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 길은 해피한 길(아홉 번째-1)
<동해추암→등명낙가사, 2017. 10. 28>
瓦也 정유순
지난번에 동해 추암의 촛대바위를 서둘러 보기 위해 지나쳤던 ‘해가사의 터’를 찾아간다. ‘해가사의 터’는 <삼국유사 수로부인전>에 나오는 ‘해가’라는 설화를 토대로 삼척의 증산해수욕장 남쪽 끝에 임해정이란 정자를 짓고, 수로부인 공원을 조성하였다. 2006년 4월에 세워진 ‘사랑의 여의주 드레곤볼’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소원을 비는 모든 이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해가사의터>
드레곤볼에는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태수(江陵太守)로 부임하는 도중 임해정(臨海亭)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해룡(海龍)이 나타나 수로부인(水路夫人)을 끌고 바다로 들어가자 남편인 순정공이 마을사람들을 동원해 막대로 언덕을 치며 해가(海歌)를 지어 부르니 용이 수로부인을 모시고 나타났다”라는 내용의 설화가 새겨져 있다.
龜乎龜乎出水路(구호구호출수로 :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약인부녀죄하극 : 남의 아내 앗은 죄 그 얼마나 큰가)
汝若悖逆不出獻(여약패역불출헌 : 네 만약 어기고 바치지 않으면)
入網捕掠燔之喫(입망포략번지끽 :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삼국유사에 나오는 해가(海歌)의 내용>
<드레곤 볼>
아침부터 소원을 빌러오는 사람들로 해가의 터 수로공원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거북이바위인지 물개바위인지 분간이 헷갈리는 바위는 동해바다를 향해 고개를 쑥 내밀고 해가를 부른다. 삼척의 증산해변에서 파도가 혀를 날름거리는 둔덕 끝을 건너면 동해시 추암해변이다. 추암해변에는 “남한산성의 정동방(正東方)은 이곳 추암해수욕장입니다”라는 표지석이 서있다.
<거북바위(?)>
<남한산성의 정동방 표지석>
터덕거리며 모래밭을 지나 추암 촛대바위와 해암정을 둘러본다. 추암해변은 해안절벽과 크고 작은 바위섬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촛대바위도 세조 때 한명회가 반한 능파대도 그대로이고, 버겁게 찾아 와서 부서지는 파도소리도 그대로인데, 살갗에 와 닿는 바람결은 더 차가워졌다.
<추암해변>
동해시는 1980년 4월 지방행정구역 개편 때 당시 명주군(현 강릉시) 묵호읍과 삼척군(현 삼척시) 북평읍을 합쳐서 동해시로 승격한 곳이다. 초기에는 두 지역의 미묘한 지역감정으로 주민통합의 어려움도 있었으나 동해시 청사를 두 지역의 경계지점에 새로 짓고 통합 노력을 해 온 결과 북평지역은 시멘트산업을 중심으로 비철금속공업지역으로 성장 하였으며, 묵호지역은 주거지역과 상업지역 그리고 어업의 전진기지로 구축을 함으로써 새로운 지역문화를 창조해가고 있다.
<촛대바위>
북평공업지역과 동해항을 건너 뛰어 용정동 범주아파트 앞에서부터 철길을 따라 묵호항으로 향한다. 해안 쪽으로는 휴전선보다 더 강한 철책이 접근을 가로 막는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의 상징인가? 언제 쯤 내 나라 내 땅을 남의 눈치 안보고 자유로이 드나 들 수 있을까? 서해안도 걸어보았고, 휴전선도 걸어보았지만 드리워진 철책은 내 마음의 날개를 꼼짝 못하게 짓누른다.
