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 길은 해피한 길(열한 번째-1)
<양양설악해변→통일전망대, 2017.12.16∼17>
瓦也 정유순
어둠이 극으로 달리는 이른 새벽에 조반을 마치고 양양설악해변으로 나간다. 음력 스무 아래 거꾸로 된 눈썹달은 낙산사 해수관음보살 머리 위로 여명을 부른다. 지난 번 길이 아닌 길을 물어가며 미끄럼 타듯 내려왔던 낙산사 뒷산은 어둠을 삼키는 거대한 성채(城砦) 같다. 수심이 얕고 조용하여 가족동반 최적지로 꼽히는 설악해변은 여명에 갑자기 찾아온 나그네의 발소리에 놀랐는지 파도도 갑자기 목청을 돋운다.
<설악해변의 여명-낙산사 쪽으로>
<설악해변의 여명>
설악해변 북단에 있는 후진항 불빛도 눈을 부비며 기지개를 편다. 어민정주항인 후진항을 지나 몽돌해변으로 더 알려진 정암해변을 어둠과 바람에 등 떠밀려 물치천에 다다른다. 물치천(沕淄川)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들어오는 하천이다. 물치(沕淄)는 ‘물에 잠기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이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이 물에 잠긴 것을 보고 ‘물치’라고 한 것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암해변>
<물치항 원경>
<물치항 표지>
물치천 하구 북단에는 생선회로 유명한 물치항을 지나 쌍천(雙川)을 건너가는데 아침 해가 솟아오르는 밝은 태양의 안내를 받으며 속초시(束草市) 대포항에 당도한다. 대포항(大浦港)은 속초시 대포동에 있는 어항이지만 속초보다 먼저 있었던 어항이다. 그러나 청초호 입구에 속초항이 생기면서 위축되어 오다가 설악산이 유명관광지로 되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아 동해안 북부의 활어 관광어항으로 발전한 곳이다.
<물치천과 설악산>
<동해일출>
<대포항의 새벽>
속초(束草)라는 지명의 유래는 상록 양치식물인 속새(높이 30∼60㎝)가 많아 한자로 표기하여 속초(束草)가 되었다는 설, 속초 동명항 인근에 있다는 영금정 옆의 솔산(소나무산)이 소나무와 풀을 묶어서 세워 놓은 형태라 붙여졌다는 설, 지형의 형태가 소가 누워 있는 와우형(臥牛形)이라 소가 누워서도 편안하게 꼴을 먹을 수 있게 풀을 묶어 놓은 형상이라 ‘묶을 속(束)’자와 ‘풀 초(草)’를 썼다는 설이 있다.
<속초해변>
그러나 조물주가 금강산을 만들 때 울산의 바위를 옮기다가 설악산에 떨어뜨려 지금의 울산바위가 되었는데, 설악산에 구경 왔던 울산의 원님이 “울산바위는 울산 것이기 때문에 세금을 내라”고 하자, 신흥사의 동자승이 “세금을 낼 수 없으니 도로 울산으로 가져가라”고 대꾸했다. 이에 울산 원님이 “이 바위를 불에 타고 남은 재[회(灰)]로 꼰 새끼로 묶어 놓으면 가져가겠다.”고 하자, 동자승이 풀을 새끼로 꼬아 울산바위를 동여 맨 후 불로 태워 재로 꼰 새끼처럼 만들어서 속초가 되었다는 설이 재미있게 전해온다.
<속초 청초호와 울산바위>
대포항에서 외옹치해변과 속초해수욕장을 지나면 아바이마을이 나온다. 아바이마을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듬해 1951년 1∙4후퇴 때 국군이 남하하면서 함경도 피난민들이 1953년 7월 23일 휴전협정으로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지금의 속초시 청호동에 집단촌을 만들었고, 함경도 사투리로 ‘아저씨’를 가리키는 ‘아바이’를 붙여 ‘아바이마을’이 되었다. 초기의 실향민 1세대는 대부분 사망하고 2세대들이 주를 이루며 냉면과 순대 등 북한요리 전문점이 많고, 결집력과 단결력이 강하며 향수가 짙게 배어있는 곳이다.
