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의왕의 삼남길과 수원의 해우재

와야 정유순 2017. 9. 18. 10:38

의왕의 삼남길과 수원의 해우재

(사근행궁터해우재, 2017917)

瓦也 정유순

   모처럼 일요일을 맞이하여 휴식을 취하는데 길을 걷지 못하여 좀이 쑤신다. 이를 눈치 챈 옆 지기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 의왕시에서 수원시 이목동에 있는 해우재까지 삼남길을 걸어보자고 하여 의왕시 고천동에 있는 의왕시 별관 앞의 사근행궁 터로 향한다. 삼남길은 조선시대 대로 중에서 최고 긴 길로 경기·충청·전라삼남지방을 관통하는 길이다. 전남 해남부터 강진나주광주익산공주천안수원을 지나 서울에 이르는 천리 길이다.

<사근행궁터>


    ‘사근행궁 터는 의왕시(義王市)의 옛 중심지이자 현릉원에 능행을 가던 정조(正祖)가 쉬어 가던 곳이다. 1789년 능행길에서는 이곳에서 아버지를 기리며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으며, 이곳에 행궁을 지어 이름을 사근행궁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의왕시 별관이 들어서 있고, 표지석만 세워져 있을 뿐 표지석 주변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고, 잡초가 무성한 것으로 보아 관리는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사근행궁터 안내판>


   삼남길 표지를 따라 의왕시청 앞으로 하여 오봉산 남쪽 자락으로 들어서면 평범하지 않은 묘역이 나온다. 마침 벌초 중이라 묘역으로 들어가 주인을 확인한 바, 조선 중기의 처사이자 효자인 김인백(金仁伯, 15611617)의 묘이다. 본관은 청풍으로 청풍김씨 인백파(판서공파)의 파조(派祖)로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처사(處士)]였으나, 어려서부터 효심과 우애가 두터웠으며 천성이 유순하여 학행이 각별하였다고 한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왕곡동 왕림마을 청풍김씨 묘역에 있다.

<김인백 묘소>


   의왕중앙도서관을 지나면 고고리(古古里)마을이 나온다. ‘고고리는 원래 골골(谷谷)이 였는데, 고골이로 변했다가 한자로 지명을 바꿀 때 古古里(고고리)로 변한 것 같다. 이곳은 성종의 아들인 전주이씨 전성군(全城君)의 고손인 이정(李禎이 좌승지를 지낸 후 이곳에 낙향하면서 촌락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 이전만 해도 타성(他姓)은 일체 살지 못할 만큼 전주이씨 누대의 세거지(世居地)였다.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일하여 고천동사무소 뒤 산신제당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낸다고 한다.

<고고리 안내판>


   과천의왕(봉담) 고속화도로 밑으로 빠져나와 골사그네마을로 경유하여 인적이 드물어 잡초가 우거진 풀숲을 해치고 지지대고개로 향한다. 길이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두 사람이 반복하여 오고가다보면 길이 만들어 지고, 걷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길의 폭이 넓어지며 더 사람의 수가 늘어나면 편의시설도 생겨난다. 그러나 그 넓던 길도 사람의 발길이 뜸해지거나 끊기면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습성 때문에 길이 좁아지거나 폐쇄되기도 한다.

<삼남길 안내판>


   지지대(遲遲臺)고개는 광교산(582)산 자락으로 수원시와 의왕시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이다. 정조가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륭원(顯隆園) 전배(展拜)를 마치고 환궁하는 길에 이 고개를 넘으면서 멀리서나마 현륭원이 있는 화산을 바라볼 수 있으므로 이곳에 행차를 멈추게 하고 뒤돌아보면서 행차가 느릿느릿 하였다하여 이곳의 이름을 한자의 느릴 지()자 두 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말발도리(?) 꽃>


   국도 제1호이자 경수국도변인 고개에는 지지대비(遲遲臺碑)가 있다. 이 비석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1807(순조7)에 화성어사 신현(申絢)이 건립하였다. 홍문관제학 서영보(弘文館提學 徐榮輔)가 비문을 지었고 전판돈녕부사겸판의금부사 윤사국(前判敦寧府使兼判義禁府使 尹師國)이 글을 쓰고 수원부유수겸총리사 홍명호(水原府留守兼總理使 洪明浩)가 비의 상단 전자(篆字)를 썼다.

