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육지가 된 섬-석모도 바람길

와야 정유순 2018. 3. 12. 08:10

육지가 된 섬-석모도 바람길

(2018310)

瓦也 정유순

   분명 봄은 왔는가? 강화도에 딸린 섬 석모도에 가려고 길을 나서는데 한기(寒氣)가 피부를 찌른다. 그래서 초봄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했던가?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거제도, 진도 다음으로 네 번째로 큰 섬이며 선사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우리역사의 유물이 많이 산재해 있는 노천(露天)박물관이다.

<강화도행정지도-네이버캡쳐>

   강화(江華)라는 지명은 940(고려태조 23)에 처음 등장하였다. 이전에는 해구(海口), 혈구(穴口) 등으로 불리다가 이때에 강화현으로 편제하였다. 강화는 강과 관련된 지명으로, 한강, 임진강, 예성강등의 여러 강을 끼고 있는 아랫고을이라고 하여 강하(江下)라고 부르다가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이라는 뜻으로 강화(江華)라고 고쳐 부른 듯하다.

<보문사 주차장의 수령 200년 이상된 소나무>


   강화도는 원래 김포반도의 일부였으나 오랜 침식작용으로 평탄화된 뒤 침강운동으로 육지에서 구릉성 섬으로 떨어져 나와 동쪽의 염하(鹽河)를 사이에 두고 경기도 김포시와 접해 있다. 1232(고려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왕실이 개경에서 천도한 뒤에는 강도(江都)의 소재지로 기능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래 1994년까지 경기도 강화군에 속하였다가 1995년에 강화군이 인천광역시에 속하게 된다.

<보문사 입구의 물레방아>


   새벽잠을 설쳐서 그런지 비몽사몽간에 강화대교를 건너 2017628일에 개통된 석모대교를 건넌다. 강화대교는 1969년에 처음 개통되었으나 노후다리를 재시공하여 1997년에 완공되었다. 석모대교는 석모도와 강화군 내가면 황창리를 연결하는 길이 1,410의 교량이며 삼산연륙교로도 불린다. 석모도는 강화나들길 제11코스 석모도 바람길이 있어서 먼저 보문사를 둘러보고 석포리선착장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택한다.

<석모대교-다음 캡쳐>


   석모도(席毛島)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에 딸린 섬으로 강화도 서쪽에 있다. 석모도는 돌 모퉁이라는 뜻이 석모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돌투성인 산자락 모퉁이로 물이 돌아 흐른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 숙종 때 북쪽의 송가도(松家島), 남쪽의 매음도(煤音島)와 어유정도(魚遊井島)가 간척사업으로 합쳐졌다고 한다. 주민들은 토양이 좋아서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일부 주민들만 새우 방어 꽃게 등 근해 어업을 한다.

<강화나들길 11코스(석모도 바람길) 지도>


   석모도 보문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둘러본 곳은 낙가산보문사(洛迦山普門寺)이다. ‘낙가산이라는 지명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머문 인도 남쪽의 보타낙가산(普陀洛迦山)’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보문사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 경남 남해의 금산 보리암, 전남 여수 향일암과 함께 우리나라 해수관음 성지로 알려져 있다. 관음성지는 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하는 곳으로 이곳에 와서 기도발원을 하면 뜻이 잘 이루어져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낙가산보문사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 가파르게 올라가면 먼저 초입 좌측에 오백나한을 모신 천인대가 나온다. 천인대(千人臺)는 길이 40, 5의 큰 바위로 법회 때 설법장소로 사용되었는데, 그 크기가 넓어서 천명이 앉을 수 있다하여 천인대라는 이름이 붙어졌다. 오백나한은 2009년도에 천인대에 조성되었으며 진신사리가 봉안된 3층 관음보살탑을 중앙에 두고 오백나한이 감싸고 있는 형상으로 모습과 표정이 모두 달라 개성적이고 자유분방한 모습을 나타낸다.