<해안철책길>
해안을 따라 북으로 뻗은 철길은 어디서 멈춰있을까? 북으로 쭉 뻗어나가 옛 발해의 영토 연해주까지 이어줬으면 하는 마음만 간직한다. 감추∙한섬∙고불개해변을 등지고 묵호항으로 접어든다. 특히 ‘고불개해변’은 도심과 가깝지만 조용하고 한적한 작은 어촌마을이 있어 다른 유명 관광지와 다르게 소박하고 한적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파시(波市)를 이루어 화려했던 시절에는 미녀들이 다 모였다는 뒷골목은 추억만 간직한 채 쓸쓸하기만 하다.
<철도>
<묵호항 뒷골목>
묵호항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삼척일대의 무연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처음 개항하였다. 1941년 국제무역항이 되면서 대규모 확장공사를 통해 부두와 방파제 등의 보강이 이루어졌다. 해방이후 동해안 제1의 무역항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동해안의 어업기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동해항의 보조항만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묵호∼울릉 간 정기여객선이 운항하고 있다.
<묵호항여객선터미널>
묵호항 바로 옆에 있는 동문산의 묵호등대는 1968년 제작된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2003년 5월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화의 고향’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이곳은 휴게시설들이 연중 개방돼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들르지 못하고 까막바위 앞에 당도한다. 다만 한 여름 밤에 펼쳐지는 오징어 배들의 불빛을 화려하게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묵호야시장>
<묵호항활어센터>
서울 숭례문(남대문)의 정동방(正東方)에 위치(국립지리원 공인, 1999년 10월 26일)한 까막바위는 왜구를 물리친 설화가 얽혀 있다. 어느 해 왜구가 쳐들어와 주민을 학살하고 마을을 약탈하자 이에 항거하는 호장을 배에 싣고 떠나자 호장이 “내 비록 육신은 죽어도 너희들이 다시는 이곳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리라” 하며 꾸짖자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파도가 들이닥쳐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숭례문 정동방>
<까막바위>
이때 남은 한 척의 배가 도망가려 하자 큰 문어 한 마리가 나타나 배를 내리쳐 산산조각을 내니 왜구가 모두 죽고, 까마귀 떼들이 시체를 뜯어먹었다. 그 뒤 이 마을에는 왜구의 침입이 끊어졌다고 한다. 까막바위 밑에 있는 두 개의 큰 굴속에 문어가 된 호장의 혼이 살고 있다고 전한다. 까막바위 부근에는 호장이 죽어서 문어가 되었다는 문어상이 있다.
<문어공원>
해안에 늘어선 횟집과 펜션들의 호위를 받으며 낚시의 명소로 알려진 어달항에 당도한다. 어민정주어항인 어달항은 다른 어항이나 해변보다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 어느 횟집 앞에는 어림짐작으로 100㎏이 훨씬 넘을 것 같은 대형 가오리가 벌렁 누워 있다. 어달항에서는 낚시로 가자미가 많이 잡히고, 항구에 나가기만 하면 언제든지 바다낚시를 할 수 있는 배가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대형 가오리>
간혹 길가에는 하수오, 인삼과 더불어 3대 명약으로 여겨지는 구기자가 잡초처럼 내버려둔 채 붉게 열매가 익어간다. 구기자는 콜린대사물질의 하나인 베타인이 풍부해서 간에 지방이 축적되는 것을 억제해 준다고 한다. 어달해변과 대진항을 뒤로하고 계속 걸으면 망상역 부근에 노봉해변이 나오고 슬픈 전설을 간직한 노고암(老姑岩)이 나온다.
<구기자>
노고암에는 옛날에 임씨 성을 가진 노인이 늘그막에 아주 젊고 예쁜 여자를 만나 10년 정도 깨가 쏟아지게 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천년 묵은 구렁이로 내일 밤 자시에 승천하니 절대 날 부르지 마시오” 하며 눈물로 당부하였다. 그러나 노인은 그간 쌓인 정 때문에 그냥 보낼 수 없어 “여보 가지 말고 같이 삽시다” 하며 붙잡는 순간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두 사람을 휩쓸고 갔으며, 그 자리에는 바위 두 개가 솟아났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길에서는 영감바위만 보이고 할미바위는 잘 안 보인다.
