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 길은 해피한 길(열한 번째-2, 完)
<양양설악해변→통일전망대, 2017.12.16∼17>
瓦也 정유순
바쁜 발걸음은 새벽잠을 앗아간다. 고성에 왔으면 꼭 들려야 하는 금강산 건봉사를 이른 조반을 마치고 찾아간다. 건봉사는 금강산을 주산으로 하여 ‘금강산건봉사(金剛山乾鳳寺)’라고 하는데, 금강산 자락은 미시령 북쪽에 있는 신선봉이 남단자락으로 감로봉과 향로봉을 이어 단발령까지가 휴전선 이남에 위치하고 있는데 건봉사는 감로봉 아래에 있다.
<건봉사 전경>
그리고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520년)에 아도(阿道)가 창건할 때는 원각사(圓覺寺)였는데, 758년(경덕왕17)에 발징(發徵)이 중건하여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우리나라 최초로 열었다고 한다. 그리고 도선이 중수하여 서봉사(西鳳寺), 나옹이 재중수하여 지금의 건봉사가 되었다.
<건봉사 대웅전>
절 입구에 있는 만해의 시비 “사랑하는 까닭”을 읊어보고 6∙25 한국전쟁 때에도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은 불이문(不二門)을 지나 범종각을 둘러보고 옛날 642칸의 위용을 자랑하던 절터를 발걸음으로 세어가며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간다. 임진왜란 때 당시 통도사에 있던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왜병(倭兵)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의승병(義僧兵)을 일으킨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일본에서 찾아와 봉안한 곳이 건봉사적멸보궁이다.
<만해 한용운의 시비-사랑하는 까닭은>
<불이문>
<1920년대 건봉사 전경>
적멸보궁은 “번뇌의 불꽃이 꺼져 아주 고요한 상태<寂滅>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곳<寶宮>”으로 해석되며, 이것은 ‘육신은 부단히 움직여 게으름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생각도 많이 하여 머무르지 않게 하는 것’이 적멸이 아닌 가 나 스스로 생각해 보며 아래로 내려와 능파교를 건너 대웅전으로 간다.
<적멸보궁>
<진신사리 부도>
건봉사 능파교는 1708년(숙종34년)에 건립되어 1749년(영조25년)과 1880년(고종17년)에 중수(重修)된 것으로 대웅전지역과 극락전지역을 연결하는 홍교(虹橋, 무지개다리)로 비교적 규모도 크고 보존이 잘된 상태이다. 대웅전은 여느 사찰과 비슷하고 대웅전 밑 측면에 있는 만일염불원(萬日念佛院)에 마련된 ‘석가세존 진신치아사리 친견장’은 아침이라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능파교와 건봉사>
<만일염불원>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가 처음 시작한 건봉사에는 ‘등공대(騰空臺)’란 곳이 있다. 민통선 철조망 안에 있어서 자유로이 가 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안내자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다. 민통선 철조망의 자물쇠를 열고 한 오리쯤 소나무가 우거진 오르막길을 걸어가면 부도탑 비슷한 원통형의 돌탑이 나온다. 측면에 “三十一人謄高 遺蹟紀念之塔(삼십일인등고 유적기념지탑)”이라고 음각된 탑이 서있는 곳이 등고대다.
<등고대 가는 철책>
등고대는 747년에 발징화상께서 정신 양순 등 수행승 31인과 신도 1,820명의 참여로 아미타만일염불회를 결성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염송(念誦)하며 만일동안 신행을 닦았는데, 29년이 지난 776념(병진년) 7월 17일 아미타불께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과 함께 나타나서 수행승 31인을 극락세계로 이끌었던 자리에 건립되었다. <이상 ‘정유순의 세상걷기’ 264쪽∼266쪽 발췌, 도서출판 박물관, 2017.3.10.>
<건봉사 등고대>
<탑에 새겨진 글씨-三十一人謄高 遺蹟紀念之塔>
건봉사에서 거진항 북쪽 응봉(鷹峰, 122m) 너머에 있는 화진포호로 이동한다. 화진포호는 동해안에 잘 발달된 대표적인 석호(潟湖)이다. 수면은 꽁꽁 얼어 몇 사람이 얼음 위로 걸어도 끔쩍하지 않는다. 화진포호는 프랑크톤 등 조류(藻類)가 풍부하고, 봄이면 숭어 등 바다어류들이 산란(産卵)을 위해 모여든다. 경포호, 송지호, 영랑호, 청초호 등 18개의 석호가 있으나, 화진포호만 원형에 가깝게 유지하고 있다.
<화진포호 전경>
<꽁꽁얼은 화진포호>
화진포 주변은 호수와 바다와 노송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어 일제강점기 때는 원산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이 이곳에 별장촌을 만들어 휴양하던 곳이었으나, 화진포성 끝자락에는 한국전쟁을 일으켜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온 북한의 김일성별장이 있으며, 화진포호 중앙의 섬에는 한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한국전쟁 때 야반도주한 이승만별장이 있고, 김일성별장 아래 가까운 곳에는 이승만정권 때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1960년 3∙15부정선거를 자행하여 4∙19민주혁명을 유발시켰던 부통령 이기붕이 사용한 별장이 있다.
<화진포성 숲속의 김일성별장>
그리고 화진포 앞 바다의 거북이 형상의 무인도인 ‘금구도(金龜島)’가 있다. 섬에는 화강암으로 축조된 2중 구조의 성벽과 보호벽·방파성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구려 연대기에 의하면 394년(광개토대왕 3)에 화진포의 거북섬에 광개토대왕의 왕릉 축조를 시작하였으며 414년(장수왕 2) 거북섬에 광개토대왕의 시신을 안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광개토대왕릉이 금구도에 있다는 설이 제기되어 고증이 확인되는 대로 원형복원 할 계획이다.
