범한 자는 이미 왔으면 돌아가고, 아직 오지 않았으면 아예 오지를 말라(犯此七禁者 己來卽歸 未來卽莫來 기래칠금자 기래즉귀 미래즉막래)”고 타이른다.
<원계칠조(院戒七條)>
구미시(龜尾市)는 1995년 선산군과 통합하여 도농통합시라는 새로운 형태의 구미시가 되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龜尾)는 원래 선산군(善山郡)의 면(面)지역이었다가 1961년 5·16 이후 1963년 읍(邑)이 되었으며, 산업화과정에서 공업지역으로 발전하면서 1978년 시(市)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선산은 물산과 인구가 풍부하고, 사육신의 한사람인 하위지(河緯地)를 비롯하여 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영남 인물의 보고로 손꼽히는 지방이었다.
<구미시 지도-네이버>
오후에는 무더운 땡볕을 피하기 위해 태조산(太祖山, 692m, 일명 냉산) 중턱에 있는 도리사(桃李寺)로 향한다. 창건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도리사(桃李寺)는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고 전해진다. 중국에서 불도를 닦고 귀국한 고구려의 아도(阿道)가 신라 소지왕(炤知王)의 신임을 얻어 불교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 무렵 왕궁에서 돌아오던 아도가 이 곳 태조산(太祖山) 밑에 이르자 때가 겨울인데도, 산허리에 복숭아꽃과 오얏(자두)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그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 하였다.
<오얏(자두)나무>
“해동최초가람태조산성지도리사(海東最初伽藍太祖山聖地桃李寺)”라고 쓰인 일주문에서 4.5㎞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리사는 본당 밑 주차장까지 구절양장(九折羊腸) 산길이어서 버스로 이동한다. 주차장에서 올라가는 길이 무더운 여름이라 더 가파르게 느껴진다. 계단을 올라가 처음 대면하는 것이 ‘선실(禪室)과 승방(僧房)’으로 사용하는 설선당(說禪堂)이다.
<설선당>
개인의 소원을 적어 연줄처럼 걸어 놓은 석벽을 지나 다시 계단으로 접어들어 활짝 웃는 ‘천진동자불’을 뒤로하고 올라가면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이 나온다. 전각 뒤에는 진신사리를 모신 높이 8m의 웅장한 보탑을 세워놓고 전각 안에는 불상 대신에 기도를 올릴 수 있는 단을 만들어 놓았다.
<천진동자상>
<적멸보궁>
<진신사리 보탑>
적멸보궁에서 측면 계단을 이용하여 내려오면 아도화상의 좌상이 있고 향을 피울 수 있는 향로가 설치되어 있다. 아도화상은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하신 분으로 ‘향의 의미와 치유 효능에 대해서도 처음 알게 해주었다.’는 의미에서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아도화상 앞에 향을 피워 몸과 마음을 맑히는 아름다운 불교의 향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아도화상 좌상>
그리고 도리사의 본당인 극락전(極樂殿)과 일반 석탑과는 전혀 그 형태가 다른 특이한 모습의 도리사 석탑(石塔) 나온다. 지면 위에 길게 다듬은 돌 10매를 놓고 그 위에 탑의 기단부분을 세웠다. 기단은 사면에 네모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의 각 면에 직사각형 판석을 병풍처럼 둘러 세웠다. 탑신부분은 3중으로 각층마다 작은 석재를 중첩하여 얽거나 짜서 탑신부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벽돌탑을 모방한 모전석탑(模塼石塔)과 비슷하며, 건립 시기는 고려중엽으로 추정되고 높이는 3.3m이다.
<극락전>
<도리사 석탑>
극락전 우측계단으로 내려오면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 아도화상이 앉아 도를 닦았다는 좌선대가 있으며, 뒤편에 '아도화상 사적비 및 도리사 불량답 시주질비(阿道和尙 事跡碑 및 桃李寺 佛糧畓 施主秩碑)’가 서있다. 잠시 이마의 땀을 식히고 다시 극락전 마당으로 다시 올라오면 승려들이 수행하는 선방(禪房)이 있는 56칸(정면7칸 측면8칸) 규모의 ㄷ자형 건물인 태조선원(太祖禪院)이 있다.
<아도화상 좌선대>
<아도화상 사적비 및 도리사 불량답 시주질비>
<56칸 태조선원>
한 낯의 뜨거운 폭염이 잦아들기를 기다렸으나 태양은 더 뜨거워진다. 다시 낙동강 변 구미해평청소년수련원 입구로 이동하여 어차피 가야할 길을 나선다. 강변 수림(樹林)이 조성된 청소년수련원 길은 그래도 천국이나, 코발트색 하늘이 보이는 나지(裸地)는 이글거리는 가마솥이다. 그래도 시원하게 반겨주는 곳이 다리 밑이다. 어려서 할머니께서는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말을 듣고 그 다리를 찾으려 했던 동심(童心)이 언뜻 떠오른다.
<구미청소년수련원 숲길>
<낙동강 변 땡볕 자전거길>
습문교 아래에서 숨을 고르고 다시 길을 나선다. 초목이 우거진 낙동강 해평습지는 멸종위기종인 흑두루미, 재두루미, 고니 등 겨울 진객인 철새가 매년 10월 중순부터 다음 해 3월 말까지 월동을 하는 철새도래지역이다. 소음과 불빛에 예민한 이들 철새에게 편안하게 쉬었다 갈 수 있게 하려면 주민들의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낙동강 수상 데크>
<낙동강 해평습지-철새도래지>
구포∼생곡 간 구미국도대체우회도로 낙동강 교량구간은 땡볕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공사가 한창이다. 강 건너 수상제트스키 동호인들은 강물을 가르고 바람도 가르고 세월도 가른다. 구미의 진산 금오산(金烏山)은 가까이 갈수록 더 큰 산으로 다가온다.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산지에서 발원한 한천(漢川)이 만나는 구미시 구포동의 낙동강은 덧없이 넓어만 보인다.
<낙동강과 한천의 합수지점>
<금오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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