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서울둘레길을 걸으며(7-2, 8-1코스)

와야 정유순 2017. 10. 13. 22:02

서울둘레길을 걸으며(7-2, 8-1코스)

(북한산생태공원앵봉산, 20171012)

瓦也 정유순

   당초 계획은 7-1코스 봉산구간과 연결되는 앵봉산에서 출발해야 하나 접근성이 용이한 불광역에 시작하여 북한산생태공원에서 구파발을 경유하여 앵봉산으로 가는 역코스를 선택했다. 불광역에서 북한산생태공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필자가 20여 년 전에 근무했었던 건물도 보이고, 당시에 자주 들렸던 식당도 주변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건만 그 집 그대로 남아 있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북한산생태공원에서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길 떠날 채비를 한다.

<그 때 그집>

<북한산생태공원>


   불광동의 불광(佛光)부처님의 광명이란 뜻이라고 한다. “인생의 모든 고뇌와 불행의 근본은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무명(無明)에 있으므로, 이를 부처의 불법으로 깨우치는 것이 광명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혜의 불빛으로 중생(衆生)세계의 어두움을 씻어 내려는 목표 아래 세워진 도량이 불광사(佛光寺)라는 것이다.

<불광사 측면>


   서울둘레길이며 북한산둘레길인 구름정원 길의 나무계단이 나온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아름다운 계단을 올라가는데 청아한 염불소리에 끌려 옆으로 살짝 들어가 보았더니 불광사(佛光寺) 옆구리만 눈에 보인다. 본당으로 한번 가볼까 생각도 했으나 그냥 발길을 돌려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온다. 그러나 북한산 비봉(碑峰)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불광동의 어원이 된 그 옛날의 불광사와 지금의 불광사와의 관계는 확인하지 못했다.

<구름정원길 입구>

<북한산 비봉-네이버 캡쳐>


   북한산 비봉(560)비봉능선의 향로봉과 사모바위 사이에 있는 봉우리이다. 명칭은 이 봉우리 정상에 신라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졌다고 해서 비봉이라 한다. 원래의 순수비는 훼손을 막기 위하여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여 보관하고 있으며, 순수비가 있던 자리는 1972년 사적 제228호로 지정되었고, 2006년 복제비가 세워졌다. 불광역에서 구기터널을 지나 신영동삼거리까지 이어지는 진흥로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북한산진흥왕순수비 표지석-네이버 캡쳐>


   구름정원 길 하늘전망대에서는 정면으로 빌딩 숲을 가로질러 멀리 앵봉산이 보인다. 앵봉산은 오늘 행로의 마지막 코스다. 길옆에 서있는 소나무는 작년에 난 잎 들이 노랗게 물들어 간다. 소나무가 사철 푸르게 보이는 것은 솔잎이 세상에 나오면 수명이 2년 정도여서 항상 푸른 새 잎이 치장을 해 주고 묵은 잎은 그 밑에서 조용히 낙엽지기 때문에 소나무는 일 년 내 내 푸르게 보인다고 한다.

<앵봉산 원경>

<소나무 낙엽>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누린내가 실려 온다. 나무 전체에서 누린내가 난다고 하여 누리장나무가 된 나무들이 길옆에 즐비하다. 누리장나무는 개똥나무, 깨타리나무, 개나무, 노나무 등 지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89월에 연백색 꽃이 피는데 꽃받침은 붉은색이 돌며, 열매는 핵과로 다 익으면 다섯 개의 붉은 화관에 싸여 있는 모습이 마치 고급반지에 박혀있는 보석모양이다. 어린잎은 식용으로, 나무와 잎 등은 한약재로, 열매는 천연염료로 사용한다.

<누리장나무 열매>


   진관동에 있는 은평뉴타운 폭포동아파트 뒤 산길에서 잠시 길을 잃어 헤매기도 하였으나 다시 정상 길을 찾아 무사히 내려와 폭포동아파트 끝자락에 있는 선림사 입구에서 스테핑을 하고 진관내천을 따라 내려와 아파트 쉼터에서 도시락으로 오전을 마무리 한다. 진관내천은 북한산선림사 쪽 골짜기에서 구파발사거리로 흐르는 실개천이다. 폭포동이라는 지명은 조선 때 고양군 신혈면이었던 이곳 지명이 폭포동이라는 데서 유래된 것 같다. 참고로 이곳 주변에는 탑골·삼천리골·못자리골·여기소·마고정·재각말·잿말·폭포동 등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폭포동 인공폭포>

