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남한산성을 거닐며

와야 세상걷기 2017. 12. 3. 00:40

 

남한산성을 거닐며

(2017. 11. 30)

瓦也 정유순

   남한산성을 가기 위해 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서 버스를 타고 남한산성 종점 까지 깊숙이 들어간다.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어 경기도에서 도립공원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201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등재번호:1439)된 후 유물발굴과 사료발굴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이 많이 되었고 지금도 계속하여 발굴과 보수가 계속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남한산성 고지도-네이버캡쳐>

 

   청량산(淸凉山, 497m)을 서쪽 끝으로 하고, 벌봉(514m)을 동쪽 끝으로 하는 긴 장방형의 돌로 쌓았다. 서쪽은 경사가 가파르고 높아서 험난하며, 다른 쪽은 능선이 긴 반면, 성안은 낮고 평평한 분지를 이루고 있다.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을 지키는 2대 산성이었다.

 

<남한산성 안>

 

   남한산성은 천혜(天惠)의 요새지로 백제 온조왕 13년에 산성을 쌓고 남한산성이라 부른 것이 처음이라고 고려사와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으나, 672(신라 문무왕 12)에 당나라 군사를 방어하기 위해 지금의 남한산 주위에 성을 구축하였고 주장성이라고 불렀다. 그 후 조선 선조 때, 광해군 때 등 여러 차례 개축하였으며, 청나라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치르고 난 뒤 대대적으로 개수한 것이 오늘날의 남한산성이다.

 

<남한산성 안내도>

 

   그러나 유서 깊은 남한산성이 일제강점기 때에는 광주유수부가 폐지되고, 조선군대 해체로 군사중심기능을 잃어버렸으며, 항일운동의 거점도시가 되자 1917년에는 성안에 있던 광주군청을 경안동으로 이전한 후 등산이나 데이트장소로 바꿔 버렸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서울근교의 유원지로 아예 개발하였다. 그러다가 19713월 남한산성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문화와 자연이 어우러지는 역사현장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남한산성 수난시대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산성로타리에서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지화문(남문) 쪽으로 올라간다. 올라가는 언덕 아래에는 남한산성비석군(南漢山城碑石群)이 있다. 1820세기 무렵에 설치된 광주유수(廣州留守) 및 수어사(守禦使), 부윤(府尹), 군수(郡守) 등의 39여기의 비석 중 남한산성 행궁 복원사업에 따라 이전된 11기와 현 위치에 보존되어 왔던 19기를 포함하여 30기를 한 곳에 모아 옛 선현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게 정비해 놓았다.

 

<남한산성 비석군>

 

   남한산성에는 동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으로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가 이 문을 통해 들어왔다.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있는 남문은 1779(정조3)에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 1976년 문루를 복원하였고 2009년 정조의 글씨를 집자하여 전면에 현판을 설치하였으며, 현재에도 사람들의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남한산성 지화문(남문)>

 

   지화문(남문)에서 수어장대(守禦將臺) 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가파르다. 차가운 초겨울의 날씨이지만 몇 발자국 내디디자 몸에 땀이 베어온다. 시야를 흐리게 하던 미세먼지도 추위에 움츠렸는지 관악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이고 서울남산도 선명하다. 중간지점에는 팔각정이 있으나 이름이 없고 조금 지나면 제6암문(서암문)이 나온다.

 

<남문에서 수어장대로 가는 길>

 

<관악산과 청계산 등-남한산성>

 

<서울남산과 한강-남한산성>

 

   서암문(西巖門)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다. 암문은 성벽의 흐름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으로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으며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부분의 암문 외측 개구부(開口部)는 홍예식(虹霓式)이지만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平据式)이다.

 

<남한산성 서암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인 수어장대(守禦將臺)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세워져 있으며 지휘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세워진 누각으로 다섯 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로 서쪽에 있다하여 서장대(西將臺)라고도 한다. 맑은 날에 수어장대에서 경치를 보면 서울 시내가 거의 다 보인다. 수어장대 서쪽 단 아래에는 청량당이란 당호가 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청량당(淸凉堂)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청량산에 세워진 건물이다. 산성을 쌓을 당시 동남쪽 책임을 맡았던 이회(李晦)가 모함에 의해 억울하게 처형을 당하자 그의 처첩들도 한강물에 투신자살하였는데, 그 후 무고함이 밝혀져 혼백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이회 장군의 영정뿐만 아니라 서북쪽 책임자인 벽암각성대사와 이회장군 부인의 영정도 함께 모셔져 있다.

 

<청량당-네이버캡쳐>

 

  청량당에서 거행하는 도당굿은 그들의 넋을 달래고자 하는 굿으로 남한산성의 축성에 관한 역사와 무교를 바탕으로 한 민중들의 염원 등의 성격을 아우르고 있다. 이회 장군, 벽암대사, 이회장군 부인의 초상화는 한국전쟁 때 없어진 것을 다시 봉안한 것이며, 당호는 청량산(482.6m) 정상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청량당매바위 앞 소나무>

 

   서문은 우익문(右翼門)이라고 부른다. 경사가 급하여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려웠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인조15(1637) 123일 한밤중에 침입해 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지만, 그리고 인조가 소현세자와 함께 서문을 통해 청나라 진영으로 가서 화의를 맺고 항복을 하기도 했다. 163612월에 남문을 통해 들어와서 47일 간 항쟁하다가 1637130일 서문을 통해 삼전도로 가는 통곡의 문이 되었다.