<3층 관음보살탑>

<오백나한상>


   오백나한 뒤로 계단 위 측면에는 와불전(臥佛殿) 서있다. 와불전의 와불(臥佛)은 열반하는 부처의 누워 있는 모습으로 1980년에 조성을 시작하여 20093월에 완성하였으며 너비 13.5, 높이 2이다. 전각의 내부는 부처의 뒤로 공간이 확보되어 있어 주위를 돌면서 참배할 수 있다. 부처의 누워 있는 모습과 손의 모양, 불의(佛衣)의 주름 등이 사실대로 표현되었고 운양(雲樣)이 새겨진 열반대는 구름모양이 수려하고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보문사 와불전>

<보문사 와불>


   와불전 정면 계단으로 내려오면 좌측으로 보문사 석실(石室)이 나온다. 이 석실은 635(신라 선덕여왕4)에 회정(懷正)대사가 처음 창건하고 1812(조선 순조12)에 다시 고쳐 지은 석굴사원이다. 천연동굴을 이용하여 입구에 3개의 홍예문(虹霓門)을 만들고, 동굴 안에 불상들을 모셔 놓은 감실(龕室)을 설치하여 석가모니를 비롯한 미륵보살과 나한상을 모셨다. 이들 석불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어부의 그물에 걸린 돌덩어리를 꿈에서 본대로 모셨더니 부처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보문사 석실>


   보문사 석실 앞에는 향나무가 있다. 큰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는 향나무의 생김새가 마치 용트림을 하고 있는 듯 기이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1.7높이에서 원 줄기는 동서 양쪽으로 갈라졌는데 동쪽 것은 둘레가 1.3, 서쪽 둘레가 1.5이다. 한국전쟁 중에 나무가 죽은 것 같이 보이다가 3년 후에 다시 소생하였다고 한다.

<보문사 향나무>


   향나무 앞에는 대형 맷돌이 제단처럼 놓여 있다. 보문사는 창건 당시부터 나한상을 모신 보문동천으로 유명하다. 한때는 보문사 승려와 수도사들이 300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 때 사용했던 맷돌이라고 한다. 맷돌의 크기는 지름 69, 두께 20로 일반용 맷돌보다 두 배정도 큰 화강암 맷돌이다.

<보문사 맷돌-네이버캡쳐>


   보문사의 중심에는 극락보전(極樂寶殿)이 우뚝하다. 정면 5, 측면 3칸에 60평 규모로 1972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법당 내부 상단에는 극락정토를 주관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고, 중단에는 지장보살을 비롯한 여러 보살과 신중탱화(神衆幀畵), 하단에는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영가단(靈駕壇)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를 석실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대웅전 대신 극락보전이 있는 것 같다.

<보문사 극락보전>


   극락보전 우측으로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낙가산 중턱에 높다랗게 자리 잡고 있는 눈썹바위와 이 바위를 처마로 삼고 바위벽에 새겨진 10높이의 마애불(磨崖佛)은 특유의 미소를 머금고 삼라만상을 굽어본다. 이 마애불은 송자관음(送子觀音)이라고도 불리며 1928년 당시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주지 이화응(李華應)과 보문사 주지 배선주(裴善周)가 조각하였다고 한다. 보문사 석실과 이곳을 찾아와 소원을 빌면 다 이루어진다는 믿음에 참배객들이 줄을 잇는다.

<낙가산 눈썹바위>

<보문사 마애불>


   서쪽 바다에 둥실 떠 있는 섬들을 바라보며 계단을 내려올 때는 시간 맞춰 오면 석양의 낙조가 그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내려온 극락보전 마당 가장자리에는 글을 모르는 불자(佛者)나 바빠서 불경(佛經)을 읽을 겨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윤장대(輪藏臺)가 있다. 윤장대는 안에 경전 등을 넣고 손잡이를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인데, 이를 한 바퀴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는 것과 같다는 의미다.