<폭포동아파트>


   진관동(津寬洞)은 관내에 진관사라는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진관사는 1010(고려 8대 현종원년) 현종(顯宗)이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서 창건 하였다고 한다. 진관대사는 고려 제5대 경종의 비 천추태후(千秋太后)가 경종 사후에 김치양(金致陽)과 사통하여 낳은 아들을 후사가 없는 제7대 목종(穆宗)의 후계자로 옹립하기 위해 법통(法統)을 이을 열두 살의 대량원군(大良院君)을 죽이려 하자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지하 굴을 파서 화를 면하게 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진관사-네이버 캡쳐>


   진관내천을 따라 메뚜기다리와 반딧불이다리 밑으로 하여 구파발역에 당도한다. 구파발역은 진관동 구파발에 있는 지하철3호선 역으로 19857월에 개통하였다. 구파발은 서울의 서북변방에 위치하여 의주대로(義州大路)로 연결되는 교통과 통신의 요지였다. 임진왜란 이후 봉수제(烽燧制)의 실효성이 떨어지자, 이를 대신한 것이 파발(擺撥)제도였다. 급한 공문 등 소식을 전할 때 발 빠른 사람과 말에 의존하는 제도가 파발이었는데, 구파발은 서울의 돈화문에서 벽제와 파주로 이어지는 파발막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메뚜기다리>

<반딧불이다리>


   구파발역 큰길을 건너가면 높은 굴뚝으로 위용을 자랑하는 은평환경플랜트라는 시설이 나온다. 이 시설은 은평뉴타운 곳곳에 설치된 쓰레기 집하기를 통해 쓰레기를 투입하면 쓰레기 수송관로를 통해 이곳으로 모이게 되고, 모인 쓰레기를 1,300가 넘는 고온에서 소각하며, 소각열은 은평 뉴타운의 난방열로 다시 공급한다. 또한 소각하고 남은 재는 건설현장의 바닥재로 재활용 한다고 한다. 은평환경플랜트 뒤뜰에는 방아다리 꽃길이 조성되어 있으며 앵봉산으로 연결된다.

<은평환경플랜트>


   앵봉산(鶯峰山, 235)은 서울둘레길 7코스의 마지막 지점으로 꾀꼬리[()]가 많이 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름 철새인 꾀꼬리는 4월 중순이면 날아와서 번식준비를 하기 때문에 봄에서 여름까지 아름다운 꾀꼬리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앵봉산 입구에는 아직도 시들지 않는 붉은 장미가 가는 세월을 부여잡고, 너와로 지붕을 이엉한 정자도 한가롭다.

<앵봉산입구의 장미>

<너와정자>


   정자를 지나 막 산으로 접어드려는 순간 구기자(枸杞子)가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 없이 외롭게 허리를 굽힌다. 하수오, 인삼과 함께 3대 명약으로 여겨지는 구기자는 콜린대사물질의 하나인 베타인이 풍부해서 간()에 지방이 축적되는 것을 억제하여 준다고 한다. 자연적으로 자랐는지 누가 일부러 심었는지는 모르지만 다음에 와서도 꼭 보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구기자>


   숲속으로 들어가면 능선을 따라 반공호가 늘어서 있다. 방공호는 1968121일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습격사건(일명 121사태) 이후 전방부대를 시작하여 해안과 주요경비구역에는 어김없이 방공호를 파놓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남북관계가 완화되면서 지금은 무슨 시설인지 알 수 없는 상흔(傷痕)처럼 남아 있다.

<방공호와 초소>


   정상을 향해 계단으로 올라가면 우측으로는 철조망이 경계를 나눈다. 이 철조망 너머에는 서오릉(西五陵)이 자리하는 구역이다. 사적 제198호인 서오릉이 능지(陵地)로 선택된 계기는 1457(세조3) 세자 장(, 후에 덕종으로 추존)이 사망하자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따라 길지를 찾다가 이곳이 추천되어 지정됨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후 조선시대 왕가의 무덤이며 숙종의 능인 명릉을 비롯하여 창릉, 익릉, 홍릉이 들어서면서 서오릉이라고 한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龍頭洞)에 소재한다.

<앵봉산 가는길-우측은 서오릉 구역>


   통신기지국 타워가 있는 앵봉산 정상을 넘어 내려오면 봉산코스와 이어지는 서오릉로와 만난다. 행로를 끝내면서 나는 걸을 때만 명상을 한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정신은 오직 나의 다리와 함께 움직인다.” 프랑스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17121778)의 말을 떠 올려 본다. 나도 루소처럼 걸을 때만 명상을 하고 있는가? 루소는 이성보다 감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인위적인 문명사회의 타락을 비판하고 자연으로 돌아 갈 것을 역설하였다.

<앵봉산통신기지국>

<서오릉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