<노고암(영감바위)>
노봉해변을 지나면 망상해변이 넓은 백사장을 펼쳐 보인다. 수심이 얕고 깨끗한 모래사장으로 유명한 망상(望祥)해변은 남쪽의 대진(大津)항 암초에서 북쪽의 옥계(玉溪)까지 최대 폭 500m, 길이 5㎞의 좁고 긴 백사장이 길게 펼쳐진다. 망상해변의 오토캠핑리조트 부지 내에는 기존 숙박시설과 연계하여 한옥촌(2017년10월21일 개장)이 조성되어 있다. 바다와 소나무를 배경으로 한 고품격 한옥에서 휴식과 힐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망상해변>
<망상해변 한옥촌>
한옥촌을 앞으로 하여 도직해변에 도착하면 동해시를 벗어나 강릉시 옥계면으로 해안 길을 벗어나면 철길이 나온다. 어느 작은 하천을 건너는 곳에는 철제구조물로 되어 있는 가교(假橋)가 나오는데 바닥의 철판이 삭아 발이 푹 빠지려고 한다. 그리고 해안 철조망은 한 사람이 지나가는 폭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아무래도 정해진 해파랑 길이 아닌 것 같다.
<옥계로 가는 철길>
<철제가교>
<철제가교 바닥>
<걷기도 힘든 철책길>
망상리조트 앞에서 해변을 벗어나서 망운산자락을 맴돌아 옥계초등학교로 가는 길이 정해진 코스였는데, 모래와 해변에 푹 빠져 무심코 앞으로 가고 말았다. 되돌아설 수 없어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대형시멘트공장이 보이고, 저유(貯油)탱크에서 기름을 실어 나르는 탱크로리 유조차량들이 바쁘게 들락거린다. 옥계(玉溪)라는 지명은 1782년(정조6)에 강릉현 우계면이라 칭한 후 줄곧 불리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 시 ‘옥천우계(玉泉羽溪)’의 의미로 강릉군 옥계면으로 개칭되었다.
<시멘트공장>
석병산(石屛山, 1055m)에서 발원하여 옥계면을 가로지르는 주수천(珠樹川)을 건너 옥계해변 입구에서 다시 해파랑 길과 조우한다. 강원도 여성수련원이 있는 소나무 숲을 지나 금진항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길가에 핀 천국(天菊)은 가을향기를 마음껏 발산한다. 금진초등학교가 있는 금진1리는 해안에 자리한 촌락이지만 어촌보다는 농촌풍경이 더 짓게 풍긴다. 주수천 하류에서 시멘트 물류항구 조성 공사를 할 때에는 모래 속에서 동전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천국>
<주수천>
<솔밭>
<여성수련원>
<금진1리마을>
금진해수욕장을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다. 해안의 갯바위에서는 낚시꾼들의 손놀림이 한결 바빠진다. 금진항 뒤 언덕에는 대형 호텔 같은 빌딩이 하늘을 향해 뻗는다. 그곳을 차지하는 사람들이야 사적으로는 매우 흡족할지 모르지만, 전망 좋은 언덕 등은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갯바위 낚시>
<금진항과 호텔(?)>
꼬불꼬불한 헌화로인 금진해안도로를 지나면 ‘수로부인의 설화 공원’이 나온다. 삼척에도 같은 내용의 수로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대목의 지명이 서로 양쪽이라고 우기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같은 동해에 얽힌 설화이기 때문에 상호 협력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가사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 여성들의 자유분방함이 베어나는 대목이 아닌 가 나름 생각해 본다.
<수로부인 설화>
수로부인 헌화가의 영향인지 수로공원을 한참 지나면 합궁(合宮)골이 나온다. 합궁골은 남근(男根)과 여근(女根)이 마주보며 신성한 탄생의 신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으로,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의 서기(瑞氣)를 받아 우주의 기(氣)를 형성하여 음양(陰陽)의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이곳은 부부가 함께 오면 금술이 좋아지고, 기다리던 아이가 생긴다고 전해지고 있다.