<아바이마을>
<청초호>
아바이마을에서 갯배를 타고 청초호 포구를 건너 뭍으로 건너온다. 아바이마을은 지형이 섬과 비슷한 곶의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어 갯배를 이용하여야 한다. 갯배는 뗏목 수준의 바지선으로 50m 정도 되는 청초호 포구를 사람이 직접 밧줄을 끌어당겨서 움직이는 일종의 줄배이다. 청초호(靑草湖)는 좁고 긴 사주(砂洲)에 의해 바다와 격리된 석호(潟湖)이다. 이 호수는 선박들이 외해(外海)의 풍랑을 피할 수 있는 천연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을 두고 병선(兵船)을 정박시킨 일도 있다고 한다.
<갯배>
도로를 따라 속초시청 앞으로 하여 동명동사거리를 지나 영랑호에 당도한다. 영랑호도 청초호와 마찬가지로 석호이다. 영랑호(永郞湖)는 옛날 화랑이었던 영랑(永郞)이 술랑(述郞) 안상(安詳) 남랑(南郞) 등 다른 동료들과 금강산에서 수련을 마치고 명승지 삼일포에서 헤어져 동해안을 따라 서라벌로 돌아가는 길에 이 호수를 발견하게 되는데, 명경과 같이 맑고 잔잔한 호수에 반했다는데서 유래하였으며, 그때부터 영랑호는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속초시청>
<영랑호>
영랑호를 지나 ‘해마다 7월 말부터 8월 초에 오징어 맨손잡기 축제’가 열리는 장사항(章沙港)을 지나면 강원도 고성군에 접어든다. 한반도 지도를 놓고 휴전선을 따라가다 보면 서쪽은 38°선 보다 남으로 쳐져 있지만 동으로는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며 강원도 인제군을 지나 고성군 경계에 이르면 가파르게 올라간다. 한국전쟁 휴전 직전 향로봉과 351고지 등에서 한 뼘의 땅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치열했던 전투의 결과다. 지금도 고성군은 남·북으로 분단된 군(郡)으로 군사통제가 많아 분단현실을 체험하는 곳이다.
<속초 장사항>
<속초와 고성 경계선>
<고성군 지도>
고성군의 남단에 위치한 용촌천(龍村川)을 지나면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에 밀려 자연산 횟감을 즉석에서 맛볼 수 있는 봉포항을 스치며 천진천(天津川)을 건너면 관동팔경의 하나인 청간정이 나온다. 청간정(淸澗亭)은 설악산 신선봉에서 발원하는 청진천과 바다가 만나는 포구 작은 바위언덕에 세워져 있어 동해와 어우러지는 아침 일출이 일품인지라 예로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았다고 한다.
<봉포항 죽도>
<봉포항 활어회 센터>
<청간정 원경>
정자의 건립연대는 알 수가 없으며 갑신정변 때 화재로 없어진 것을 지역주민들이 1930년대 재건하였고, 1955년 대통령 이승만의 지시로 보수하였고, 1981년 대통령 최규하의 지시로 해체 복원하였다고 한다. 두 전직 대통령이 쓴 현판이 정자 안과 밖에 지금도 걸려있다.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1971년 12월 16일) 되었다.
<청간정-최규하 전대통령의 청간정>
<이승만 전대통령의 청간정>
오후에는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 있는 진전사로 간다. 진전사는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효시가 되었던 도의국사가 세운 사찰이다. 설악저수지 옆으로 올라가는데 강한 바람이 길을 막아 뒤뚱거린다. 진전사(陳田寺)는 신라 헌덕왕(821년) 때 신라선종의 종조인 도의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신라 말 고려 초에 선종의 종찰이며 당대의 선승인 염거화상, 보조국사 등이 득도한 곳이며, 삼국유사의 일연선사가 체발득도(剃髮得道)한 곳이다. 폐사지로 내려오다가 2005년 6월 복원불사를 하여 진전사로 거듭났다.