 

<남한산성 우익문(서문)>

 

   서문을 지나 북문으로 가는 길은 비교적 평탄한 편이다. 성곽의 북서쪽 끝에는 연주봉 옹성으로 가는 길에는 또 다른 제5암문이 나온다. 성곽 바로 밑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그 이유는 암문(暗門)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아니다. 그래서 성벽 아래로 난 길을 택하면 연주봉(467.6m) 옹성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연주봉 옹성으로 가는 길>

 

   연주봉 옹성은 남한산성에 설치된 5개 옹성 중의 하나로 북서쪽의 요충지인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연주봉에서 바라보면 아차산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이 조망되고, 하남시의 이성산성과 춘궁동 일대가 한눈에 보이며, 성 내부의 지역도 관측되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최근 발굴조사 결과 옹성 끝에서 포대가 발굴되어 복원하였다.

 

<연주봉 옹성>

 

<북한산, 도봉산, 불암산-연주봉 옹성>

 

   옹성을 둘러보고 북문으로 달려간다.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창리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했다.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 이었던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기습 공격을 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만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고 한다.

 

<남한산성 전승문(북문)>

 

   정조3(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전승문(全勝門)이라고 붙인 것은 아마 그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또한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하자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는 동문과 남문, 수구문 등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1624)에 신축된 성문으로 추측하고 있다.

 

<북한산 능선-남한산성>

 

   북문에서 다시 성벽을 따라 동남쪽으로 가면 남한산이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한산성을 찾아와도 남한산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남한산(南漢山, 522)에는 이웃에 있는 벌봉을 이어서 남한산성을 보호하는 외성으로 한봉성(漢峰城)과 봉암성(蜂岩城)이 있다. 대개의 고원지대는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져서 주단야장(晝短夜長)이지만, 이 산성지역만은 주장야단(晝長夜短)의 독특한 지형을 이루기 때문에 옛 부터 일장산(日長山) 또는 주장산(晝長山)으로 불리어 왔다고 한다.

 

<남한산성 옛길 노선안내>

 

<남한산 능선>

 

   외성이 있는 벌봉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동문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동쪽 성벽을 보수하는 공사를 하는지 성벽 밑 길을 막아 버리고 우회하도록 해 놓았다. 가파르게 오르내리며 몇 고비 넘으면 남한산장경사(南漢山長慶寺)가 나온다. 장경사는 인조 2(1624) 남한산성을 고쳐 쌓을 때 전국의 승려들을 번갈아 징집하여 성을 쌓게 하였다. 축성 후에도 승군을 주둔 시켰는데 이들의 숙식을 위하여 인조 16(1638)에 건립한 절이다.

 

<남한산 장경사>

 

   1894년 갑오경장으로 승군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전국에서 뽑힌 270여 명의 승려가 교대로 산성을 보수하거나 경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산성 내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10개의 절이 세워졌는데 장경사가 창건 당시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사찰 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불자가 시주한 팔각구층석탑, 진남루(鎭南樓), 칠성각, 요사채 등이 있다. 장경사 일주문의 두 기둥은 왕성한 근육질의 변강쇠 다리 같다.

 

<남한산장경사 일주문>

 

   장경사 진입로 고개를 넘으면 남한산성 내에 있는 10개의 사찰 중 가장 역사가 깊다는 망월사(望月寺) 입구가 나오나 장경사와 마찬가지로 들르지 못하고 위치만 확인하고 그냥 지나친다. 일제에 의해 옛 망월사는 모두 소실되고 현재의 전각들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며, 대웅보전 우측에 자리한 13층 석탑은 인도 인디라 간디 수상이 직접 모셔온 진신 사리를 봉안한 탑이라고 한다.

 

<청량산 망월사 원경>

 

   망월사 입구 앞에는 동문(東門)이 나온다. 동문은 남한산성 남동쪽에 있으며 남문(南門)인 지화문과 함께 사용빈도가 가장 높았던 성문이다. 조선 선조 때와 인조 2(1624)에 수축(修築)하였으며 정조 3(1799) 성곽을 개축한 후부터 좌익문(左翼門)이라 불렀다. 낮은 지대에 있어 성문을 지면에서 높여 계단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우마차를 이용한 물자수송이 불가능하였다. 문루는 정면 3·측면 2칸 규모로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 양식이며 용머리는 망와(望瓦)로 마감하고 연등천장(椽燈天障)으로 꾸몄다고 한다.

 

<남한산성 좌익문(동문)>

 

   동문에서 산성 안으로 자동차가 왕래하는 큰 길을 건너 제3남옹성까지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남쪽 성벽에는 세 개의 옹성(1남옹성, 2남옹성, 3남옹성)이 있으며, 옹성 밑으로는 밖으로 통하는 암문이 있다. 연주봉 옹성은 암문에서 연주봉까지 연결하는 긴 성벽 통로가 있지만, 세 개의 남옹성은 암문에서부터 밖으로 반월형을 이뤄 삼면을 경계가 용이하도록 되어 있다.

 

<남한산성 남옹성(좌)과 암문>

 

<남한산성 남쪽성벽>

 

   제1남옹성과 제2남옹성 사이 고원에는 주춧돌만 남아 있는 남장대(南將臺) 터가 있다. 남장대 터를 지나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오면 남문(지화문)에 도착하여 남한산성을 일주하게 된다. 남한산성의 주변 서북부 방향으로는 고층아파트를 비롯한 건물들이 서울송파와 성남하남시 등 변두리지역을 오래 전부터 도시로 변화시키면서 빈틈없이 파고들었다. “머지않아 한양은 남한산성 아래까지 사람들로 넘쳐난다는 예언이 정감록(鄭鑑錄)에 있다는 이야기를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선배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다. 1960년대 후반인 그 때는 오지(奧地) 중의 오지였는데

 

<남한산성 남장대 터>

 

<남한산성 지화문(남문)>

 

<서울송파-남한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