<보문사 윤장대>


   윤장대 옆의 범종각에 걸려 있는 범종(梵鐘)1975년에 주조(鑄造)되었는데,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 신종(일명 에밀레종)과 국보 제36호인 오대산 상원사 동종을 조화시켜 도안한 것으로 화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높이 2.15, 지름 1.5, 무게 5톤의 동종(銅鐘)이다. 종의 둥근 벽면에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 박정희와 부인 육영수를 비롯한 수많은 권력추종자들의 이름들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보문사 동종>


   바람에 스치듯 보문사를 둘러보고 아래로 내려와 석모도 바람길로 접어든다. 바닷가로 길게 쌓아 놓은 제방에 올라서면 물 빠진 갯벌들이 넓게 펼쳐진다. 썰물 때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넓고 평평한 땅이 드러나는데, 이렇게 육지와 바다 사이에서 하루에 두 번씩 모습을 드러내는 바닷가의 땅을 갯벌이라고 부른다. 주로 해안의 경사가 완만하고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큰 해안에 오랫동안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다.

<석모도 갯벌>

<석모도 갯벌과 제방>


   강화도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서해와 남해는 갯벌이 만들어질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평균 수심이 55m 정도로 얕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3m9m 정도로 크며, 여러 강의 하구가 있어 계속해서 흙과 모래가 흘러든다. 또 구불구불한 리아스식 해안이 파도의 힘을 분산시키기 때문에 퇴적 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나, 넓고 완만한 갯벌이 형성된다.

<제방 안쪽의 수초>


   갯벌은 생물의 보고로 동·식물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물새 중 47%가 주요서식지로 이용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생태계의 다양성 때문에 우리나라의 갯벌은 미국 동부의 조지아 연안, 캐나다 동부 연안, 아마존 유역 연안, 북해 연안과 더불어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러나 강화도 갯벌은 197122일 이란의 람사르에서 채택된 세계 람사르협약에 가입이 되지 않았다.

<석모도 갯벌>

<석모도 갯벌>


   제방 바다 쪽으로는 갯벌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안쪽으로는 갈대를 포함한 수생식물들이 숲을 이룬다. 봄기운이 돌기는 하지만 아직 수초들은 푸른색을 띠지 않고 봄 맞을 준비만 하고 있는 것 같다. 땅이 평평한 곳은 농사를 짓는 논이 제법 많이 있다. 숲이 우거지고 지대가 높은 곳은 석모대교가 개통된 후 교통이 좋아져서 그런지 곳곳에 땅을 밀어 택지를 조성하는 곳과 새로 들어선 집들이 자주 눈에 띈다.

<석모도의 택지개발>

<석모도의 신주택단지>


   제방을 쭉 걷다가 구릉(丘陵)을 몇 번 넘으면 석모도에서 유일한 민머루해수욕장이 나온다. 50로 약1펼쳐진 백사장은 낮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주변의 송림과 어울려 바닷바람도 순해질 것 같다. 그리고 민머루해수욕장은 해수욕보다는 황홀한 일몰을 감상하기 좋은 곳으로 더 많이 알려져 해질 무렵이면 찾아오는 연인들이 많다고 한다.

<석모도 민머루해수욕장>


   바다 건너 마니산(摩利山, 469)을 길잡이 삼아 한참을 걸어가면 삼양염전 터가 나온다. 삼양염전은 1957년 윤철상이라는 사람이 매음리 연안일대를 매립하여 얻은 땅 240ha를 염전과 농장을 개척한 후 아주 질 좋은 천일염을 공급해 왔으며, 넓은 염전이 석모도의 명소로 꼽혔다고 한다. 그러나 인건비 상승 등 경제성이 맞지 않아 2006년부터 생산을 중단하고 터만 남았다.

<석모도 삼양염전 터>


   거의 제방으로 이어지는 석모도 바람길은 지루할 것 같으면서도 지루하지 않는 참으로 묘한 길이다. 아마 옷 속으로 파고들어와 속살에 간지럼을 피우는 봄바람의 유혹에 빠져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가끔은 하늘로 나르며 군무를 펼치는 오리 떼들의 재롱 때문이었을까? 아무래도 남쪽 고향에서 올라오는 춘정(春情) 때문인 것 같다.

<오리 군무>

<담수의 갈매기들>


   바다건너에는 동쪽으로 강화도의 외포리가 보인다. 석모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외포리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와 석포리선착장에서 내려야 했다. 그 석포리선착장이 석모도 바람길의 시작점인 동시에 끝나는 점이다. 그 옛날 외포리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던져주는 과자를 받아먹으려고 희롱했던 갈매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바다건너 외포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