<금거북모형안의 금구도>
<금구도>
화진포해변에는 파도가 길게 일렁이고, 화진포호 입구인 금구교 너머로는 남쪽의 향로봉에서 북쪽의 금강산으로 곧게 뻗은 능선이 북녘을 향해 지기(地氣)를 소통한다. 해안 북단에 숨어 있는 초도항과 초도해변을 지나 대진항에 당도하여 도루목 매운탕에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매섭게 몰아치는 한기를 달래본다.
<화진포해변>
<화진포호 입구와 금구교>
대진항은 해파랑길 최북단에 있는 1920년에 개항한 국가어항이다. 조용한 항구의 모습과 깨끗한 백사장은 휴전선이 가로막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에 더 애처롭고 아름답게 보인다. 한 때는 명태의 주산지로 아름을 날렸으나, 지금은 문어와 대게, 도루묵이 대세라고 한다. 대진항 해상공원에서는 낚시와 통발로 도루묵 잡기에 여념이 없다.
<대진항>
<대진항 해상공원>
대진해변과 마차진해변을 지나면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가 나온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도로를 따라 걸어 들어간다. 전에는 교부하는 출입증을 부착한 후 차량으로만 출입이 가능했는데 2016년부터 도보로도 가능해졌다고 한다. 약30분여를 걸어 들어갔더니 고성 배봉리(培峰里) 봉화마을 입구가 나온다. 봉화를 올리던 봉화봉 아래에 위치한 배봉리는 밭농사 위주의 민통선 북방 출입영농을 하는 마을이라고 한다.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
<배봉리 봉화마을 입구>
조금 더 들어가면 남한의 최북단 명파리 마을이 나온다. 명파리에는 500m의 고운 백사장이 펼쳐지지만 한시적으로 군부대와 협조 아래 개장한다고 한다. 규모가 작고 아담하지만 한적하고 인적이 드물어, 명파리라는 이름 그대로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소박함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은어와 연어의 산란지로 해마다 10월이면 은어 잡이 낚시꾼이 많이 찾아온다. 통일전망대를 가지 않고 바로 명파리로 향한다면 신고소에서 안보 교육을 받지 않아도 된다.
<명파리 마을>
또한 명파리에는 최북단 명파초등학교가 있다.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에 있는 명파초등학교는 1959년 4월에 대진초등학교 명파분교장으로 개교하였다. 학생 수가 적어 2, 4, 6학년으로 각 1학급씩 편성하여 운영하며, 교훈은 ‘바르고 슬기롭고 튼튼한 어린이’라고 한다.
<최북단 명파초등학교>
도로 요소요소에 탱크 저지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전방의 접경지역에 들어섰음을 실감한다. 해파랑길 50구간이 2016년에 개통되면서 통일전망대까지 걸어서 갈 수 있었는데, 신고하는데 절차상 문제가 있었는지 재진검문소에서 되돌아 나온다. 어차피 점심시간도 되어서 뒤로 물러나 오전을 마무리 한다.
<탱크저지시설>
<민통선 재진검문소>
오후에는 버스를 이용하여 새로 확장 개통된 7호선 국도를 이용하여 통일전망대까지 단숨에 간다. 고성군 현내면 명호리에 소재한 통일전망대는 DMZ와 남방한계선이 만나는 해발 70m의 높이에 위치하여 금강산의 구산봉과 해금강이 지척에 보인다.
<통일전망대>
전망대에 올라 전방 10시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신선대, 옥녀봉, 채하봉, 일출봉, 집선봉 등 천하절경 금강산이 지척에 있는 것처럼 잘 보인다. 오늘은 날씨가 매우 추운 대신 하늘은 맑고 투명한 쪽빛이다. 전망대에 비치된 모형과 대조해 보면서 금강산, 해금강, 낙타바위, GP, 남방한계선, 북방한계선 등을 눈으로 헤아려 보며 갈 수 없는 우리 땅이 여기에 있음을 실감한다. 내려오는 계단 옆에 서 있는 부처님 상과 성모마리아 상이 북쪽을 바라보며 우리의 통일을 염원하는 것 같다.
<금강산 원경>
<부처님 상>
<성모마리아 상>
우리는 왜 여기에 오면 마음이 개운치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손만 뻗으면 금방 잡힐 것 같은 우리 땅을 마음대로 가지 못하고, 설령 가더라도 제3국을 통해 가야만 한다. 그리고 실수로 북녘을 향해 윙크만 해도 ‘종북’으로 몰리는 이상한 나라임에 분명하다. 그저 북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나 철새들이 전해주는 안부나 주고받는 처량한 신세가 우리들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상 ‘정유순의 세상걷기’ 269쪽에서 발췌, 도서출판 박물관, 2017.3.10.>
<북으로 연결된 철도와 도로 그리고 해금강>
통일전망대 인근에 DMZ박물관이 있으나 가지 못했다. 2017년 2월부터 부산 오륙도 달맞이공원을 출발한 해파랑 길 770㎞를 더듬어 본다. 때로는 공장이 밀집되어 있어서 건너뛰고, 때로는 볼 만한 게 별로 없어서 건너뛰고, 때로는 길이 마음에 안 들어서 생략하고, 때로는 가까운 직선거리를 택한다고 더 더디게 고생하며 걸어야 했고, 때로는 금년 안에 어떻게 하든 종주를 마무리 해야겠다는 욕심이 선한 눈과 마음을 아리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절반의 성공뿐이지만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마무리 하게 되어 기쁘다.
<해금강을 배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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