<지지대 비각>


   지지대휴게소를 지나 잡초에 묻혀버린 길을 더듬으며 해우재로 향한다.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에 있는 해우재(解憂齋)는 수원시 화장실문화전시관으로 사찰에서 화장실을 가리키는 해우소(解憂所)에서 비롯된 것으로 근심을 푸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12기 민선 수원시장(19952002)을 지내고 제17대 국회의원(20042008)을 지낸 상곡 심재덕(桑谷 沈載德, 1939.12009.1)이 세계화장실협회 창립을 기념하고 화장실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30여 년 간 살던 자신의 집을 변기모양으로 새롭게 짓고 해우재라 이름 하였다.

<해우재 표지석> 


   200711월에 완공된 해우재는 고인의 유지에 따라 유족들이 2009년 수원시에 기증하였으며, 이에 수원시는 2010년 해우재를 화장실문화전시관으로 전환하였고, 2012년에는 화장실문화공원으로 확대 개장하였다. 2015년에는 전시체험교육 등의 기능을 갖춘 해우재 문화센터가 건립되어 세계 최초의 화장실 테마공원으로 발돋움하였다.

<해우재>


   화장실문화공원에 들어서면 우선 똥통을 조형한 똥통문을 지나야 한다. 백제시대의 여성용 요강 변기와 동물모양의 남성용 소변기 호자가 선을 보인다. 여성용 요강 변기는 앞부분이 높고 뒷부분이 낮아 걸터앉기 편하게 되어 있다. 남성용 소변기는 입을 벌린 채 앉아 있는 동물의 모양을 형상화하여 해학적이면서도 백제의 독창적인 면을 보여준다. 또 신라시대 귀족여인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추측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이라고 할 수 있는 노둣돌이 설치되어 있다.

<똥통문>

<백제시대 여성용 요강>

<백제시대 남성용 소변기 호자>

<신라시대 노둣돌>


   조선시대 임금이나 왕비들이 사용했던 매화틀과 매화그릇, 제주도의 똥을 누면 돼지가 받아먹는 가장 자연친화적인 화장실 통시변소, 주로 하인들이 이용하는 지붕 없는 뒷간, 마당에서 아기가 똥을 누면 이를 받아먹는 똥개와 마당풍경,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뒷간과 울릉도에서 사용하던 움집형 투막화장실, 오줌 싼 아이에게 키를 쓰고 소금을 얻어 오게 하는 키 쓴 아이, 고대 로마변기와 중세 유럽변기 및 현대의 변기 등 똥과 화장실에 관한 역사와 풍습을 볼 수 있다.

<매화틀과 매화그릇>

<지붕 없는 뒷간>

<제주도 통시변소>

<뒷간>

<똥개와 마당풍경>

<움집형 투막화장실>

<키 쓴 아이>

<고대 로마(좌) 중세 유럽(중) 현대(우) 변기>


   더욱 재미 있는 것은 일을 볼 때 사람들의 표정들이다. 백제 무왕 때 조성된 한국 최초의 대형공중화장실인 전북 익산의 왕궁리의 왕궁화장실의 모습, 개인의 취향에 따라 표정 짓는 얼굴들, 변기에 앉아 심각하게 생각하는 모습, 새끼줄을 걸어 놓고 항문을 문질러서 사용했던 밑씻개, 똥을 운반할 때 사용하는 똥장군과 똥지게, 방에 두고 오줌을 누는 그릇 요강 등 우리의 뒷간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익산 백제왕궁 터의 공중화장실>

<화장실에서의 표정모습>

<화장실에서의 표정모습>

<화장실에서의 표정모습>

<화장실에서의 표정모습>

<밑 씻개 새끼줄>

<움집형 투막화장실>

<요강>


  심재덕은 외갓집 뒷간에서 태어나 얻은 이름이 개똥이었고, 수원시장 재직 시부터 화장실문화 운동을 시작하여 세계 언론으로부터 받은 별명이 미스터 토일렛(Mr. Toilet)이다. 해우재는 화장실문화운동을 위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던 심재덕의 철학과 신념을 나타내는 상징적 존재인 것 같다. 그리고 고인은 화장실이 더 이상 배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사색과 휴식, 전시와 만남 등 에너지 재충전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려고 노력해온 것 같다.

<미스터 토일렛 심재덕 흉상>