<합궁골>
심곡항에 도착하여 ‘강릉부채 길’로 입장하려 했으나, 입장시간(오후 2시)이 지나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심곡(深谷)항은 ‘깊은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6∙25 한국전쟁 때에도 전쟁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강릉부채 길’은 그동안 군사보호구역에 있다가 2016년 10월에 개방된 길로 동해 탄생의 비밀을 지닌 곳으로 2300만 년 전 지각변동의 모습을 직접 살펴 볼 수 있는 해안단구 산책로이다.
<심곡어촌계 표지석>
어쩔 수 없이 강릉부채 길을 우회하여 정동진 해변으로 간다. 정동진(正東津)은 ‘한양(漢陽)의 광화문에서 정동(正東) 쪽에 있는 나루터 마을’이란 뜻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위도 상으로는 서울 도봉산의 정동 쪽에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신라 때부터 임금이 사해용왕에게 친히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2000년 국가지정행사로 밀레니엄 해돋이축전을 성대하게 치른 전국 제일의 해돋이 명소이기도 하다.
<정동진 이정표>
정동진역은 1994년 TV드라마 <모래시계>의 촬영지로 잘 알려져 있으며, 청량리역에서 해돋이열차가 운행되면서 유명한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모래시계 주연배우가 함께 했다는 모래시계 소나무가 어느 것인지 짐작만 갈 뿐 주변 공사 중으로 확인이 어렵다. 부산·동대구·대전·광주 등 전국의 여러 역에서도 이곳으로 관광열차를 운행하고 있다. 백사장 초입에는 ‘모래시계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정동진해변 광장에는 대형 해시계가 설치되어 있다.
<해시계>
<정동진 시간박물관>
강릉부채 길과 정동진에 찾아오는 관광객을 위해 여러 부대공사를 하는지 땅은 깊게 파여 있고 모래가 높이 쌓여 있다. 편의시설 등 필요한 시설은 해야 되겠지만 높은 축대나 고층건물을 지어 바람 길을 막아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현재 정동진 백사장도 바다 쪽 모래가 파도에 쓸려나가 깊게 패였다. 앞으로 걷다가 뒤 돌아보니 남쪽 산 위에는 대형 선박이 얹어 있는 형상의 ‘선 크루즈 리조트’가 동해를 향해 항해할 듯 방향을 잡는다.
<정동진해변 공사중>
<정동진해변의 모래절벽>
<썬 크루즈 리조트>
고성목과 등명해변을 지날 때는 여러 조개껍질이 모래와 섞여 있는데, 그 중에서도 ‘방패연잎성게’가 내 눈에 들어온다. 괘방산(339m) 자락의 고개를 하나 넘어 등명낙가사 입구에서 오늘여정을 마감한다. 괘방산등명낙가사(掛榜山燈明洛迦寺)는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자장(慈藏)이 창건하였다. 신라 말 전쟁으로 불에 탄 것을 고려 초에 중창하고 절 이름을 ‘어두운 방 가운데 있는 등불과 같은 곳’이라 하여 등명사(燈明寺)로 고쳤으나 조선 중기에 폐사되었다.
<방패연잎성게>
<괘방산등명낙가사 일주문>
폐사된 이유로는 3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불을 질렀다는 설이며, 둘째는 안질에 고생하던 어느 왕이 한 점술가의 말을 믿고 폐사시켰다고 한다. 셋째는 이 절이 서울의 정동 쪽에 있어 궁중에서 받아야 할 일출을 늘 먼저 받으므로, 정동 쪽 등불을 끄면 조선에서 불교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주장에 따라 폐사시켰다고 한다. 일주문 중앙에는 ‘대한민국 정동’이라는 표지석이 서있으며, 현재의 낙가사는 옛 등명사 터 옆에 1956년 경덕스님이 새로 지은 절이다.
<대한민국 정동 표지석>
<석양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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