<진전사 전경>
진전사지 부도(보물 제 139호)는 기단부가 석탑에서와 마찬가지로 방형(方形) 이중기단(二重基壇)과 8각형의 탑신부로 구성되어 있는 9세기 중엽의 신라 선종(禪宗)의 종조(宗祖)인 도의선사(道義禪師)의 부도로 여겨진다. 부도(浮屠)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일종의 납골당이라고 할 수 있고 구조상으로 볼 때 탑과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도의선사 부도>
도의선사는 당나라에서 선법을 배워 가지고 와서 교종만을 숭상하던 신라 사람들에게 설파하려 하였으나 먹히지 아니하여 이곳에 들어와서 40년간 수도하다 제자 염거(廉居)선사에게 남종선법을 전수하고 입적 하였다. 즉 교종은 신라 왕실 강화를 위한 불교로 일반 백성들이 접근이 어려웠고, 선종은 누구든 스스로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스님은 기존의 교종불교가 의례화 되고 형식화되는 가운데 중국의 선불교가 수용되는 전환기에 사상적 선구자로서 인고의 세월을 살다가 가신 것 같다.
<진전사지 3층 석탑>
지전사에서 아래로 한참 내려오면 진전사지 삼층석탑이 나온다. 이 탑은 높은 지대석 위에 이중기단을 설치하고 3층 탑신을 조성한 신라 8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석탑의 하나이다. 밑 기단에는 연화좌 위에 광배를 갖춘 비천상이 각 면에 2구씩 조각되어 있고, 윗 기단에는 팔부중상이 각 면에 2구씩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1층 탑신에는 여래좌상이 1구씩 조각되었다. 그러나 누구의 소행인지 신심으로 아름답게 조각된 얼굴들이 훼손되어 있어 안타깝다.
<진전사지 3층 석탑-옆면 조각이 훼손>
진전사에서 다시 고성군 토성면 교암리에 있는 천학정(天鶴亭)으로 이동한다. 마을 고샅길 같은 길을 따라 좀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바위와 소나무가 우거진 곳이 나오고 다시 계단을 통해 바다에 접한 바위 끝에 천학정이 나온다.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동해바다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는 모든 근심걱정을 사라지게 한다. 남쪽으로 3㎞ 떨어진 청간정 못지않은 자연과의 조화를 뽐낸다.
<천학정>
교암항으로 내려오는 길 바다에 펼쳐진 교암해변의 모래사장은 동해의 숨은 해수욕장 같고, 바다에 떠 있는 백도(白島?)는 쪽빛 바다를 항해하는 배 같다. 문암항 뒤편의 능파대(凌波臺)는 어떤 파도도 능히 맞설 수 있는 기세이다. 선사유적지가 있다는 죽왕면 문암리의 문암대교를 건너 백도해변을 지나 얼음으로 꽁꽁 얼은 송지호에 들른다.
<교암해변>
<백도?>
<능파대>
죽왕면에 있는 송지호(松池湖)는 둘레 6.5 km로 오호리(五湖里) ·오봉리(五峰里) ·인정리(仁亭里)에 걸쳐 있는 석호(潟湖)로,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약 1,500년 전에는 이 호수가 정거재(鄭巨載)라는 구두쇠 영감의 문전옥답(門前沃畓)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노승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매 이를 거절하자, 쇠절구[철구(鐵臼)]를 논 한가운데에 던지고 사라졌다. 그 뒤로 쇠절구에서 물이 계속 솟아나와 송지호가 되었다고 한다.
<꽁꽁 얼은 송지호>
바다와 연이어 있어 도미·전어 등의 바닷물고기와 잉어 등의 민물고기가 함께 서식하여 낚시꾼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맑은 호수와 송림이 울창하여 백조라고도 불리는 고니(천연기념물 201)의 도래지이기도 하다. 고니는 길조로 알려져 있어 고니가 많이 오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한다. 한국전쟁 중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1971년 11월 하순부터 무리를 지어 찾아 왔다가 최근에는 개체수가 줄어들어 기다리는 사람들을 애타게 한다고 한다.
<고니모형과 송지호>
거센 찬바람은 한 곳에 오래 머물게 하지 않는다. 서둘러 거진항으로 이동한다. 거진항은 한 오백여년 전에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선비가 이곳의 산세를 둘러보더니 지형이 ‘클 거(巨)자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큰 나루[거진(巨津)]로 불렀다는 전설이 뒷받침하듯 백두대간의 정기가 에워싸고 있는 천혜의 어항으로 발전한 곳이다. 한때는 명태의 집산지로 파시(波市)를 이루었고, 한 때는 오징어가 주를 이루었는데 지금은 제 철이 아니어서 그런지 오징어는 잘 보이지 않는다.
<거진항>
<거진항 어시장의 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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