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릉수목원을 다녀와서
(2018년 7월 3일)
瓦也 정유순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207번지에 있는 홍릉수목원(洪陵樹木園)을 가기 위해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2호 출구로 나와 서울청량리우체국 앞에서 약1㎞쯤 걸으면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친모(親母)인 순헌귀비 엄씨의 원소(園所 : 왕가 산소의 다른 이름)인 영휘원(永徽園)을 지나고 세종대왕기념관 교차로를 건너면 국립산림과학원 정문에 도착하여 들어가면 국립산림과학원 부설 홍릉수목원이다. 그러나 홍릉수목원이란 표시는 없다.
<영휘원 입구>
<국립산림과학원>
원래 이곳은 1895년(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일본 낭인(浪人)들을 끌어들여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경복궁 궐내에서 불살라버린 것을 수습하여 모신 자리이며 능호(陵號)를 홍릉(洪陵)이라 하였다. 그 후 고종황제께서 1919년 1월 21일 승하하시자 천장산(天藏山, 140m) 남서쪽 자락의 ‘천하의 가장 빼어난 명당’이라던 홍릉이 갑자기 흉지(凶地)로 둔갑하여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두 분을 합장하면서 천장(遷葬)하였고, 이곳 지명은 그대로 홍릉으로 남았다.
<남양주 홍릉-네이버캡쳐>
그리고 3년 후인 1922년에 임업시험장을 설립하였고, 1945년 8월 광복과 더불어 국립임업시험장으로 재 발족되었으며, 1962년 4월 농촌진흥청 임업시험장으로 개칭되었다. 1967년 1월 산림청이 발족되면서 산림청 소속으로 편제되었고, 1988년 임업연구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1년 1월 책임운영기관이 되었으며, 2004년 1월 국립산림과학원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국립산림과학원 입구>
1960년대까지 총 면적이 98만 6815㎡에 이르렀으나 1970년대 초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등이 입주하여 현재는 43만 5600㎡만 남아 있다. 현재 북한 지역 자생 수종을 제외하고 총157과 2,035종의 국내 식물 2만여 개체를 수집·식재하여 전시하고 있으며, 석엽(腊葉) 등 각종 표본 4,245종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유야 어떻든 홍릉수목원은 도심 속의 숲이며 임업시험 연구의 최초 시험지라는 역사적·문화적·학술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국립산림과학원 지도>
입구에서 간단한 수속절차를 밟고 해설사의 안내와 해설을 들으며 왕벚나무 잎의 꿀샘, 회양목에 관한 이야기, 가시오가피의 특성, 물푸레나무의 생육조건 등 여러 초목에 대한 재미있는 설명이 있었다. 식물들도 저마다 생존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고 나름대로 생존전략이 있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그 중에서도 충북 보은의 정이품송의 혼인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왕벚나무 잎의 꿀샘>
<회양목>
<물푸레나무 표피>
충북 보은의 정이품송(正二品松)은 1464년 조선조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가지에 걸릴까 염려하여 “연(輦)걸린다”고 말하자 소나무는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 올려 어가(御駕)를 무사히 통과하게 했다고 하여 세조는 이 소나무에 정2품(지금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세월이 무수히 흘러 이 소나무가 노쇠해지자 종(種) 보존을 위해 짝을 찾아 맺어준 이야기다.
<충북 보은의 정이품송-2017년5월9일 촬영>
전국의 소나무 중 엄격한 심사를 거쳐 높이 32m, 둘레 2.1m의 삼척의 준경묘(조선 태조의 5대조인 목조의 아버지 양무장군의 묘) 입구에 있는 암소나무를 간택하여 2001년 5월 8일 보은군수(신랑 정이품송)와 삼척시장(신부 삼척소나무)이 혼주가 되고 산림청장이 주례가 되어 사상 초유의 전통 혼례식을 올렸다. 이 부부 소나무로부터 8그루의 2세 소나무가 탄생하였으며, 그 중 두 그루가 홍릉수목원에 심어져 있다. 혼인 당시 정이품송의 수령은 600년 이상이고 삼척의 암소나무는 수령 99년이었다.
<정이품송 후계목>
또한 정원 잔디밭에는 소나무의 변종으로 줄기가 지표면에서 1m정도 올라와 굵은 가지가 여러 개로 갈라져 우산 형태를 이룬 1892년생 반송(盤松)이 눈길을 끈다. 이 소나무는 상록침엽교목으로 잎은 두 개씩 모여 나며 높이는 10m 내외로 넓게 퍼져 자라고 줄기의 갈라짐을 제외하고는 외부형태가 소나무와 같다. 이 반송은 1922년 당시 30년생으로 홍파초등학교에서 이전해 온 것으로 홍릉 숲에서는 최장수나무이자 산 증인이라고 한다.
<반송>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無窮花)가 만발한 홍릉수목원은 1993년 4월 11일부터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개방되어 도시민의 자연학습 및 환경교육에 공헌하고 있다. 숲이 우거진 터널을 지나는 동안 몸도 마음도 치유되는 기분이다. 그러나 고종께서 홍릉에 오셨다가 샘물을 마신 어정(御井)과 명성황후가 묻혔던 홍릉터를 돌아볼 때 마음에 어두움이 스쳐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운신의 폭이 몹시 좁았던 국왕의 비애가 떠오른다.
<무궁화>
<어정>
<홍릉터>
특히 수목원을 나와 제기동까지 걸어 나올 때 함께 했던 정릉천도 조선 초기의 비운을 간직한 곳으로 함께 오버 랩 된다. 천의 이름이 된 정릉(貞陵)은 조선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의 정비 신덕왕후(神德王后 ?∼1396) 강씨의 능이다. 원래는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었으나, 태종의 권력에 밀려 후궁으로 강등되었고 능은 묘로 격하되었다가 1669년(현종 10)에 의해 왕비로 복위되었고, 무덤도 왕후의 능으로 복원되었다.
<정릉-네이버캡쳐>
조선 초기 왕비의 정릉은 내부 권력에 의해 유린되었으며, 조선 말기 왕비인 홍릉은 외부권력에 의해 시해되고 유린당했다는 사실이 세상을 무상케 한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며 미래이다. 따라서 역사의 현장은 무심코 지나칠 일이 결코 아니다.
<정릉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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